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영화 <사람이 되어라>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의해 기획 및 제작된 옴니버스 애니메이션 <별별 이야기>의 한편으로, 박재동이 연출했다. 작품은 '먼저 사람이 되어라'라는 지시문이 교문에 적혀있는 학교를 배경으로 수인으로 그려지는 학생들이 대학에 가서 사람이 되기 위해 공부한다는 설정을 제시한다. 그러나 장수풍뎅이를 돌보며 생태중심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원철은 자연에 동화되며 사람이 되지만, 선생을 비롯한 사회는 이를 부정한다. 그들은 원철이 대학에 가서 사람이 되어야 한다며 지금 당장의 사람됨을 포기할 것을 종용한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제작된 이 영화는 말 그대로 인권을 키워드로 하며 그것은 사람됨의 권리, 다시 말해 성원권이 다. 극중 재현되는 현실에서의 사회는 인권을 대학에 가서 취득되는 것으로 규정한다. 대학에 가지 못한 사람은 원철의 아버지와 같이 진정한 사람이 되지 못하며 그저 사람의 탈을 쓴 채로 정체를 숨기고 살아간다.
근대화 이후 세계는 인권이라는 개념을 발견한 것처럼 보인다. 나는 (좀 극단적이고 무책임하게 말하건대) 인류가 근대 문명의 발전을, 무수한 사람을 순식간에 살해할 수 있는 기술로의 전환을 목격하며 인권을 말하지 않고서는 정말이지 큰 일이 날 수 있겠다는 위기를 감각하고 이러한 변화를 취했다고 본다. 성원권은 상호작용의 현상으로 존재하는 사회의 인정을 통해 부여되는데, 이 성원권의 부여가 보편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곧 역설적으로 누구나 폭력을 받으며 죽임을 당할 수 있음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근대 이후 생물학적 인간이 보편적으로 사람으로의 존엄을 인정받고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이 언급된다. 신분제는 점차 사라지며 조선에서도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신분제가 형식적으로는 철폐되었다. 그러나 이는 곧 계급사회로의 전환이 된다. 일단 성원권이 출생에 의해 정해지는 것보다는 나은 것으로 보이지만, 새로운 논리는 지금껏 성원권을 부여하는 입장에 서 있던 사람들의 이익보호를 위해 형성된다. <사람이 되어라>에서 언급되는 대학 역시 그렇다. 이제는 기술노동직이 비슷한 연차의 사무직보다 더 많은 돈을 버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사회는 암묵적으로 노동자 계급을 하위계급으로 분류한다. 사람들은 노동자에 대한 수많은 멸칭을 사무직에게는 사용하지 않는다.
대학에 가지 못해 사람이 되지 못했다고 말하는 아버지는 원철에게 사람되기를 강요한다. 교사는 복장검사를 실시하며 '언제 사람 될래'라고 원철을 혼낸다. 비관하던 원철은 학교를 가던 중 우연히 찾게 된 숲속에서 자신이 원하던 삶을 발견하며 사람이 된다. 여기서 숲속으로 돌아간 것은 생태중심주의의 방식으로, 모든 생명체를 동일하고 평등한 선상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사람이다. 사람이 되기 위한 일련의 상호작용 과정이 필요치 않다. 자연의 논리를 채택하며 원철은 스스로가 사람임을 자각한다.
그러나 이 사회의 성원권은 '대학에 가는 행위'를 통해 부여된다.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거부한 채 독단적으로 사람이 되는 것은 인정받지 못한다. 역시 성원권은 타인의 인정을 통해 부여되기 때문이다. 사회질서를 거부한 채 숲속에서 살아가는 결말도 가능했겠으나 원철은 대부분의 사람들과 같은 이유로 사회로 복귀한다. 아버지의 존재 때문이다. 과거 사람이 되지 못했기에 아들이 자신과 같은 처지가 되지 않기를, 또는 자신의 한을 풀어주길 바라는 아버지는 원철에게 사회로 돌아오게끔 하는 강한 인력이 된다.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는 끊을 수 없는 것이 되어 성원권을 박탈당한 인간도 사회에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원철이 스스로 사회로 복귀하기에 앞서 교사가 원철에 대응하는 방식은 흥미롭다. 다시 생각해보면 앞서 언급한 교사의 '언제 사람 될래'와 같은 발언은 모순적이다. 대학에 가는 것이 사람됨의 자격이라면 원철이 사람이 될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있기 때문이다. 즉 교사와 사회의 논리에 의하면 원철은 그 시점에서 사람이 아닐 수밖에 없으며 교사의 혼내기는 결국 당장 사람이 될 수 없는 처지를 받아들이게끔 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원철이 스스로 사람이 되어 나타났을 때의 반응 또한 그렇다. 교사는 원철을 폭행하며 폭행당하는 순간 원철은 일시적으로 고릴라의 모습으로 돌아오나, 이내 다시 사람으로 돌아가 학교를 탈출한다. 이 장면이 상징하는 학교-체벌은 결국 이데올로기에 복종해야 하는 학생, 사람으로서의 자격을 부여받지 못하는 학생이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도록 기능한다. 학교 밖에서도 체벌은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지배관계를 옹호하는 데 사용된다. 체벌을 옹호하는 이들은 몽둥이에 학습 기능이 있다고 말하지만, 원철이 고릴라로 돌아간 것이 잠깐인 것처럼 이는 시스템의 논리를 주입시키는 기능밖에 하지 못한다. 그마저도 원철과 같이 그 시스템에 문제가 있음을 파악한 인물에게는 작동하지 못한다.
작품은 공공기관이 공익을 목적으로 제작한 것치고는 꽤나 씁쓸하게 끝이 난다. 흔한 교육용 영상처럼 욕망 실현에 성공한 주인공이 행복을 외치며 끝나는 방식이 아니라는 얘기다. 거친 그림체로 나타나는 수인 캐릭터들과 배경에서는 그로테스크가 느껴지기도 한다. 사람됨에 실패한 아버지의 눈물은 아들의 눈물로 이어진다. 슬픔은 사람이 되지 못함이 아닌, 사람의 자격을 부여해주지 않는 사회를 벗어나지 못함에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