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가치관을 정립해 가는 ing
일이 끝나고 저녁 모임에 가기 전, 남편에게 필요한 용품 몇 가지를 사려고 롯데몰로 향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양말과 히트텍을 사고 잠시 화장실에 들러 화장을 고치려고 앉았다. 순간, 예전에 출강하던 때가 생각났다. 오늘처럼 찬 바람이 불던 날, 수업 시작까지 애매하게 시간이 남아 어디를 가야 할지 고민하던 때, 이미 스타벅스는 아침 수업 후 다녀왔기 때문에 또 들어가고 싶지 않았고, 식당에 가서 무얼 먹기에는 좀 애매하고, 하루 종일 밖에 있어서 이미 지쳐 밥 맛도 없던 때, 근처 롯데몰에 들어갔다. 옷 가게, 화장품 가게 내가 다 좋아하는 브랜드 투성이었지만 나는 파우더 룸이 있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살짝 찬 공기가 느껴지는 아무도 없는 텅 빈 파우더 룸에 앉아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자 그제서야 긴장감이 풀렸다. 잠시 멍 때리고 앉아 있다 거울에 비친 내 지친 얼굴을 보며 한숨이 나왔다. 다음 수업에 가기 위해 화장을 고치며 잠시 쉬던 그때... ‘ 맞아... 그때도 지금 화장실처럼 코끝이 시리게 추웠지..’라는 생각을 잠시 하다가 지금은 그때와 다른 온도가 느껴진다는 걸 알아챘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때나 지금이나 화장실 공기는 차갑지만 마음의 온도가 달랐다. 당시에는 너무 힘들고 지쳐 마음속에 차가운 공기만 맴돌았다면, 지금은 따뜻하고, 평온하고, 포근하다. 노트북과 주전부리, 파우치, 그리고 중간에 다니면서 읽을 책으로 무겁던 가방과 달리 지금은 한결 가벼워진 가방에서 파우치를 꺼내 화장을 잠깐 고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화장실에서 걸어 나왔다.
그때는 내 삶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라서 힘들었다. 모르면 알아가면 되는데 내 시선은 항상 남들과 나를 비교하느라 바빴고, 어떻게 든 살아남고자 하는 마음에 많이 바둥거렸다. 마음에 불만이 많았고 매사 불안했다.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몰라서, 마음이 불안해서 항상 큰 가방에 물건을 이것저것 쑤셔 넣고 다녔다. ‘혹시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가지고 가자’ ‘혹시 갑자기 배고픈데 뭐 사 먹을 시간이 없을지도 모르니까’ ‘갑자기 다리가 아파질지도 모르니까 운동화도 가방에 넣어야지’…. 가방이 무거운 만큼, 몸도 무겁고, 마음도 무거웠다. 그래서 더 피곤하고 지치기 일쑤. 결국 집에 들어가기 전 내가 쉴 만한 곳은 롯데몰에 위치한 화장실 파우더 룸이었다.
지금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많이 찾은 상태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부러워하며 비교하던 버릇은 어느덧 연기처럼 사라졌고, 내 삶에 선택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던 내가 인생을 걸어가며 미션처럼 매 순간 튀어나오는 선택의 길 앞에 나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지만 생각할 뿐이다. 그리고 지금 나에게 주어진 삶에 자족함을 배우는 중이기도 하다.
영화 곡성에 나오는 대사 중 “무엇이 중헌디?” 란 말이 요즘 더 와 닿는다. 무엇이 중요한지 몰라 내 인생의 가치관을 스스로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오히려 잘 나간다는 사람들의 인생 철학관을 내 인생에 대입하느라 바빠 몸과 마음이 항상 춥고, 불만이 가득하고, 힘들었다. 하지만, 나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내 주변을 맴돌던 차가운 공기는 어느덧 따스한 공기로 변하여 나를 감싸기 시작했다. 화장실 거울에 비친 피곤하고 지침이 가득한 얼굴에서 그저 오늘을 최선을 다해 만족하며 살아가는 내 모습이 나를 비치고 있을 뿐이다.
가끔 청소년 아이들의 고민을 듣거나, 주변 사람들의 고민을 듣다 보면 그들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있다. “너에겐 무엇이 중요하니?”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돈, 명예, 성공이 그들 인생에 중요하지 않은 것일 수 있다. 혹은, 절대적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쉽게 돈이, 성공이 인생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뒤를 쫓는다. 하지만 질문을 조금 바꿔본다면 어떨까? 온전히 내가 내 인생에 주체가 되어 나의 삶에 필요한 것, 돈이 아니라, 성공이 아니라, 누구의 인정이 아니라면.. 무엇이 나에게 중요한 것인가?
그렇다면 지금 누군가 나에게 무엇이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행복한 것, 자족할 수 있는 마음, 그리고 온전히 나로서 사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행복과 온전히 나로서 사는 것은 돈과 명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내 마음에서 우러러 나오는 행복감. 그리고 그 행복감을 내가 사랑하는 가족과 지인들과 나누는 것.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손수 밥을 차려서 같이 먹는 것, 하나님이 주신 내 재능을 안주하지 않고 계속 열심히 갈고닦아 그때그때 필요한 곳에서 쓰이는 것, 고소한 버터 냄새를 맡으며 맛있는 빵과 과자를 구워 나누는 것, 책을 읽는 것, 글을 쓰는 것, 음악을 듣는 것, 아늑한 보금자리에서 가족들과 행복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 일하며 바쁘게 살던 삶에서 천천히 나의 삶에 중요한 요소들을 알아채고 확장시켜 나가며 내 삶의 질을 높이는 것. 이것들이 나에게 중요하다.
돈, 성공은 삶에 필요한 한 수단이지 내 인생의 절대적 가치가 아니라는 것을 적립한 순간,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한 삶의 온도를 느끼고 있다. 더 이상 내 삶 내 주변이 춥지도 차갑지도 않다.
작은 것을 보고도 웃을 수 있는 기쁨, 조금이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는 기쁨,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아빠 엄마와 그리고 남편과 깔깔대며 웃는 시간, 상대의 정성에 감동할 수 있는 마음, 지금 일 하는 곳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알고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맡기는 것, 그리고 다 잘 될 것이라 믿는 것… 그 마음가짐이 이 행복감이 주는 만족감은 예전에 무거운 가방을 메고 혼자 뭐라도 해보겠다며 낑낑거리던 때와는 다르다.
화장실에서 나와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우울하게 걸어가던 예전과 달리 화장실에서 나와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활기차게 걸으며 다음 장소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던 월요일 저녁. (11/09/2020)
글: Joy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