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은지심에 대하여

by Joyce C

몇 년 전,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다. 성도들 중 누군가가 목사님께 물었다고 한다. 어떻게 하면 부부가 그렇게 싸우지 않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느냐고.

목사님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 사실 우리 부부는 서로를 긍휼히 여깁니다."

그 말의 뜻은 단순했다. 서로를 불쌍해 여긴다는 것.

그 순간 나는 무릎을 쳤다. 아 그렇구나. 사랑이라는 말보다, 존중이나 이해라는 말보다도 먼저 오는 어떤 마음. 상대를 이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버텨내며 살아가는 한 존재로 바라보는 따듯한 시선. 그게 바로 측은 지심이구나...


측은지심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감정이 아니다. 동정도 아니고, 시해도 아니다. 그것은 같은 높이에서, 때로는 더 낮은 자리에서 사람들을 바라보며

'당신도 참 힘들게 살아왔겠구나' 하고 마음을 내어주는 일이다. 그래서 그 마음이 있는 관계에서는 쉽게 함부로 말하지 못한다. 쉽게 상처 주지 못한다.

그런데 살다 보니, 측은지심을 '연기'하는 사람도 있더라. 그들은 필요할 때마다 스스로를 불쌍한 사람으로 연출한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약자의 얼굴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누군가의 연민을 끌어내기 위해, 상황을 비틀고 맥락을 생략하며, 자신만 피해자인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렇게 측은지심을 연기하는 사람들에게서 나는 단 한 번도 '진짜' 측은지심을 느껴본 적이 없다. 그들은 타인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연민한다. 세상의 모든 고통은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고, 다른 사람의 아픔은 도구가 되거나 배경으로 밀려난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나르시시스트라 부른다. 그들의 연민은 관계를 살리는 힘이 아니라 관계를 장악하는 기술에 가깝다.


아이들 아빠는 측은지심을 가장하는데 특히 능숙했다. 이 대목은 지금 생각해도 씁쓸하면서 웃음이 난다.

그는 자신의 형에 대해서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다.

형은 자기보다 학벌도 좋지 않고, 경제적으로도 여유롭지 않으며, 사회적 명예도 없다. 그래서 형과의 갈등이 생길 때마다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내가 형을 봐주는 거야. 형의 자격지심을 건드리기 싫어서 그냥 넘어가는 거지."

하지만 실상 그는 부딪히고 싶지 않았고, 설명하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자신의 불편함을 감당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측은지심이라는 이름의 포장이 아니었나 싶다.

마치 여우가 신포도를 보며

"저건 어차피 시어서 먹을 수 없어."라고 말하듯, 그는 문제를 회피하면서 그것을 고귀한 배려로 둔갑시켰다. 하지만 그것은 연민이 아니었다.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언어였고,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우위에 두기 위한 자기기만이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가짜' 측은지심은 언제나 문제를 덮는다. '진짜' 측은지심은 오히려 문제를 직면하게 만든다. 진짜 연민은 상대를 약하게 만들지 않는다. 대신 서로를 더 진실한 자리로 부른다.


김기석 목사님의 말이 오래 마음에 남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서로를 불쌍히 여긴다는 말속에는, 상대를 이용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들어 있다. 네가 약해질 때, 내가 그 약함을 무기로 삼지 않겠다는 약속. 그리고 나 역시 완전하지 않은 존재임을 잊지 않겠다는 겸손.

측은지심은 연기될 수 없다. 그것은 기술이 아니라 태도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만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은 결코 타인을 불쌍히 여길 수 없다.

반대로, 타인의 고단함을 진심으로 알아보는 사람만이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나는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좋은 관계란 서로를 끝까지 이해하려 애쓰는 관계가 아니라 끝내 함부로 대하지 않게 만드는 마음이 있는 관계라는 것을.

측은지심은 상대를 약자로 고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 역시 언제든 약해질 수 있는 존재임을 기억하게 한다. 그래서 그 마음 앞에서는 말이 줄어들고, 판단이 늦어진다. 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쪽이 더 정직해진다.


결국 측은지심이란 누군가를 이해하는 능력이 아니라 타인을 대할 때 스스로를 절제할 수 있는 힘에 가깝다. 그 마음이 있을 때 우리는 상대를 함부로 규정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더 유리한 자리에 세우려는 유혹에서도 한 발 물러설 수 있다.

측은지심은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라 그 불쌍함을 이용하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거는 약속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