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에서 주인공 요조가 인간으로서 실격하는 과정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자격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으로 보인다. 이 글에서는 인간의 자격과 소설 속 배경의 시대에서 인간이 되고자 나름의 투쟁을 했던, 결과적으로 필연적인 실패를 겪게 되는 요조를 이해하기 위해 인류학자 김현경 교수의 <사람, 장소, 환대>의 내용을 적극적으로 인용하려고 한다. 이 책에서 인간의 성원권 투쟁과 연기 수행, 전근대와 근대에서의 명예와 존엄의 개념에 대해 서술한 방식은 마치 <인간실격>에 대힌 직접적인 해설을 제시하는 것처럼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인간실격의 과정을 다루는 <인간실격>에서의 인간의 자격은 생물학적 '인간'의 정의와는 분리되어, 사회적 인정을 바탕으로 하는 자격 '사람'의 개념에서 찾을 수 있다. 사람은 공통의 윤리를 바탕으로 하는 공동체 안에서 타인의 인정을 통해 성원권을 가짐으로써 자격을 얻는다. 타인이 호명하면 그는 이름(자격)을 얻고, 또한 존재를 입증하기 위한 장소를 필요로 한다.
장소에 있어, 한나 아렌트는 사회를 고정된 지리 공간의 개념에서 벗어나 '현상 공간'으로 호칭한다. 사회는 물리적 공간이 아닌, 개인에게 상호주관적으로 존재하는 공간이며 상호작용을 통해 유지되는 공간이다. 다시 말해 개인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자아의 실존적 조건은 논외로 두고 타인에게 성원권을 인정받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인정투쟁은 곧 성원권투쟁이라는 주장이 제시된다.
<인간실격>으로 돌아가서, 서문을 제외하고 요조의 시점에서 서술되는 첫 번째 수기는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걸 도무지 알지 못하겠습니다.'의 문장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유명한 '참 부끄러운 생애를 보내 왔습니다.'는 수기의 내용과 서술의 감정을 압축한 일종의 서문에 해당된다고 본다.) 즉 요조는 인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인간의 자격이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헤매이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는 '제가 가진 행복의 관념과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의 관념이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저만 혼자 돌연변이인 듯한 불안감과 공포심'으로 인해 삶을 바로 지탱하지 못한다.
그러나 소설은 요조의 걱정과 불안감, 그로 인한 공포가 생겨난 원인을 설명하지 않는다. 표면적으로는 그가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의 편의나, 배고픔을 해소하기 위한 식사의 필요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 자신이 타인과 다를 수 있다는 불안에서 비롯된다. 이는 사람됨을 위한 성원권을 얻지 못할 위협으로 인한 불안이지만, 요조가 왜 문명의 편의를 이해하지 못하며, 식사의 필요를 이해하지 못하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것은 요조에게나 다른 이들에게나 일종의 질병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독자는 작품 안에서 벗어나 작가와 세계를 통해 그 병의 원인을 진단해야 한다. 시대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먼저 필요한데, <인간실격>이 1948년에 발표되었으며 작중 배경은 그로부터 이른 1910년대부터 1932년까지의 일본을 담아낸다. 전근대와 근대 사이의 지점, 근대화의 세계가 <인간실격>의 문장들의 배경이 된된다. 그리고 이러한 배경은 사람에 대한 이해와 성원권 투쟁의 관점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제시한다.
피터 버거는 현대인들이 명예를 지나간 시대에 속하는 낡은 관념으로 여기며(그는 이러한 변화가 모욕받은 당사자가 물질적 손해를 증명해야만 하는 현대 사회의 법 질서에서 확인된다고 주장한다.) 다행히 그러한 태도가 대안적으로 존엄성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고 평가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존엄은 명예와 대조적 개념이며 내면적인 인간성과 관련되어 자아 그 자체에 고유한 것이며 우리 인간은 전근대의 명예의 세계를 떠나 근대의 존엄의 세계로 옮겨왔다.
그러나 명예와 존엄은 대립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역할 자아와 영혼의 이분법은 사회 구조와 상호작용 질서를 구별하지 않는 문제점이 있다. 사회 속 사람과 성원권이 주어지는 상호작용의 문제는, 현대인의 태도에서 또한 확인할 수 있다. 현대인은 전근대의 규범을 지속적으로 지키면서도 자신의 행위에 도덕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남들에게 보여지는 공적인 자기를 자기로서 인정하지 않는다. 현대인이 규범을 지키면서 규범에 거리를 느끼고, 벌거벗은 상태로 돌아오면 비로소 편안해지는 까닭을 김현경은 사람의 영혼이 깊은 곳에서 세계와 불화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 예로 카프카의 서술이 제시되는데, <변신>에서는 인물의 옷을 입은 육신이 사라지고 내면성을 상징하는 벌레가 남는다. 외면의 모습을 탈피한 영혼이 인간적인 모습이 아니라는 점에서 존엄성이 자아 자체에 고유한다는 주장은 역설되며 사회관계로부터 철수한 자아는 사람으로서 완성되지 못함이 암시된다.
즉 <인간실격>에서 요조가 시대에서 체험하는 모순과 역설은 모두 이러한 것들이다. 규범을 지키면서 규범에 거리를 느끼고, 벌거벗은 상태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심리는 곧 카프카의 <변신>에서의 그레고르 잠자의 것이며 <인간실격>의 요조의 것이다. 마땅히 자신의 존재를 증명함으로써 성원권을 얻고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욕망은 당시의 세계와 부딪힌다. 특히나 말 그대로 인간의 자격이 무엇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근대화 시기의 세계는 더욱 그렇다. 앞서 사람은 공통된 윤리를 바탕으로 하는 공동체 안에서의 성원권을 통해 자격을 얻는다고 말했는데, 근대화 시기의 세계는 그 공통된 윤리가 과도기 상태에서 자체적으로 충돌하며 혼란이 초래되던 시대인 것이다. 이 시대는 사람의 명예와 존엄이 표면적으로 충돌하며, 동반된 문명의 발전을 통해 그 갈등은 더욱 파괴적이고 잔인한 형태로 드러난다. 다자이 오사무가 살아가며 <인간실격>을 집필한 1900년대 초중반의 일본, 일제의 배경은 더욱 그렇다. 사회적 성원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곧 상대방을 사람으로서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인 것인데 일본을 비롯한 근대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국민을 제외한 타자를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학살했다. 극단적 형식으로 드러난 제국주의의 침략에서 벗어나더라도, 일상에서의 사회적 성원권 부정 역시 만연했다. 이방인 또는 사회적 약자에게 역으로 '타자와 다름'의 낙인을 부여하고 성원권을 부정하는 것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요조는 그런 세계로부터 혼란을 얻는다. 소설의 도입부를 다시 살펴보면, 기차와 육교 따위의 기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가 근대 문명의 편의가 인간의 삶에 직접적으로 어떤 도움이 되는지 의문을 가지는 것으로 직결된다. 근대 문명의 상징인 기차는 열강의 제국주의 정책을 지지하기 위해 사용될 바에는 차라리 어린 요조의 믿음대로 재미를 위해 만들어지고 사용되는 편이 나을 뻔했던 것이다. 배고픔을 모르는 것은 인간의 기본 욕구인 식욕의 부재로 이해되면서 동시에 '일해서 먹고살아야 한다는 말'에 대한 부정으로 받아들여진다. 당시의 사람들을 수용하는 사회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요조는 그 시대의 구성원이 되지 못할 위기에 처한다.
결국 요조는 첫 번째 수기에 해당하는 유년기부터 성원권을 얻기 위한 해결책을 찾는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게 광대 짓이었습니다'의 문장은 '연기' 행위를 제시한다. 요조는 남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탈을 쓰고, 타인의 기대에 맞춰 행동하며 살아간다. 흥미로운 점은 유년기에는 이러한 연기가 단순히 남들과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기대 밖의 웃긴 행동을 하는 광대 짓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유년기 요조의 광대 짓은 아이러니하게도 명예와 존엄, 인간과 삶에 대한 논의에서 아예 벗어남으로써 성원권을 얻는다. 그게 곧 작가가 생각한 실제적인 근대의 논리였기 때문이다.
두 번째 수기와 세 번째 수기에서는 그 연기가 광대 짓보다는 이성 관계에서의 역할 수행 측면에서 강조된다. 요조에게 여성들이 매력을 느끼고 인기를 얻게 되는 것은, 그가 타자와의 상호관계에서 웃음을 주며 추구되는 쾌락을 만족시켜주는 동시에 내면으로는 인간의 정의와 요구되는 조건으로 인해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것이 본능적으로 이성에게 감각되기 때문일 것이다. 여성들은 그에게 추종적인 동경심과 보살펴주고자 하는 모성애의 양가적인 감정을 지니게 되며 그를 사랑하게 된다. 그는 이러한 점을 불편해하면서도 연기를 들키지 않기 위해,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쾌락을 충족시키기 위해 등의 다양한 이유로 여자를 멀리하지 않고 이용한다.
근대 배경과 요조의 문제를 떠나서, 인격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며 상호작용을 통해 끊임없이 현상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은 곧 연기를 수행하는 연기자라는 주장도 있다. 어빙 고프먼은 로버트 파크를 인용하며 person이라는 단어가 라틴어 '페르소나'에서 왔다는 사실이 역사적 우연이 아닐 것이라 지적한다. 그는 '연기수행' 개념을 제시하며 사회적 상호작용이 자신의 자아를 보여주고 사람으로서 인정받기 위한 연극이라고 주장한다. 다만 로버트 파크와 고프먼은 육체와 영혼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이 가면이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품고 있는 관념을 대표하는 한, 이 가면은 우리의 더 진실한 자아, 우리가 되고자 하는 자아"라고 말한다. 안타깝게도 <인간실격> 속 요조는 사람에 대한 정의가 흔들리는 시대에 존재함으로써 자신이 되고자 하는 진실한 자아를 찾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의 가면은 그 자신보다 사회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광대 짓을 자신이 생각해냈다고 말함에도 불구하고 '가면을 썼다'기보다는 '가면이 씌워졌다'는 표현이 더욱 적절할 것으로 보인다. 진실되지 못한 자아와 부도덕한 사회의 성원권을 향한 투쟁은 자기파괴로 이어진다.
쉽게 말해, 요조가 수차례 자살 시도를 하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과정은 삶의 충동과 죽음 충동의 결합의 다른 방식에서의 증명이라고 생각된다. 개인에게 성원권을 부여하는 사회 공동체의 보편적 윤리가 잘못된다면, 사회가 요구하는 가면을 쓰고 연기수행을 해내는 것보다는 사회 밖으로 떠남으로써(죽음) 평안한 사람됨을 추구하는 것이 옳다는 충동이다. 그는 소설 중반부에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인정투쟁에 지친 여인과 함께 동반자살을 기도한다. 여인은 죽고, 요조는 살아남는 것이 요조에게 있어서는 불평등한 결과로 여겨졌을 것만 같다. 죽음을 통해 사회의 논리 바깥으로 떠나려 했던 요조에게는 넙치에 의해 집 밖으로 외출이 제한되는, 다시 말해 사회에 공간적으로 구속되는 형벌이 내려진다.
그 이후에도 간신히 연기수행을 하면서 사회를 버티던 요조는 새로 맞은 부인 요시코에게 일어난 사건을 통해 완전히 몰락한다. 요시코는 요조의 서술에 의하면 '신뢰'라는 말과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으로, 사람을 의심할 줄 모르는 순수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요조와 그의 교우(라고 당시 시대에서는 표현되던, 서로 경멸하지만 교제하는 관계) 호리키가 옥상에서 '죄'의 반대말이 '선'인지, '법률'인지, '꿀'인지 따위의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요시코는 1층 요조의 방에서 강간당한다.
개인적으로는 요조 개인의 가치관과 인정투쟁이 완전히 실패하는 것이 요조의 순수한 아내가 강간당하는 것을 목격하는 방식으로 설정되는 이 대목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그의 말마따나 ' 말로도 모자랄 만큼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한 거대한 크기로 들이닥친 슬픔'은 조금 더 그 자신의 것이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아무튼 이 사건은 요조가 사회적 가면과 별개로 추구하는 인간의 순수함이, 그대로 존중받거나 타자의 신뢰로 돌아오지 않고 모욕당하는 시대의 윤리에 대한 서술이라고 할 수 있다.
요조는 그 사건 이후 완전히 몰락한다. 흰머리가 나기 시작했으며, 술과 약물에 중독되기 시작한다. 마침내 인간으로서 실격되었다고 스스로 서술하며, 자신의 투쟁이 완전한 실패로 돌아갔음을 인정한다. 거기에 더해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은, 그가 지금까지 안간힘을 써서 닮고자 했던 인간상의 소멸을 알리는 사건으로 요조의 허무함을 증폭시키는 원인이 된다.
<인간실격>은 요조의 최후를 서술하지 않는다. 요조의 수기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소설은 형식적으로 자기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적을 수 없을 뿐더러 '그저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저는 올해 스물일곱이 됩니다. 흰머리가 부쩍 늘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흔이 넘은 나이로 봅니다.'의 문장으로 수기를 마무리함으로써 세계와 인간의 시간성에 대해 여지를 남겨둔다. 작품은 화자(이름을 밝히지 않기 때문에 작가 자신을 의도한 듯하다.)가 요조의 수기에 대한 감상을 적은 서문과 세 편의 수기, 그리고 다시 화자가 수기를 읽게 된 과정을 적은 후기로 나뉘어져 있다. 작가가 투영된 화자는 역설적으로 요조를 미치광이라 칭하며 부정적으로 서술한다. 그러나 본편과 화자의 서술 사이의 경계에 서 있는, 다시 말해 요조를 기억하는 유일한 인물인 바의 마담은 요조를 '순수하고 재치 있고, 술을 마셨어도 하느님처럼 착한 친구였'다고 칭한다. 요조의 삶이 다자이 오사무의 삶과 매우 닮아있다는 것을 생각해보았을 때, 이와 같이 작품을 마무리하는 방식은 처절하게 슬프다. 평생 동안의 치열한 인정투쟁과 괴로움, 부조리한 시대 가운데서 사람으로서 살아보고자 했던 눈물겨운 사투에 스스로 조소를 보내며 비판하지만, 소설 속 인물은 그 투쟁을 이해하며 요조를, 그리고 작가 자신을 위로한다. 자신의 소설 속 인물의 입을 빌려 스스로를 위로하고자 했던, 실패를 애써 인정하고자 했던 다자이 오사무는 <인간실격>을 발표한 그 해 스스로 삶을 마감한다.
차마 동의하지 못할 윤리의 사회 속에서 정답은 무엇일까,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인간실격>을 통해 나는 다시 한 번 글쓰기의 힘을 발견한다. 여기서 말하는 글쓰기란 객관적으로 역사 사실을 기록하는 글쓰기와 주관적 영역으로 서술해나가는 글쓰기, 이를테면 수필과 소설, 나아가 영화까지도 포함한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은 요조의 삶을 기록하는 글쓰기를 빙자해 작가 자신과 그 당시의 세계를 기록하며 자신의 사고를 서술한다.
서문에서 그러한 작품의 서술 구조가 강조되며 세계 속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인간투쟁은 시간적으로 어떤 성격을 지니는지에 대해 고민한 측면이 확인된다. 각각의 수기에 해당되는 요조의 사진 세 장이 그것이다. 요조의 수기에서는 사진을 촬영하는 순간에 대한 묘사를 확인할 수 없다. 이는 카메라 앞에서 피사체가 되었을 때의 요조의 심리를 작성하는 순간 작가가 고심해 설계한 서사 구조의 의미가 퇴색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요조는 그가 평생 해온 것보다 훨씬 연기수행을 잘 해내야 한다는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사진 카메라는 순간을 넘기면 되는 연극과는 다르게 시간을 정지한 채로 들여다볼 수 있는 기록 장치다. 기록에 대한 부담 때문일까, 카메라 앞에서 그는 연기에 실패한다. (어쩌면 나름대로 연기를 잘하며 남들을 속였다고 주장하는 수기에서의 서술이 틀린 것일 수도 있다.) 서문의 화자는 요조의 사진을 꺼림칙하고 섬뜩하며, 희한하고 가식적이고, 기괴하다고까지 표현한다. 그는 요조가 억지로 웃고 있다는 점을 파악하며 불편함을 느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한 그의 표정 연기는 실패함으로써 성공한다. 부정한 시대에 동화되어 미소를 지닌 인물로 기록되지 않는 것은 그가 사진이 촬영된 시대에 불편함을 느낀 인물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로 기능한다. 안타깝게 10년이 지난 시점에서의 세계는 화자가 요조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아직 그를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언젠가는 오게 될, 어쩌면 지금도 어딘가에 몇몇 사람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존재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성원권을 부여하며, 요조에게 인간의 자격을 부여할 것이다. 생 이후에도 여전히 계속되는 힘겨운 투쟁에, 나는 글을 씀으로써 힘을 보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