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인을 찾습니다
내게도 은인이 있다.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나 시간이 흐르고 기억은 희미해져 이제는 그 모습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다시 꼭 한 번 만나고 싶다. 그분을 찾기엔 단서가 적다. 남자이고 공대생이고 키는 175 정도에 나이는 나보다 5살쯤 많을 듯. 눈치챘겠지만 나는 은인의 이름도 나이도 직업도 모른다.
내 나이 20살 때... 와 벌써 30년도 넘은 과거의 일이네.
대학생이던 나는 고교 친구를 만나 대학 축제도 즐길 겸 그 친구가 재학 중인 한국 외대에 놀러 갔다. 놀다 보니 시간이 벌써 9시가 넘어갔다. 막차 시간이 임박했음을 깨닫고 허겁지겁 지하철로 달려갔다. 간신히 막차를 타고 한숨을 돌리고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때 한 남자가 굳이 내 앞에 서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순간 겁이 났지만 마음을 안정시키고 가방에서 책을 꺼내 읽었다. 무례한 시선을 애써 무시하고 책 속 글자에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었는데... 중저음의 비열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책이 눈에 들어오냐?'
나에게 하는 말인가? 재빨리 주변을 살펴보니 주변 사람들은 아무 소리도 못 들은 듯 반응이 없다. 순간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꼈다. 어쩌지... 어떡하지... 이게 막차여서 중간에 내릴 수도 없는데... 후회가 밀려왔다. 친구와 조금만 더 일찍 헤어졌더라면 이런 리스크에 걸리지 않았을 텐데...
1호선 6량 열차. 내가 탄 곳은 맨 앞칸. 나는 벌떡 일어나 다음 칸으로 이동했다. 흡사 광견병이 의심되는 개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뒤따라 올 때의 공포가 이럴까? 슬쩍 뒤돌아 보니 그놈이 계속 뒤따라 오는 게 아닌가... 내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2번째 칸.. 3번째 칸... 4번째 칸.... 5번째 칸..... 그리고 마지막 칸.......
이제 더 갈 곳이 없다. 승객들은 잠시 호기심 어린 눈을 던지고 이내 무관심했다. 숨 막히는 긴장감 속에서 내가 한 행동은 칭찬해주고 싶다. 비어있는 한 좌석을 찾아 얼른 앉았다. 이때 옆자리 은인이 조용히 나에게 말을 건넸다.
'아는 사람인가요~?'
아~~~ 얼마나 반갑고 안심이 되던지...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러나 확실하게 말했다.
'아. 니. 오. 전혀. 모르는 사람이에요. 도와주세요.'
은인의 무릎 위에는 두꺼운 공대 원서가 놓여 있었다. 화학책이었는지 전기 전자책이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도대체가 제대로 기억나는 것이 없다. 내가 '멘붕상태' 였다는 것만이 확실하다.
'다음 역에서 나와 함께 내려요' 나지막한 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째서 이 사람의 말을 그토록 신뢰하고 따를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악인과 은인 모두 그저 모르는 낯선 사람일 뿐인데...
다음 역은 서울역... 서울역...입니다. 내리실 분은....
'지금이에요, 내려요' 마치 100미터 달리기 출발선 앞에서 요이 땅 하듯 은인과 함께 출입문 밖으로 뛰었다.
그런데 그놈도 함께 내리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반전.
출입문이 닫히기 직전에 은인이 나를, 나만을 다시 전철 안으로 밀어 넣었고 따라붙으려는 그놈을 붙잡아 출입문밖으로 끌고 갔다. 그 과정에서 놈의 가방이 출입문에 끼었으나 문이 살짝 열릴 때 빠졌다.
열차는 서서히 움직였고 저 멀리 은인과 놈의 모습이 스치듯 지나갔다. 무서운 악몽을 꾼 듯 정신없이 뛰는 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진정하려 애썼다. 신도림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고 정신없이 집에 왔다. 집에 어떻게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씻고 침대에 누워서 은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 얼굴을 잊으면 안 된다고 되뇌었다.
꼭 기억해야 해. 절대로 잊으면 안 돼.
경희대학생일까? 외대학생? 대학원생일수도... 아니 나처럼 친구 대학을 방문한 다른 대학 학생일 수도... 찾고 싶다.
만나고 싶다.
감사를 표하고 싶다.
결국 30년이 흐른 지금 나는 글로써 그를 기억해 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