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긋지긋한 셀프피알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회사 워크숍 때문에 이번엔 뉴욕을 다녀왔다. 처음엔 참여하고 싶지 않았지만, 회사에 대한 어느 정도의 애정을 표현하러 참여하는 게 워크숍이라 꾸역꾸역 생각하며 넘어왔다. 미국에 살고 있는 가장 친한 동료의 성화에, 프랑스와 방글라데시에서 날아오는 동료들을 만날 기회라는 생각에 결국 비행기에 올랐다.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는 전원 재택이고, 해외 직원들이 많은 편이라 워크숍이 아니면 AI팀과 개발팀은 다른 동료들을 만날 기회가 거의 없다.
장소가 뉴욕이라는 것도 큰 이유가 됐다. 뉴욕은 대학 다닐 때 가까워서, 친구들과 자주 갔던 곳이지만, 졸업 후로는 좀처럼 기회가 없었다. 오랜만에 뉴욕에서 맛있는 음식도 먹고, 골목골목을 걸으면서 걷는 여행을 하고 싶었다. 회사 워크숍은 삼일 정도의 일정이라, 워크숍이 끝나고, 남편도 뉴욕으로와 삼일 정도 휴가를 내 뉴욕을 즐기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회사 워크숍을 참여하기 싫어한 가장 큰 이유는, 과거의 워크숍 때문이다. 지금 회사는 많이 확장해서 다양한 연령대의 직원들이 있지만, 초기에는 대부분 젊은 싱글 직원들이었다. 내향인인 나는, 저녁 11시쯤 끝나는 워크숍 일정만으로도 에너지를 다 소진해, 저녁에는 바로 방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에너지 넘치는 다른 직원들은 술도 더 마시고, 노래방을 이어가고 싶어 했다(한다, 이건 아직도 현재진행형). 게다가 재택회사인데도, 회사 내 연애를 하고 있는 커플들이 있어서, 워크숍에서는 많은 탐색전이 이뤄졌는데, 유부에 아줌마인 나는 그런 드라마를 방관하는 것도 피곤했다.
하지만 2년 만에 찾은 이번 워크숍은 달랐다. 회사가 크게 성장하면서 다양한 연령대의 직원들이 늘어났고, 특히 나와 비슷한 또래의 동료들이 많아진 덕에 한결 편안했다. 특히 작년에 QA(테스터)로 합류한 일본인 언니와는 공감대가 잘 맞아 편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회사 투어버스로 이동할 때면 재미있는 광경이 연출됐다. 버스 뒤편에는 이미 지친 개발자들이 조용히 모여 앉았고, 앞쪽에서는 사교성 좋은 다른 부서 직원들의 시끌벅적한 대화가 이어졌다. 너무 시끄러워서 가이드가 투어 설명을 포기할 정도였다.
저녁 자리에서는 나와 나이가 비슷한 또래의 개발자들은 자연스레 한 테이블에 모였다. 육아 이야기, 반려동물 이야기, 이직 계기 등 편안한 대화가 오갔다. 영업팀이나 마케팅팀보다는 새로운 사람과 어울리기 서툰 우리의 특성이 반영된 것일 테다. 젊은 동료들이 라이브밴드와 함께 노래를 시작하면 우리는 더 구석으로 들어가 아직도 먼 은퇴 계획 같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우리의 사기를 꺾은 순간이 찾아왔다. 처음으로 '우수직원 시상식'이라는 이름으로 회사의 로고 등이 박힌 오백 원 동전만 한 코인을 나눠줬는데, 상을 받은 대다수가 C-레벨 매니저급 이상이었고, AI나 개발팀 쪽에서는 굉장히 적은 수였다. 특히 한 프로젝트를 거론하면서 참여 직원 대부분을 호명했지만, 해당 프로젝트를 위해 밤새워 결과를 만들어낸 나와 데이터를 처리한 엔지니어의 이름은 빠져있었다. 그의 노고를 알기에 더욱 미안하고 속상했다.
시상식이 끝난 후, 나는 데이터엔지니어에게 장난스럽지만, 정말 고맙다고, 고생했다고 말했다. 코인을 받지 않아도, 정말 수고했다고, 나는 정말 감사했다고.
그렇게 시상식이 끝나고, 테이블에 모여 식사를 하고 있는데, 내 매니저가 갑자기 찾아왔다.
미안하다고, 너희들도 코인을 받았어야 했다며, 자기가 깜빡했다고 했다.
나는 괜찮다고 그냥 웃었다. 다른 개발자들도 마찬가지 반응이었다.
다음 날, 내 매니저는 저녁 시간에 우리를 다시 찾아와서, 코인을 하나씩 주며,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했다.
엎드려서 절을 받는 것 같은 생각에 마음 한켠이 묘하게 불편했다. 이런 마음은 워크숍이 마무리되고, 남편을 만나 뉴욕 여행을 시작하면서도 마음에 한 자리를 차지했다.
더 이상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회사에 크게 중요하지 않으려나,
셀프피알(Advocating for Myself?)의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 답지 않게, 나는 내 성과를 적극적으로 알리는 데 서툴다. 업무 보고나 협업 시에는 상세한 설명을 하지만, 내 공헌도를 강조하는 것은 늘 불편하다. 회사에 도움이 되지않을거라면, 굳이 머리를 굴려가며 개발하고, 알고리즘을 만들어 내는 일을 할 이유가 뭔가...
지금 회사에서 나는 회사의 6번째 직원인가였는데, 회사의 시리즈 A(스타트업이 초기 투자 단계를 지나 본격적인 성장과 확장을 위해 벤처 캐피털 등으로부터 받는 첫 번째 대규모 투자 단계) 때는 매일 야근하며 고객 요구사항을 처리했다. 단 하나의 고객도 놓치기 아쉽기 때문에, 요구사항이 들어오면 밤을 새워서라도 어떻게든 데이터를 처리하고 결과를 만들어서 전달했다. 당시에는 일을 쳐내는데 바빠서 셀프피알을 할 여유도 없었다. 게다가 매일매일 요구사항이 바뀌니, 일을 계획적으로 하기보다는, 매일 아침에 미팅을 해서 당일 처리할 일들을 결정하는 방식으로 일을 했다. 그렇다 보니, 매니저 입장에서는 내가 매일 얼마나 일을 하는지 가시적으로 잘 보였을 것이다.
이제 회사는 시리즈 B의 막바지에 있고, 기존의 기능들은 점점 더 고도화되고 있다. 나는 이제야 스프린트(sprint: 2주 간격으로 일감을 미리 계획하고 실행하는 개발주기) 계획을 세우며 체계적으로 일하려 노력하고(언제든 매니저에 의해 계획이 엎어지기 때문에), 많은 작업을 자동화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복잡한 마음을 안고 뉴욕 거리를 걸었다. 내가 뉴욕을 좋아하는 점 중 하나는, 대부분 어디든, 체력만 있다면 걸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뉴욕 사람들은 지하철에서도 길에서도 '바쁘다 바빠' 모드로 걷고 있는 중에 우리도 아침부터 밤까지 그들 사이를 카메라를 들고 다리가 아플 때까지 걸었다.
우리가 여행하던 기간에 뉴욕은 흐린 날이 많았는데, 흐린 날 건물 사이를 걸으며 사진을 찍다 보니, 포커스를 잡는 게 어려웠다. 흐린 날씨 속에서 사진을 찍으며 포커스 잡기가 어려웠다. 밝은 하늘을 담으려 하면 어두운 곳이 가려지고, 어두운 곳을 담으려 하면 하늘이 날아가 버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포커스를 잡지 못하는 것처럼, 중심이 흔들리고 있나,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 나는, 회사 내의 나의 상황이나 포지션에 만족하지 못하다면 내가 떠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현재 회사에 어떤 특별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지 않고, 회사 또한 언제나 나를 해고 할 수 있음을 안다. 어떠한 이유든(끝내고 싶은 일이 있어서, 현재 레이오프가 많아서, 이직이 잘 되지 않아서...) 내가 떠나지 못했다면, 그것은 나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회사에서는 화장한 날도 있고, 흐린 날도 있겠지만, 그에 따라서 내가 이렇게 흔들려서는 안된다.
이 소란스러운 생각들은, 우연히 메트로폴리탄(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에서 회화 도슨트 투어 중에 차분하게 가라 앉았다. 도슨트 가이드 분이 유럽 회화를 설명해주며, '성서화의 경우, 주어진 규칙에 따라서만 그림을 그려야 하는 화가들이, 나름의 창의성을 발휘해, 규칙을 지키면서도 자신만의 그림을 그려낸 경우가 있다.' 라는 설명을 해주었는데, 뜬금 없는 그 말에 울림이 있었다.
이 회사에서 내가 얻으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내가 회사에 기여(기여 할수 있다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처음 회사에 입사 할 때의 목표와 마음가짐을 떠올려보았다. 박사를 그만두고 이 회사로 입사하면서, 논문으로만 배워왔던 머신러닝 기술들을 실제 사용자가 있는 어플리케이션에 적용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회사에서 상품화 할 수 있는 머신러닝 기능들을 개발하고 싶었다. 그리고 스타트업에 다니는 만큼 혹시 크게 보상으로 돌아올지 모르는, 스톡옵션이라는 현실적인 목표도 있었다.
3년이 지난 지금, 나는 자연어처리와 그래프 분야에서 많은 경험을 쌓고 회사 상품에 적용해보았고, 몇 개월 정도 더 다니면 스톡옵션 조건도 모두 채우게 된다.
올 해 새로운 목표로 세운 것들은, 기존의 개발 모듈들을 챗지피(Chatgpt)같은 거대언어모델(LLM)을 통해 자동화하는 것이다. 기존에 사람을 통해 학습 데이터를 모으는 방식은 시간도 비용도 많이 들기 때문에 챗지피의 등장과 함께 조금씩 자동화 방식을 모색했다. 어느 정도 계획을 잡은 후, 매니저를 설득했기 때문에 올해는 이 계획이 무산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 목표를 채우는 것, 그래서 내가 개발한 기능들이 추가적인 작업없이도 자동적으로 동작하고, 학습데이터를 확장하며 지속적인 학습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회사에 인정받지 못해 속상해하는 것보다, 내가 세운 목표를 이루고 더 나은 개발자로 성장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 목표를 성취한다면, 머신러닝개발자로서 나는 더 경험치를 쌓을 수 있을 것이고, 회사에는 더 완성도 높은 기능을 전달 할수 있을 것이다.
셀프피알에 흔들리지 말자, 매번 흔들려도 다시 중심을 잡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