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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캄JoyCalm Mar 31. 2024

감각의 문,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유'에 이르는 길

마음챙김: 생활의 속박에서 벗어나 순간순간 자유를 만나는 방법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형이상학, 982b24-28>에서 '순수하게 앎을 추구하는 학문'을 '자유로운 학문'이라고 부른다. 이때 '자유'를 '생활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신을 위해 살아나는 것'이라고 정의하며, '노예 상태' '자유'와 대비하였다. '노예 상태'는 다른 선택지가 없는 상태에서  생활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위해 노동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선택지 없이 수행하는 노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실천적 활동'과도 관련된다. '실천적 활동'이란 몸을 지닌 인간이 좋은 생을 위해 행하는 정치나 전쟁과 같은 활동을  말하며, 이 활동은 자신을 위한 행위가 아닌 다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종사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비해 신과 같이 순수하게 지혜를 향하는 활동을 '직관지' 또는 '지혜의 활동'이라고 부르는데, 이 활동은 본인 혼자서 활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족적이며,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활동으로써 인간에게 가장 행복한 생활일 수 있음을 말한다.


많은 현대인들은 특별한 선택지 없이 자기 생활의 '필요'를 위해 다른 사람을 위해 노동을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것도 '노예의 상태'라고 할 수 있을까?  선택지 없이 생활의 '필요'를 위해 노동하는 사람은 불행한 삶을 사는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노예 상태'를 21세기로 소환하면, 선택지 없이 다른 사람을 위해 '실천적 활동'을 수행하는 지금 시대의 사람들을 '현대판 노예'로 명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판 노예'들은 행복하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오늘의 삶'이 선택지 없이 다른 사람을 위해 노동하는 삶이더라도, '내일의 삶'은 그렇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선택지 없는 것을 '선택'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도 기억하고 싶다. 중요한 것은 선택지가 있고 없고 가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향한 '지혜의 활동'을 하고 있느냐일 것이다. 선택지 없이 다른 이들을 위해 노동하고 있더라도,  생활의 속박에서 벗어나 나 자신을 위한 '지혜의 활동'을 기억하고 수행한다면 '순수한 앎'에서 우러나는 '자유'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생활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위해 노동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 놓였다고 하더라고, 혹은 일상이 우리를 속박하고 있더라도, 어떻게 우리는 '순수한 앎'을 추구하고 '자유'를 맛볼 수 있을까? 나는 그 방법으로 '감각의 문을 깨우라'라고 제안하고 싶다. 퇴근길에 만나는 꽃 한 송이에 주의를 기울이며 가만히 바라보는 것, 사각거리는 꽃나무의 흔들림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는 것을 통해 우리는 그 '자유'로 들어갈 수 있다. 가녀린 꽃잎을 조심스럽게 만져보는 것은 생활의 속박에서 잠시 벗어나는 행위이며, 한 송이의 꽃 앞에서 깊이 숨을 마시며 꽃 내음이 콧골로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2-3초의 시간이야말로 '순수한 앎'이 열리는 '자유'의 시간이 되곤 한다.


삶이 피곤할 때, 퇴근길에 한 송이 꽃을 만나거든 가만히 서서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것의 향기가 콧골을 타고 들어오도록 깊이 숨 쉬며 3초만 기다리자. 그때 꽃 내음을 기다리고 있는 나 자신으로 주의를 돌리면 바로 '순수한 앎'이 일깨워진다. 종종걸음 치며 출근하는 길에 시원한 바람 얼굴을 스치면, 3초만 서서 바람 닿는 그 감촉에 주의를 기울여보자. 감촉을 느끼려 가만히 기다리는 나 자신으로 주의를 돌려 보자. 그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그 '순수한 앎'이 나를 자유롭게 할 테니. 


아리스토텔레스는 '순수한 앎'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감각에서 혹은 생활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인간의 관심사에서 출발하면서도, 그것을 서서히 제거하여 앎의 순수성을 높이라고 제안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앞에서 언급한 꽃 한 송이를 향해 감각의 문을 여는 것. 이것이 앎의 순수성을 높이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선택지 없는 일상을 살아내고 있더라도, 그래서 몹시 서글프더라도, 봄 햇살에 피어나는 벚꽃 한송이에 코를 갖다 대고 향기가 전해오기를 가만히 기다려보자. 그때 향기를 기다라고 있는 고요한 의식으로 주의를 돌려  '나'라는 존재의식을 느껴보자.  감각에서 출발하지만 도착하는 곳은 '순수한 앎'의 의식일 것이다. '순수한 앎'에 가 닿는 이러한 과정이 곧 나 자신을 향한 '지혜의 활동'이고, 생활의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를 우려내는 여정인 것이다.  나를 향한 '지혜의 활동'은 멀리 있지 않다. 선택지 없이 다른 이들을 위해서 노동하지 않을 수없는 상태에서도 '지혜의 활동'은 수행할 수 있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든, 내가 하는 행위가 무엇이든, 마음의 자유는 내가 찾는 것이다. 






<참고, 세계철학사 1, 이토 구니타케 외, 이신철 역, 250-251 | 도서출판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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