11월 5일 : 그 흔적만이 남은 자리
“슬프지만 꼭 알아야 하는 슬픔도 있다.”
새로 지은 아파트 옆에 세워진 방음벽에서
조류충돌사방지를 위한 하얀 도트를 보면서 떠올렸다.
몰랐을 때는 바다가 보이는 투명한 통유리창 카페가 그렇게 멋지게 느껴졌었지.
보이지 않는 죽음,
죽음의 흔적만이 남은 자리.
애도하는 자가 없는 죽음…
알고 나면 쉽게 지나치지 못하는 슬픔이 있다는 것을.
며칠을 앓다가 기운을 차렸다.
주말부터 독감을 앓은 아이를 돌보다가 전염되었을 줄 알았는데
두 차례 검사를 했는데도 음성이었다.
독감 확진을 받고 수액주사를 맞은 막내는 하루 만에 열도 내리고 근육통도 사라졌다.
나도 독감이라면 차라리 주사라도 맞아 빨리 회복할 수 있을 텐데 아니었고, 지독한 감기몸살인지..
사흘을 오한과 근육통이 왔다가 약 먹고 땀을 흠뻑 쏟기를 반복하면서 앓았다.
첫째 아이 기말고사 기간이라, 막내와 나는 격리도 하고 잘 때도 마스크를 쓰고, 소독수로 손잡이와 스위치 등을 닦고 다녔다.
큰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집 청소를 해놓고, 막내를 챙겨주고 다시 누웠다. 또 열이 좀 내리면 점심을 챙기고, 병원도 다녀오고... 그렇게 3일을 보냈다.
나도 맘 편하게 누워서 쉬고 싶었다.
나도 아프면 약도 챙겨주고, 밥도 챙겨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고2 때인가.. 주말인지, 방학인지 학교에 안 가는 날이었다. 몸살이었는지 밤새 많이 아팠다. 아침까지 누워있었는데..
엄마가 아침인데 안 일어나고 뭐 하냐고, 게을러 자빠져서 누워있다고 야단을 치며 말했다. 늦게나마 아프다는 말에 왜 말을 안 했냐고 했지만..
그다음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약을 주었나? 확실한 건 병원에 가지 않았다.
의료보험료가 연체되어서 병원에 갈 수 없었던 것 같은데, 의료보험혜택을 받지 않으면 진료비가 많이 나와서 안 갔는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다만 아직까지도 그것을 기억하는 것은…
아픈 나에게 엄마가 게을러서 빈둥댄다며 소리를 질러서..
엄마가 나에게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 아프다는 나를 그냥 내버려 둔 것이 마음속에 콕 박혀 있었던 것 같다.
누구나 몸과 마음이 아플 때는 ‘엄마’하고 울기도 하고….엄마를 부른다는데….
어제 누워있는데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미 하루 전에 큰언니에게 주말부터의 상황을 전해 들어서 알고 있었다.
엄마는 엄마대로 힘이 들어서, 이 얘기 저 얘기 꺼내면서 울먹이고.. 우시고, 자신의 불안과 걱정, 불편함을 쏟아내신다.
쉬어빠진 내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을까. 애가 아프다고 하니, 아이도 너도 힘들겠단 얘기는 하셨지만, 큰언니에게 자기가 말한 대로 잘 전해 달라고 했다.
엄마 마음 편하시게 하라고, 언니도 나도 엄마 걱정해서 그런 거라고 얘기하고 끊었었다.
오늘 아침, 조금 기운을 차리고 청소를 하고 있는데 엄마에게 또 전화가 왔다.
어제 언니에게 전해 달라는,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시면서 자기 결심을 이야기하신다.
말끝에는 너희들 신경 쓰이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시는데
정작 엄마는 우리가 어떤 부분에서 상처받고 힘든지 모른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 아프게 한다.
아이 안부를 물으신다. 학교에 갔다 하니, 다행이네.. 그리고 통화를 끝냈다.
엄마는 끝내 내 안부는 묻지 않으시고, 본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창구로 나에게 전화를 거신다.
큰언니에게 엄마의 전해 달라는 이야기를 전하려고 전화를 했다.
“너는 괜찮니?”
목소리가 아직 안 좋다고, 독감이 아니면 그동안 네가 너무 신경을 많이 써서 몸과 마음이 고돼서 아픈 거 같다고 토닥여 준다.
언니도 많이 아팠다는 걸 안다. 월요일에 통화했을 때, 언니가 꾸역꾸역 울음을 집어삼키는 걸 알았다.
며칠 동안 아파 누워있을 때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잠시 아파 누워있지만 아버지는 계속 병상에 누워있으니 얼마나 힘들지 그런 생각도 하게 되었다.
서러웠겠지, 버려지는 느낌이 들었겠지, 화가 나고 원망이 되었겠지. 그래서 지난 주말에 또 난리를 피워서 엄마의 마음을 휘저었겠지.
엄마는 또 우리에게 어떡하지, ‘난 못하겠다’ 했다가, 하루가 지나면 또 ‘~이렇게 할게’ 했다가,
나에게 전화해선 ‘죽기 전까지는 곁에 있어주고 싶다’고 우시다가, 다음 주엔 간병인 안 쓰고 자신이 돌보겠다고 하시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자식에게 물으실 때는 책임을 떠맡는 기분이 들고, 그래도 마음을 써서 도우려 노력하면
아버지와 엄마 사이를 갈라놓는 악역으로 만들어 버리시니… 매일 엎치락뒤치락하는 나의 하루는 누구를 탓해야 하나..
언제까지 엄마 아빠 사이의 문제 때문에 우리 삶이 금이 가고, 흔들려야 하나.
간병비나 요양병원이나 앞으로 부담해야 할 재정적인 문제들도 작지 않지만, 마음이라도… 마음이라도 다치지 않고 싶은데
이미 부서진 마음에 애써 이어 붙인 풀칠도 마르기 전에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그동안 계속 생각해 왔다.
나는 이 부고일기를 왜 쓰려고 했던가?
너무 힘이 들어서. 내 안에 담고만 있기엔 터져버릴 것 같아서. 내 안의 두서없는 슬픔을 정리하고 싶어서.
아픈 것을 아프다고 이야기하고, 슬픈 것을 슬프다고 이야기하고 싶어서. 괜찮다는 말 뒤로 숨어버리는 나 자신을 위해서…
아버지가 사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과거를 ‘끝맺음’하면서 아름다운 이별을 준비해보고 싶었던 나는 죽었다.
이것이 내게 진정한 ’부고‘일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더 쓸 이야기가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