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이처럼 사소한 것들>

타자의 고통 인식, 윤리적 딜레마, 환대, 카톨릭 알레고리

by joyakdoll
iIdBv0pMqZ9XKYOQeK42N1LZIeN.jpg


오직 킬리언 머피라는 배우를 보고 선택한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었다. 크레딧이 다 올라가서야 불이 켜지는 영화공간 주안의 상영관 안에서 영화의 여운을 느끼며, 극장에서 보기를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 영화의 서사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주제의식을 소화하기 때문인데, 영화의 주인공 빌 펄롱은 '타자의 고통을 인식'한 이후 '윤리적 딜레마'를 고민하고 결국에는 그 타자를 '환대'하는 선택을 한다.


타자의 고통 인식 - 과거 경험을 통해 형성된 시선


빌 펄롱은 그의 아내 아일린의 말마따나 불필요하게 타인에게 동정과 연민을 보이는 인물이다. 그는 동네 이웃의 아들이 초라한 몰골로 헤매이고 있을 때, 굳이 차에서 내려 소년의 상태를 살피고 용돈을 건넨다. 그는 땔감공장의 사장으로서, 굳이 주지 않아도 될 보너스와 복지를 직원들에게 제공한다.


그는 거리에서 우유를 훔쳐 먹는 가난한 소년을 보며 괴로워하고, 자신이 누리며 살고 있는 것에 회의를 품는다. 이러한 측면은 크리스마스라는 시간적 배경에 겹쳐지면서 더욱 두드러지는데, 가족들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고르면서 빌은 자신의 집 내부에 존재하는 행복이 외부에도 보편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인지 의문을 가지며 공허한 감정을 보이게 된다.


그로 인해 타인을 배려하고 호의를 제공하는 일에서 나아가 빌은 외부에서 소리를 질러가며 존재를 알려오는, 타자의 고통을 인식하게 된다. 수녀원은 그 인식이 행해지는 공간인데, 극 초반 빌은 부모의 손에 의해 수녀원에 끌려온 소녀를 멀리서 바라보며 괴로워한다. 이는 소녀의 상황에 감정 이입하여 고통에 공감하는 것일 뿐더러 그 상황을 멀리서 지켜보며 방관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서 비롯되는 고통이 동반된다.


그리고 다시 수녀원을 찾았을 때 빌은 나아가 정산을 받겠다는 명분 아래 문이 열린 수녀원으로 들어간다. 이는 실제로 수녀원이라는 공간 내부로 진입해, 그곳에 실존하는 고통을 확인하고자 하는 빌의 욕망에서 비롯된다. 아래에서 말하겠지만 그는 고통을 찾는 눈을 가진 셈이다. 이제 그는 자신에게 달려와 구해달라는 소녀의 외침을 마주하지만, 바로 건물에서 쫓겨나게 된다. 여기까지는 고통의 징후를 발견하는, 고통스러워하는 목소리를 듣는 단계이다.


10760_35085_1237.jpg


그러나 빌은 자신이 배달한 목탄을 보관하는 창고에서 임신한 채로 쫓겨난 소녀 세라를 발견하게 되면서 고통을 직접적으로 목격하는 단계로 들어선다. 그는 수녀원으로 그녀를 돌려보내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만, 수녀원이 소녀에게 고통을 제공하는 주체임을 확인하고 좌절한다. 그가 다시 수녀원을 떠날 때, 그녀의 이름을 물어보며 나름대로 용기를 내지만 이어서 목격하는 것은 세라와 같은 소녀가 무수히 많은 수녀원 아침 점호의 풍경이다. 이는 개인의 고통에서 확장해 문제를 바라보는 일종의 장치가 된다.


중요한 것은 타인의 고통에 귀기울이고 그를 해결하지 못하는 데서 죄책감을 느끼는 주인공의 성격이, 여타의 도덕적 딜레마를 안온하게 다루는 작품들처럼 '인간은 원래 선하니깐', 하는 식으로 심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빌은 미혼모였던 자신의 어머니와 뱃속의 자신을 환대해준 윌슨 부인 덕분에 모자람 없이 생활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가정에서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경험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이름이 세라였다는 점은, 직접적으로 세라라는 소녀에게 연민을 보이는 중요한 지점이 된다. 타인의 환대로서 삶을 영위할 수 있던 환경,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 무력했던 경험을 토대로 그는 타인을 위하고 동정하는 성격을 지니게 된다. 이는 곧 모두에게 한없이 관대하지만 어린 여성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들을 경계하며 가정을 지키고자 하는 모습을 보이는 데서 확인된다.


그리고 그를 통해 빌은 한 단계 더 나아가는데, 바로 고통을 예견하는 단계다. 빌은 과거를 떠올리며 괴로워하던 도중 불현듯 세라를 발견했던 수녀원 목탄 창고로 걸음한다. 그는 세라가 또다시 쫓겨나 목탄 창고에서 고통스러워하며 떨고 있을 것을 예지하고 그가 맞았음이 증명된다. 자신의 경험과 타자의 고통을 목격하고 인식한 과정이 결합되어, 그는 고통이 실재하는 곳을 앞서 찾는 존재로 나아간다.


20241018500023.jpg


윤리적 딜레마 - 딜레마를 만드는 세계


극중 계속해서 빌 펄롱은 타인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고, 그가 존재하는 세계는 그 동정의 무가치함과 그 이상의 위험성을 지적하면서 일종의 딜레마가 형성된다. 이러한 딜레마는 앞서 말했듯 그의 동정을 조소하는 세계로부터 만들어진다.


빌 펄롱을 비효율적이며 무지성한 사람으로 지칭하는, 1958년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의 세계는 자본주의와 아일랜드 가톨릭을 토대로 하는 지배적 이데올로기 하에 구성된다. 빌의 아내 아일린은 타자에게 동정심을 품는 빌을 이해하지 못하며, 수녀원의 소녀들을 걱정하는 그에게 우리의 자식들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고통이 '우리'의 장소 밖에 존재한다면 그것은 무관한 일이라는 아일린의 논리는 장소에서의 주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행위로서 빌의 태도와 상반된다.


SHyoAWdU22Glvrvn20s39ccpP_w.jpg


아일린과 마찬가지로 빌이 직원들에게 맥주를 산 술집의 사장 역시 사적으로 그에게 소녀들을 학대하는 수녀원과 척을 지지 말 것을 권장한다. 주변인들의 의견은 목탄 공장의 가장 큰 고객인 수녀원과 적대적 관계가 되어서는 사업에 큰 손실이 된다는 논리에서 비롯된다. 실제로 수녀원의 수녀 역시 빌에게 다른 목탄 공장의 이름을 대가며 그에게 수녀원이 상위의 자리에서 그를 지배하는 대상임을 각인한다.


이는 곧 인본사상이 철저히 배제된 자본주의의 논리로서 기능하는데, 수녀원의 지배적 위치를 아일린과 술집 사장이 함께 보위하는 것은 수녀원이 영화의 배경 도시 속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 확인함으로써 설명된다. 영화에서, 그리고 원작 소설의 실제 배경인 1958년 아일랜드에서 수녀원은 국교는 아니지만 국민 대부분이 따르는 아일랜드 카톨릭의 지배적 기관이다. 그리고 나아가 학교를 운영하며, 자본 시스템의 가장 상위에 존재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이 영화에서 수녀원은 가장 상위의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로서 기능한다.


MV5BMzZkMTZlNjEtYThjOC00NTI2LWJkNTItY2EzMWU3NTgxYzdiXkEyXkFqcGc@._V1_.jpg


그러나 작품이 아일랜드 카톨릭을 비롯한 종교 자체를 비난하는 입장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카톨릭 본래의 성격을 옹호함과 동시에 자본과 결합해 타락해버린 지금 시점에서의 교회를 비판한다.


영화에서 눈여겨볼 점은 과거 빌의 어머니의 연인으로 보였던 '네드'라는 인물인데, 빌은 어릴 적 어머니를 잃었을 때 그가 자신을 돌보아주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가 없는 사생아로서 빌은 네드가 자신의 아버지일 수 있음을 의심한다. 이 추측은 빌이 네드가 살던 집을 찾아갔을 때 그의 가족이 빌을 보면서 네드와 참 닮았다고 말하는 데서 두터워진다. 추측하건대 네드는 사생아로서 아버지의 존재를 몰랐던 빌의 실제 아버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빌은 어머니가 죽은 이후에도 자신을 돌보아주었던, 네드를 떠올리며 자신에게 부재한다고 생각했던 부성애를 추억한다.


606539645_Fm7T9rzC_5d95b26f4638ba6ce03771210e9b9357e900658e.jpg


이 이야기는 빌의 어머니가 아이를 낳기 직전 타인을 방문해 환대를 받았다는 사실에서 의미를 가진다. 다시 말해 세라는 수녀원에서 주로 모시는 대상, 성모 마리아와 닮아있다. 그리고 아버지의 모습으로 실재하지는 않지만 아버지로 보이는, 네드는 마리아를 잉태하게끔 한 야훼의 모습을 닮는다. 과거 윌슨 부인이라는 선인은 임신한 상황에서 고통받는 어머니 세라를 환대하며 맞이해주었으며 이는 카톨릭 본래의 교리 자체로 상징된다. 그러나 영화의 현 시점에서의 카톨릭 교리는 무용한 것으로, 임신한 소녀를 내쫓아 목탄 창고에서 아이를 낳게끔 하는 수녀원의 폭거에서 증명된다. 이는 또한 야훼를 상징했던 네드라는 인물이 지금은 늙고 병들어 양로원에 가있다는 점으로 그려진다.


환대 - 환대를 제시하는 형식


야훼(네드)와 마리아(세라) 사이에서 태어난 빌은 이제 선택을 해야 한다. 그는 마땅히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일종의 구원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다시 한 번 목탄 창고로 내쫓겨진 세라를 발견했을 때 빌은 망설이지 않고 그녀를 일으켜 자신의 집으로 향한다.


그녀를 부축하고 업어가면서 집까지 향하는 과정을 영화는 꽤 길게 보여주는데, 이 모습은 예수에게 가해진 십자가의 고난을 떠올리게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과정에서 빌의 움직임을 담아내는 형식이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빌이 '불필요하게' 연민을 보이는 순간, 그의 움직임이 화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향하게끔 카메라를 배치함으로써 그가 당시의 일반적인 관념에 반하는 인물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극 초반 소년에게 용돈을 쥐어줄 때도 차를 몰고 가던 그의 모습을 화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보여주다가, 그가 소년에게 가기 위해 차를 멈춰세우고 내리는 순간 카메라는 180도 라인 반대편으로 넘어와, 소년에게 가는 걸음이 화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향하게끔 설계한다.


yb9l2YMefxQbn-UDB9Hux5rHvLxiAUvsiKpOcDGJy0239TYQHCdt7gpJ0KlGWD6_XGX1_-uu5XSQkJb8cG0Se5Z-sJWqx4ioPQYhgcjHHNha45PekuTWvQ


흔히 인물이 화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일 때 관객은 편안하며 인물의 행위를 올바르다고 인식하고, 반대의 움직임에는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영화의 거의 마지막 순간까지 카메라는 빌이 타인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 움직일 때, 그가 화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움직이게끔 위치하여 그의 연민이 당시 사회의 시선의 표현대로 불필요한 것처럼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마침내 세라를 데리고 그의 집에 돌아오는 쇼트에서 카메라는 두 인물의 움직임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향하게끔 위치함으로써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시선을 전복시키고 자신들의 선택이 옳았다며 항변하게 된다.


집으로 들어온 뒤 빌은 어느 때나 그랬던 것처럼 목탄이 잔뜩 묻은 자신의 손과 팔을 닦는다. 이는 영화 중반 강조되었듯 일종의 죄책감을 씻어내는 행위로 보인다. 빌은 어머니를 잃은 이후로 계속해서 지녀왔던 죄책감을 목탄 작업을 통해 덜어내는 인물로 보인다. 그의 아내 아일린의 말마따나 타인의 도움 덕에 고통을 겪지 않고 유복하게 자랐다는 죄의식으로로 인해 더럽고 힘들어보이는 목탄 작업의 길을 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와서는 그 경험을 씻어내고 평안한 가정을 지켜내는 가장으로서 변신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마지막 순간에서도 빌은 묵묵히 손을 씻는다. 그러나 목탄 창고에 쓰러져있던 세라에게는 몸을 씻을 것을 권하지 않는다. 빌의 입장에서 세라는 씻어낼 것이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애써 닦아낸 손으로 세라의 목탄가루 묻은 손을 붙잡고 그는 마침내 가족들이 있는 부엌으로 들어간다.


부엌은 환대의 개념을 장소의 관점에서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공간인데, 먹을 것을 내어준다는 특성에서 환대의 기능을 설명하기 가장 적절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빌은 종종 이 부엌에서 그 안의 다른 사람들을 향한 채로 화면에 드러난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외부 복도에서 부엌 방향을 촬영하며, 화면에는 양옆의 벽과 그 안에서 부엌 안을 향하고 앉아있는 빌의 모습만이 드러난다. 액자식 프레임 구성을 통해 카메라는 부엌 밖의 타자가 되며 빌은 선뜻 환대를 제공하지 못하고 내부만을 바라보며 딜레마를 고민하는 인물로 비춰진다.


그렇기에 빌이 세라에게 환대를 제공하는 영화의 마지막 쇼트에서, 카메라는 같은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빌은 세라의 손을 잡고 부엌 안으로 들어간다. 이제 빌은 장소 내부에서 주인과 이방인을 구분하지 않고, 외부에서 이방인의 손을 잡고 함께 장소 안으로 들어가며 세라에게 같은 주인으로서의 지위를 부여하는, 이상적 환대를 행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더 킬러> - 현대인의 불안과 자기증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