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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비행 - 구름 너머로 날아가 발견한

by joyakdoll

하늘에 다다르고자 했던


인간은 종의 신체적 한계로 인해 정복하지 못한 대상을 문명의 힘을 통해 정복하는 것을 꿈꿔왔다. 자연 공간의 세계는 그 대표적인 예시가 된다. 바다에 들어가 어두운 심해를 탐사하거나, 우주로 나아가 달에 깃발을 꽂거나 하는 장면들은 인류 문명의 발전을 상징하는 역사의 순간들로 정의되었다.


비행, 그리고 이 글에서 다룰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야간 비행의 경우도 그러하다. 인간은 오랜 시간 동안 하늘에 다가가는 것을 꿈꿨다. 당장 하늘을 나는 꿈을 떠올리면 이카로스가 떠오른다. 미궁에 갇힌 이카로스는 아버지 다이달로스와 함께 새들의 깃털로 만든 날개를 밀랍으로 몸에 붙여 날아오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단순히 비행의 쾌락과 그 상황에서 느껴지는 해방감으로 인해 계속해서 하늘 높이 올라가다 태양열에 밀랍이 녹아 추락한다.


이카로스의 인류 최초의 비행 이전에는 바벨탑이 있었다. 구약성경의 창세기에서 인간은 신이 있는 하늘에 닿고자 탑을 쌓아올렸다. 야훼는 문명의 발전을 통해 신에게 도전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심을 경계하여, 인간이 쓰는 말을 뒤섞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함으로써 탑의 공사가 중단되게끔 했다.


이카로스 신화와 성경의 바벨탑 이야기는 모두 표면적으로 신에게 도전하는 인류에 대한 징벌의 형태로서 제시된다. 신본주의의 예로 이 서사들을 이해했을 때는 인본주의를 지향하기 위해 탈피해야 하는 구시대의 논리가 되겠으나, 신을 자연으로 치환해 이해하게 된다면 생태주의의 관점에서 인본주의가 신본주의와 대립하지 않는 것처럼 세계 안에서 인간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에 대한 철학이 담겨있음을 이야기할 수 있다.



생사가 달린 인류의 문제


<어린왕자>를 쓴 프랑스의 작가 생택쥐페리의 소설 <야간비행>에서는 이카로스와 바벨탑의 그러한 철학을 답습한다. 소설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항공 우편국을 배경으로 단편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 소설 속 거의 유일한 지상의 공간인 부에노스아이레스와 그 중에서도 항공 우편국은 직접적으로 당시의 세계를 상징한다. 그리고 세계가 나아가는 방향을 결정하는 지도자는 항공 우편국의 국장 리비에르에 투영된다.


리비에르는 원칙적인 인물로 항공 우편국의 성과에 집착하는 성격을 보인다. 야간비행을 '생사가 달린 문제'로 지칭하며, 밤에 비행을 하지 못한다면 철도나 선박보다 빠른 것이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다른 기술보다 뒤쳐지는 것을 죽음으로 호명하는 생사의 비유는 이후 소설에서 전개되는 비행사의 죽음과 비교된다. 리비에르에게 밤하늘은 일종의 정복의 대상으로서 보여지는 것이다. 리비에르는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야간비행을 시작할 수 있도록 관료들을 설득했다.


그러나 안전의 문제가 충분히 의논되지 않은 채 강행된 야간비행의 기술적 문제는 곧 개인의 희생으로 나타난다. 직접적으로 이 소설의 서사에서 희생되는 인물은 파비앵이다. 그는 파타고니아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오는 야간비행 중 폭풍우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돌파구를 찾지 못하면서 결국 실종이라는 이름 하에 죽음을 맞이한 것처럼 보인다. 파비앵이 죽음으로 수렴하는 과정 속에 그의 메시지가 몇 차례 있기도 했다. 그러나 그 메시지는 교신국 몇 개를 거쳐서야 불분명하게 전달되었다. 이 부분은 파비앵의 죽음을 저지할 수 있는 기회가 분명히 있었다는 사실과, 그 기회를 기술에 대한 안전대책이 기술 자체와 같은 수준으로 다뤄지지 못하는 모습에 대한 비판이 섞여있다.


파비앵의 죽음은 직접적으로 제시되는 희생이지만, 소설 속 다른 인물들에게서도 희생의 모습이 나타난다. 밤하늘의 정복을 위해서는 그 정복이 합당한 일이며 생사가 걸린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는 리비에르도 자신을 소모하는 희생을 하고 있는 것이며, 그에게 동화되는 로비노 역시 항공 우편국의 임무 수행을 위해 자신의 고통을 위로받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원칙을 위해서 본보기가 필요하다는 리비에르의 신념으로 인해 권고사직당하는 로블레도, 로비노가 불필요하게 접근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게 될 펠르랭도 모두 밤하늘의 정복을 위해 희생당하는 이름들이다.


소설 속의 직접적 과제인 밤하늘의 정복은 현 세계 속 인류의 진보와 연결된다. 진보, 진화, 발전이라는 이름의 정의를 내리는 문제는 이토록 오랜 시간 동안 토론의 대상이 되었다. 리비에르에 투영되는, 기술의 발전을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하다는 입장에서 밤하늘은 불확실성으로 인해 두려움을 제공하는 공포의 대상이다. 이는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지배 가능한 위치에 두고자 하는 권력욕에서 비롯된다. 권력을 쥔 인간은 모든 불확실성을 제거함으로써 자신들의 권력을 안전하고 확실한 것으로 남기기 위해 애쓴다.



제국주의에 반발하는 언어


그러나 이러한 정복욕을 바탕으로 한 문명의 발전과정 속에 이성이 배제된 결과는 인류에게 큰 부작용을 가져다준다. <야간비행>에서 강력히 비판하는 그 부작용은 제국주의다. 1차 세계대전 이후, 2차 세계대전 이전 출판된 이 작품은 직접적인 표현을 통해 야간비행에 대한 집착을 곧 제국주의의 이념으로 변환시킨다. 작가는 주로 리비에르 시점에서 소설을 전개할 때, '전투로 함락시킨 도시', '우리는 전우다' 등의 표현을 사용하며 군인의 문법으로 문장을 작성해간다. 정복의 야욕을 숨기지 않으며 그를 위해 원칙적으로 움직이는 리비에르는, 파비앵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항공 우편국을 정상적으로 작동시키며 끝끝내 자신을 묵직한 승리를 거머쥔 인물로 표현한다.


자연에 대한 정복욕이 곧 제국주의의 사상과 동일한 배경을 공유한다는 지적은 다시 바벨탑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확인할 수 있다. 바벨탑 이야기에서 탑을 쌓아올린 사람들은 애초에 같은 언어를 공유하는 사람들이었으며, 야훼는 그 사람들의 언어를 전부 다르게 함으로써 공사가 진행되지 못하게 막았다. 여기서 다시 이 이야기를 단순히 신에 대한 도전이 아닌, 제국주의의 문제에 대입해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 관점에서 바벨탑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인류가 하늘에 다다르는 거대한 형태의 도시 건설을 통해 권력을 쟁취하고자 하는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를 저지할 수많은 다른 방법이 있음에도 언어를 다르게 바꾸는 야훼의 해결책은 세계를 단일한 정치-문화의 언어로 통치하고자 하는 제국주의에 대한 경계의 비판으로 제시된다. 실제로 바벨탑 이야기는 바빌론제국의 포로가 된 유대인들이 제국주의에 반하는 성격을 그들의 마르둑 신전에 대입해 창작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지배적이다.



밤하늘에서 별을 발견하는 일


다시 <야간비행>으로 돌아가, 이 소설은 단순히 자연에 대한 정복욕과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보다 더 숭고하며 아름다운 가치를 찾는다. 리비에르의 것과 상반되는 그 가치는 파비앵의 눈을 통해 제시된다. 앞서 말했듯 파비앵은 밤하늘을 정복하는 일에 직접적으로 희생되는 인물이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 그는 밤하늘을 정복의 대상이 아닌, 자연의 온전한 아름다움과 황홀함을 체험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 바라보게 된다. 조명탄이 없는 상황 속 별을 보고 길을 찾기 위해 더 높이 올라간 파비앵은 그곳에서 야간비행의 체험이 가져다주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목격한다.


앞서 군인의 문법으로 리비에르의 문장을 작성함으로써 제국주의를 비판했듯, 여기서도 작가는 문체를 달리 함으로써 자신의 주제의식을 공고히 한다. 생택쥐페리는 구름 위로 올라가 밤하늘을 떠다니는 파비앵의 상황을 자연을 수식하는 시적인 표현들을 통해 형상화한다. 파비앵은 처음에는 자신을 정복자와 같다고 취급하지만, 곧이어 평범하고 작은 마을의 풍경을 관조하며 '이를 정복하려는 행동은 단념해야 했다'고 생각하며 정복자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부정한다.


[지상에는 눈부신 신호들이 가득했다. 바다를 향해 등대를 밝히듯 집집마다 거대한 밤을 향해 별을 밝히고 있었다. 인간의 삶을 감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빛을 발했다. 파비앵은 이 밤에 접어드는 것이 마치 항구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처럼 느릿느릿하고 아름다워서 탄복했다.]


[농부들은 등불의 빛이 보잘것없는 식탁만을 비추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빛의 부름은 마치 무인도에 갇힌 이들이 바다를 향해 흔드는 절망적인 빛줄기처럼 팔십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까지도 감동을 안겨 주곤 하는 것이다.]


위와 같은 서술은 파비앵이 밤하늘에서 바라보는 세계를 자연의 언어를 빌려 묘사함으로써 생태주의의 주제의식을 뒷받침하며 독자에게 세계에서 발견할 수 있는 황홀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이러한 표현은 파비앵이 폭풍우를 피해 구름 너머로 날아올라 갔을 때 정점을 찍는다. 파비앵은 폭풍우가 공포로 작용하는 인간의 세계를 벗어나 구름 위로 날아오름으로써 일종의 초월적 존재가 된다. 그는 이제 자신을 희생의 길로 내몬 당시 인류의 제국주의의 관점에서 완전히 벗어났기 때문이다.


[발아래 놓인 구름은 달에서 쏟아지는 눈발을 반사하고 있었다. 좌우의 구름들도 탑처럼 놓게 쌓여 있었다. 구름들은 반짝이는 이 우윳빛 하늘 속을 오갔다. 파비앵은 뒤로 돌았다. 통신기사가 활짝 미소 짓고 있었다.


"훨씬 낫네요!"]


이러한 접근은 소설 속에서 파비앵이 밤하늘에서 별을 찾는 일에 대입된다. 다시 말해, 밤하늘이라는 자연의 불확실성에서 어두움을 걷어내고 별을 발견함으로써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이로써 그는 암흑과도 같은 밤하늘의 어두운 품에서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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