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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킬러> - 현대인의 불안과 자기증명

by joyakdo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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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핀처의 최근작 <더 킬러>의 내러티브는 꽤나 단순하다. 영화는 타겟의 저격에 실패한 이후 자신을 향한 위협에 저항하며 복수하는 킬러를 좇는다. 게다가 챕터를 구분해 자막을 제공하는 친절도 보여준다. 설명이 없어도 명확히 구분될 시퀀스들은 각각의 목표가 선명하다. 킬러는 한 단계 한 단계 전진하며 영화를 진행시킨다.



평이한 서사 방식에서 들어오는 것은 주인공 '킬러'(이름이 없다.)의 수다스러운 내레이션이다. 영화는 저격을 침착하게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의 내레이션을 지속적으로 제시한다. 대사가 거의 없고, 실제로 대화 상대가 거의 없는 가운데 킬러의 독백이 시나리오를 가득 메운다. 이를 통해 관객은 자연스럽게 킬러의 내면에 집중하게 되며 영화는 일종의 심리 드라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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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극이 지속되고 암살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관객은 킬러의 독백에서 이상한 거부감을 느끼게 된다. 지나치게 장황한 그의 대사는 고의적으로 몰입을 방해하게끔 설계되었다. 저격에 실패하고 불안한 모습을 숨기지 않으며 악착같이 도망치는 그의 모습과 결합해 관객은 그의 내레이션이 자신의 불안을 감추기 위한 주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포착한다. 이를 증명하듯 영화에서는 지속적으로 예기치 못한 상황들이 그의 내레이션을 끊으면서 제시된다.


그는 자신이 다수에 속하지 않고 소수에 속한다고 생각하지만, 평정심을 찾기 위해 자신은 결코 비범하지 않다고 되뇌인다. 그렇기에 저격이 실패로 돌아가고 그는 자신이 검거되거나 복수당할 수 있다는 불안에 더해, 자신이 정말로 비범한 인물이 아닐 수 있다는 불안에 고통스러워한다. 그렇기 때문에 킬러의 복수 또한 양가적이다. 자신의 아내를 폭행한 세력에 대한 복수인 동시에, 자신의 실력과 킬러로서의 존재에 대한 불안을 지우는 과정이다. 짓궂게 말하자면 프로젝트가 실패로 돌아가자 책임을 묻는 클라이언트들에게, 그는 손수 실력을 증명한다.


복수는 탐정 영화의 형식을 빌려 가장 아래에 있는 하수인부터 최종 클라이언트까지 단계별로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점은 나라를 옮겨가며 목적을 이뤄가는 킬러가 계속해서 신분을 바꾸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종종 입국심사나 대출 등의 공적 절차를 밟을 때 이러한 장면을 볼 수 있다. 표면적으로 수사기관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신분을 감추는 이 장면은, 킬러가 느끼는 불안이 다름아닌 이 시대의 수많은 현대인의 이름이 공유하는 불안이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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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의 복수는 클라이언트 CEO의 집에 잠입해 그에게 경고하는 것으로 끝난다. 직접적으로는 그를 죽이게 되면 수사망이 촘촘해지기 때문에 복수하지 않지만, 최종 단계의 클라이언트를 처단하지 않는 것에는 더 많은 의미가 있다. 우선 킬러가 마침내 클라이언트를 마주했을 때 CEO의 반응은 뜻밖이다. 바로 상황을 직시하고 살려달라고 빌었던 사람들과 달리, CEO는 킬러의 침입이 물질적 보상을 목표로 하는 강도질이라고 생각한다. 즉 자신이 킬러를 처리하라고 한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는 목숨이 걸린 동시에 존재와 직업을 증명해야 하는 일이었으나 클라이언트에게는 기억도 못할 만큼 사소한 일이 되어 있었다. 복수 끝에 마주한 현실 앞에서 킬러는 자신의 평범함을 직시한다. 그는 애써 비범해지기 위해서 CEO를 죽이는 시도를 감행하지 않는다. 대신 다시 오게 되면 다양한 방식으로 살해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반복되었던 자기증명이자 평범한 킬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그러나 무력한 저항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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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복수를 포기하자 그에게는 평온한 삶이 기다리고 있다. 영화는 휴양지에서 아내와 함께 휴식을 취하는 킬러의 내레이션으로 끝이 난다.


"내겐 안전하다는 느낌이 필요하다. 그건 미끄러운 경사면이다. 운명은 플라시보다. 유일한 인생 길은 지나온 길뿐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 동안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 소수에 속하는 사람이 아닐지 모른다. 어쩌면 나처럼 다수에 속할지 모르지."


<더 킬러>는 평범한 자신을 받아들이며 눈을 떨다가, 이내 감아버리는 킬러의 측면 C.U. 샷으로 끝을 맺는다. 내키지는 않겠지만 눈을 감듯 순응하는 태도를 감독은 우리들에게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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