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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캄JoyCalm May 05. 2024

'판단하지 않음'과 고대의 아타락시아

마음챙김 명상의 'Non-judging'과 고대 회의론자의 '판단유보'

오늘은 마음챙김 명상에서 비판단 Non-judging과 고대 회의론자의 '판단유보를 통한 아타락시아'에 대한 비교를 해보고자 한다.


현대화된 마음챙김에 대한 다양한 정의가 있는데 존 카밧진 선생님의 정의가 가장 널리 차용된다.

그는 마음챙김을 "지금 이 순간 펼쳐지는 경험에 비판단적이고 의도적으로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일어나는 알아차림"이라고 정의한다.

An operational working definition of mindfulness is: the awareness that emerges through paying attention on purpose, in the pres ent moment, and nonjudgmentally to the unfolding of experience moment by moment (Kabat-Zinn, J. (2003). Mindfulness-based interventions in context: past, present, and future.)


이 정의에서 '비판단적으로 nonjudgmentally라는 부분이'있다  현대 마음챙김 명상을 일반 대중에게 알린 존카밧진 선생께서 사용하신 마음챙김에 대한 정의에 이 부분이 포함되어 있어 마음챙김 명상에 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주 듣는 표현이다.


여기서 말하는 '비판단'이란 무엇일까? 무엇을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일까? 판단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행위하란 말인가라는 의구심이 든다. 실제로 명상을 안내하는 장에서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판단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생활하느냐'라고 반문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나에게 욕을 해도, 프로젝트가 고꾸라져도 판단하지 말라는 것인가? 아이가 스마트폰에 노예가 되어가도 그냥 두라는 것인가??  분명한 것은 '그렇지 않다!'이다.  

출처:pixabay | Tumisu

마음챙김 명상에서 '비판단'이라고 하는 것은 생활하는데 필요한 사리분별을 하지 말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에게 해코지하는 사람조차도 판단하지 않고 그냥 당하고 있으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마음챙김 명상에서 '비판단 non-judging'이라고 하는 것은 체험 속에 머물면서 편견 없는 공평한 자세를 취해보라는 것이다. 선입견 없고 열린 태도를 기르기 위해 체험하는 안팎 경험에서 늘 좋고/나쁨, 옳고/그름 둥과 같은 판단을 하고 그에 따라 반응이 일어나는 사실을 먼저 인식해 보라는 부드러운 안내이다. 즉 사고를 멈추고 판단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입장이 아닌, 끊임없이 거듭해서 일어나고 있는 판단을 한 발 물러서서 지켜보라는 의미에 가깝다. 그러한 입장을 취할 때 스스로가 얼마나 자주 판단하며 즉각적이고 자동적으로 반응하고 있었는지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게 된다. 그 알아차림 속에서 자연스럽게 애쓰지 않는 판단보류가 일어나게 된다. 


자신이 판단하고 평가하고 있음을 인식하되 그것을 억누르려고 해서는 안된다. 다만, 자동적인 판단평가에 대한 2차 3차  덧대어지는 판단으로 이어지는 것도 중단해 보는 것이다. 단지 자신이 어떤 것에 대해 끊임없이 판단평가 하는 내적인 습관을 더 깊이 통찰하고 도움 되지 않는 습관은 놓으려는 노력을 해보는 것이다.



이러한 '판단을 보류함'에 대해 고대로마 철학에서도 다루어졌는데, 마음챙김 명상에서의 판단보류와는 좀 다른 것 같다. 헬레니즘 시대에 회의론자(피론주의)들은 내적인 평온(아타락시아)에 이르기 위해 '판단 유보'를 주장했다. 어떤 독단적 견해에 대한 옳고 그름에 대해 판단하지 않고, 반대적인 견해로 맞받아치며 그 견해에 대해 수용도 거부도 하지 않는 것이다. 사고 중단으로 상대의 견해애 판단하지 않음으로 인해 마음의 평안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회의론자의 '판단유보'와 마음챙김 명상에서의 '비판단 non-judging'의 차이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다. 피론주의자는 어떤 개념에 대한 독단적 견해에 대해서만 판단을 유보하고 일상에서 필요한 행위를 선택할 때는 판단하고 분별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판단유보'는 철학에서 만의 판단유보이고 일상생활에서는 그렇지 않은 일관되지 않음을 포함하고 있다.  이에 비해 마음챙김 명상에서의 비판단 non-judging은 내적인 사고과정에 대한 판단을 보류하거나 판단이 일어남을 지켜봄으로써 내적 동요를 알아차린다. 그 과정에서 자신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을 계발한다. 현상에 대한 자신의 체험에 대해 판단이나 평가가 일어나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되 2차 3차 연이은 판단으로 더 나아가지 않도록 마음을 단속한다. 그러므로 인해 일상에서는 더욱 선명한 판단분별을 수행하고 자동적이면서도 건강하지 못한 판단적 습관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을 추구한다.  


비판단에 대한 결과에서도 차이가 있어 보인다. 마음챙김 명상에서 비판단적 태도를 취함으로 경험에 대한 개방성과 알아차림의 의식을 개발해 일상을 보다 명징한 상태에서 원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필요한 것을 취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놓아버리도록 하는 마음의 힘을 기르는 것에 비해,  고대 철학 회의론자가 주장한 '판단유보'를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내적 평온, 마음의 동요 없음' 상태로 여겨진다. 오늘까지 공부한 핣기식 짧은 철학적 소견으로 그렇게 보인다.  


과학적으로 연구되었다는 마음챙김 명상은 동양의 명상철학이 서구로 넘어가 서구의 언어로 재 번역되고 과학화되었다. 우리는 서구에서 그들의 언어로 재번역된 명상에 대한 과학적 결과를 역수입해서 본다. 동양의 명상언어가 서구인들로부터 재번역되는 과정에서 서구의 철학사조가 담긴 언어로 재 탄생한다. 그래서 때로는 동양 명상철학이 전하고자 하는 것을 담아내지 못할 때도 있는 듯하다. 앞으로 서구 임상심리학자 혹은 서구 명상가들이 설명해 놓은 명상에 관한 글을 볼 때 무조건 고개 끄덕이며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저자가 어떤 철학적 배경에서 기술했는지 다소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며 동양의 문헌도 병행하여 따지면서 보아야겠다.

 

출처:pixabay | 3D Animation Production Company

아래 글은 고대 피론주의자의 '판단유보, 아타락시아'를 알아보기 위해 황설중님의 글을 요약해 보았다. 학습차원에서 황성중님의 문장을 그대로 인용하였음을 밝힌다.  [참고] 황설중. (2017). 고대 피론주의와 아타락시아. 철학논총, 89, 325-348.


철학에서 헬레니즘 시대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황의 죽음 이후부터 기원전 27년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제국의 황제로 올라서기까지 약 300년 간에 걸친 시기를 말한다. 이 시대에 활동한 대표적인 철학 유파에는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학파, 회의주의학파(신아카데미학파, 피론주의학파), 아리스토텔레스학파(소요학파)가 있다.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 사상가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한결같이 평정심(tranquiltas animi)라고 하는 부동심의 상태에 도달하거나 그 상태에서 유지되는 것을  철학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 시기에 알렉산더 대왕, 폼페이우스, 시저,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 옥타비아누스가 전설적인 전쟁을 치르는 동안 철학자들은 점차 세상살이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세속적 세계에서의 성취보다는 어떻게 마음의 번뇌를 버리고 평화를 누리며 살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더 집중했다고 한다.  



이들 회의주의 학파 중에 피론주의 학파는 마음의 평정, 즉 아타락시아(ataraxa)였는데, '판단유보'가 아타락시아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 보았다. 피론주의자는 분명하지 않은 사태에 대해 선과 악을 포함한 일체의 판단을 보류함으로써  마음의 평안에 이른다고 한다.. "분명한 입장을 결정하지 않은 채로 두는 사람은 열렬하게 어떤 것을 추구하지도 않고 피하지도 않는다. 이 때문에 아타락시아를 얻는다"라고 하여,  일체의 판단을 유보함으로써 "뜻 밖에" 생겨나는 것으로 보았다. 즉, 마음의 평정, 아타락시아는 예기치 않은 가능성의 경지인 것이다.


어떤 독단적 주장에 대해 거부하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는, "사고의 정지 상태가 판단유보(에포케, epoche)이다. 아타락시아는 이런 판단 유보를 토애서 생겨나는 '마음이 교란되지 않는 상태, 혹은 고요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피론주의 시조인 피론은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려준다. " 항해 중에 그와 함께 배를 탄 자들이 폭풍으로 인해 겁에 질려 있을 때, 그 자신은 침착하면서도 단호함을 유지한 채, 이런 소란에 아랑곳하지 않고 갑판 위에서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고 있는 새끼 돼지를 가리키며 저 돼지의 평정 상태야말로 지혜로운 사람이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동시대의 스토아학파는 판단유보에 따른 아타락시아에 문제를 제기한다. 어떻게 긍정과 부정을 하지 않으면서, 즉 어떤 것도 결정하지 않으면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일체의 사고의 정지 상태인 판단 유보에 이른 사람은 아타락시아에 도달하기는커녕 그전에 죽고 말 수 도 있는 것이다. 판단유보의 끝은 삶 속에서 일상적 행위가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피론주의학파의 시조인 피론은 판단유보는 철학일 뿐, 일상적인 행동을 할 때는 결코 분별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는 살아가는 데 있는 무기력 하지도 않았고, 선택하고 기피하는 행동 기준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피론주의자의 행동 기준은 무엇일까? 피론주의자는 특정한 독단적 믿음 즉, "사물이 실제로 어떠하다"는 견해에 대해서만 판단을 유보한다. 그러나 독단적인 견해가 아닌, 지각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에 대해서는 판단을 허용을 했던 것이다.  


피론주의 자들은 삶을 영위할 때 어떤 경우 판단과 결정을 할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해, 주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특정한 방향으로 결정하도록 강제된다고 하며 행위에 대한 철정한 수동성을 강조한다.  피론주의 자들은 행동을 결정하는 데 있어 주체의 자율적 반성이나 능동적 의지를 철저히 배격한다.  설사 폭군의 잔혹한 명령 앞에서도 주관적이고 적극적인 내적 판단이 아닌 범과 관습에 맞는 선입견에 따라 우연히 선택하여 행동하는 것으로 본다. 결정의 요소에는 공동체의 전통을 수동적으로 따를 뿐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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