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용품 경매에 빠진 부부
라스베이거스로 이사 온 후, 처음 몇 달은 저녁 산책과 구경을 겸해 호텔 카지노가 몰려 있는 스트립(Strip)을 자주 찾곤 했다. 특히 베이거스의 무더운 여름보다는 겨울 저녁이 훨씬 걷기 좋았다. 가을 정도의 가벼운 복장으로 스트립을 거닐며 구경하기에 딱 알맞은 날씨였다. 우리는 스트립에 남아 있는 거의 마지막 무료 주차장인 트레저 아일랜드 호텔(Treasure Island)에 차를 세우고 본격적인 스트립 탐방에 나섰다.
라스베이거스의 화려한 네온사인들은 밤이 되면 그 진가를 발휘한다. 호텔마다 각자의 개성을 담은 네온사인들이 거리를 환하게 밝힌다. 우리는 트레저 아일랜드에서 출발해 MGM까지 왕복으로 걸으며 스트립을 둘러보곤 했다. 트레저 아일랜드를 지나 이제는 건물의 뼈대만 남은 듯한 미라지(Mirage) 호텔을 옆에 두고, 시저스 팰리스(Caesars Palace)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곳에서는 플라밍고(Flamingo) 호텔이 정면으로 보였는데, 호텔 정문을 가득 채운 화려한 핑크색 네온사인이 플라밍고 날개 모양을 형상화한 시그니처 로고와 함께 눈길을 사로잡는다. 오래된 호텔답게 플라밍고의 F자 네온사인은 이제 거의 보이지 않는다.
스트립 거리에는 호텔 간 연결 다리가 많아, 한 호텔에서 다른 호텔로, 한 카지노에서 다른 카지노로 쉽게 이동할 수 있다. 스트립에 위치한 호텔들은 저마다 개성 있는 내부 인테리어를 자랑하기 때문에, 슬롯머신이나 도박을 하지 않더라도 둘러보는 재미가 있다. 특히 시저스 팰리스와 벨라지오(Bellagio)는 시즌마다 테마에 맞춰 실내 장식을 바꾸곤 하는데, 할로윈이나 크리스마스 시즌에 방문하면 더욱 볼거리가 풍성하다. 화려한 네온사인들이 빛나는 거리를 따라 파리 호텔(Paris Hotel)을 지나칠 때면, 우리처럼 호텔을 구경하며 돌아다니는 많은 관광객들을 마주칠 수 있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여러 호텔을 둘러보며 다양한 슬롯머신도 테스트해 보았지만, 몇 달이 지나자 구경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어 점점 스트립을 찾는 일이 줄어들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라스베이거스의 주거 지역은 스트립의 화려함과는 대조적으로 매우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다. 저녁이 되면, 높은 지대에 위치한 공원에서 산책을 하며 스트립의 눈부신 야경을 멀리서 감상할 수 있다. 번쩍이는 불빛과 활기 넘치는 거리의 모습은 여전히 인상적이지만, 이제는 그 화려함을 조금은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저녁이 한가해진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연한 기회로 넬리스 옥션(Nellis Auction) 덤핑 세일에 다녀오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모든 물건이 단돈 $3에 판매되고 있었다. 그날 수백 개의 박스 사이에서 남편은 애플 핸드폰, 에어팟, 애플와치 3 in 1 충전이 다되는 충전기들을 찾아내고, 내가 탐내던 알파벳 모양 쿠키커터 세트도 찾아냈다. 덤핑 세일을 다녀온 후, 경매 회사들이 운영되는 도시들을 찾아보니 라스베이거스, 덴버, 피닉스 등 몇 곳이 있었다. 이들 도시의 공통점은 아마존과 같은 대형 온라인 유통 창고(warehouse)가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이곳에서는 반품된 물건을 팔레트 단위로 판매하며, 이를 넬리스 옥션(Nellis Auction)이나 맥비드(Mac Bid) 같은 경매 회사들이 대량으로 구매한 후 개별 경매를 진행한다.
아마존에 반품된 물건들의 경우, 생활용품이 대량이기 때문에, 베가스에서는 이런 물건들을 경매로 쉽게 구매할 수 있다. 경매에 나오는 품목은 핸드폰 충전기 같은 저가품부터, 카메라나 커피머신 같은 고가 장비까지 다양하다. 물론 원하는 물건이 항상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잘 찾아보면 필요한 제품을 상당히 저렴한 가격에 구할 수 있다. 우리는 이사를 앞두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집에 필요한 물건이나, 교체가 필요한 캣 스크래처 같은 고양이 용품을 경매를 통해 구매하고 있다. 우리 집의 상전인 짜장이를 위해 습식 사료 자동 급식기, 급수기나 추가적인 캣폴과 캣타워까지 모두 경매를 통해 정가의 1/3도 안 되는 가격에 장만했다.
보통 경매는 로컬 시간으로 저녁 8시 정도부터 시작되는데, 덕분에 우리는 저녁에 수업을 듣는 시간 사이 짬을 내서 입찰에 참여한다. 경매에서 모든 물건의 시작가는 $1부터이며, 최종 낙찰가에는 수수료가 추가된다. 넬리스 옥션(Nellis Auction)의 경우, 낙찰가 + 15% 수수료, 맥비드(Mac Bid)는 낙찰가 + $3 추가 후 15% 수수료가 추가된다. 또 넬리스는 반품이 가능하지만, 맥비드는 반품 옵션을 추가 비용으로 지불해 낙찰을 받았을 때만 이용 가능하다.
부부가 함께 생활용품 경매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협상 스킬이 향상된다. 우리는 결혼 후 경제적으로 완전히 통합된 상태이기 때문에(아마 미국으로 오며, 새로운 계좌부터 신용카드까지 같이 만들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런 습관이 잡힌 것 같다), 작은 물건 하나를 사더라도 서로에게 공유하는 습관이 생겼다. 또한, 24시간 같은 공간에서 재택근무를 하다 보니 구매 계획을 세우고 의견을 조율하기가 쉬운 편이다. 각자 자취했던 기간이 길다 보니, 물욕이 작은 편이라, 서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물건의 경우, 구매 시기에 대해서는 협의를 하는 편이지만, 구매를 반대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우리에게 경매 물품은 크게 세 가지 카테고리로 나뉜다.
- 둘 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물건
- 각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물건
물론 둘 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아이템도 각자가 생각하는 경매가가 다른 경우가 더 많다.
예를 들면, 하이킹을 많이 가는 우리는 꽤 오래전부터 방수배낭을 사고 싶어 했다. 개울가가 있는 트레일코스에서는 방수배낭이 필수 이기 때문이다. 백팩 사이즈의 방수배낭은 $100를 시작으로 브랜드가 좋아질수록 더 비싸지기 때문에 우리는 막상 주문하지 못하고 고민을 했었다. 어쨌든 하이킹용품은 당장 생활에 필요한 물건에 비해 후순위로 밀려나기 때문에 매달 예산에 들어가지 못하고 고민만 하고 막상 구매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정가 $70 짜리의 방수배낭을 경매사이트에서 찾았을 때, 경매 목록에 추가해 놓고 가격을 고민했다.
보편적으로 우리는 경매 사이트에서 아이템을 원래 가격의 50% 이상 싸게 사지 않으면, 경매에 참여하지 않는 편이다. 크게 할인을 받지 못하는 가격이라면, 반품된 아이템을 구매하는 베네핏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방수배낭에 대해 남편은 다가오는 자이언(Zion National Park) 하이킹에서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50% 가격까지 입찰할 의향이 있었고, 나는 좀 더 낮은 금액으로 경매에 참여하기를 원했다. 좀 더 좋은 방수배낭이 다음 경매에 뜰 수도 있고, 그렇다면 다음 하이킹까지도 충분히 시간이 있다고 생각이 됐다. 각자 경매 아이템을 인터넷에서 찾아서 리뷰를 확인하고, 이런저런 스펙을 확인하고 서로 얘기해서 이번엔 남편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실제 경매에서는, 우리만큼 방수배낭이 필요한 사람은 없었는지, 우리는 실제로 $15(수수료 포함 $18.80 정도)에 낙찰을 받았다. 이렇게 저렴하게 낙찰받는 재미 덕분에, 우리는 일주일에 몇 번씩 경매 사이트를 확인한다.
또 생활용품 경매를 하다 보면, 서로 어떤 물품들에 관심이 있는지 알게 된다. 우리는 둘 다 고양이 용품을 자주 확인한다. 남편은 카메라 장비를 주로 검색해 보고, 다른 사람들이 원가 대비 얼마에 낙찰받는지를 유심히 본다. 나의 경우, 재봉 관련 용품이나, 베이킹 용품을 주로 확인한다.
남편이 지금은 어떤 것들에 관심이 있는지, 어떤 물건을 필요로 하는지 알아가는 것이 재미있다. 우리는 (남편은 한국에서 만난 와이프를 따라 미국으로 오면서, 나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면서),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살아감'에 급급했다. 안전하고, 안정되게 살아가는 것에 집중한 나머지, 그 외 다른 것들은 오랜 시간 잊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씩 더 많은 경험을 쌓고, 점점 더 우리가 좋아했던 것들에 시간을 쓸 수 있는 여유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 경매의 즐거움도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가고 집이 정돈이 되면 또 잊힐 즐거움이겠지만, 이렇게 서로의 관심사를 공유하고 얘기 나눌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는 경매의 밤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