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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에르토리코

상냥함에 대하여

by Joyce

돌이켜보면, 푸에르토리코로 떠나기 전 우리의 일상은 한껏 움츠러들어 있었다. 코로나 시기의 LA는 따뜻한 날씨와는 대조적으로 무척이나 차갑게 느껴졌다. 당시 우리가 살던 기숙사 근처 마트에서 낯선 이의 공격을 경험한 후로는 더욱 그랬다. 어느 날 마트에서 난데없이 한 남자가 우리를 향해 돌진해 때리려 했고, 다행히 마트 직원이 그를 제지했다.

미국에서 거의 반평생을 보낸 나조차도 처음 겪어보는 낯선 이의 공격은 우리에게 깊은 두려움을 심어주었다. 그 사건 이후, 우리는 밖에 나갈 때마다 주변을 경계하게 되었고, 남편과 바짝 붙어 다니려 했다. 그로 인해 외출에 대한 피로감이 커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 사건이 당시 만연했던 아시안 혐오 범죄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이러한 불안감을 떨치기 위해 우리는 아시안 커뮤니티가 크게 자리 잡은 오렌지카운티로 거처를 옮겼다.


오렌지카운티의 아시안 커뮤니티 속에서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던 중, 회사에서 전체 워크샵 일정이 잡혔다. 장소는 카리브해에 위치한 미국 자치령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의 한 리조트였다. 당연히 회사 일정은 혼자 참여해야 했지만, 이런 기회가 아니면 우리가 아름다운 해변으로 유명한 푸에르토리코를 방문할 기회는 흔치 않을 것 같았다. 고민 끝에 우리는 나의 워크샵 기간 동안 남편은 다른 지역의 에어비앤비에서 따로 지내고, 워크샵 전후로는 함께 푸에르토리코를 여행하기로 했다. 일주일 정도의 여행 기간 동안 우리 집 고양이 짜장이는 남편의 친구가 돌봐주기로 했다.


금요일 저녁에 출발한 우리는 아틀란타 공항을 경유하여 12시간 만에 푸에르토리코의 수도 산후안(San Juan)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만난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친절한 아주머니는 고향의 해변을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unbelievably beautiful beaches)고 설명해주었고, 그 말에 우리의 기대감은 한껏 부풀어 올랐다.

비행기 창 밖으로 펼쳐진 푸에르토리코의 첫인상은 멋진 구름으로 가득한 하늘이었다. 공항에 내리자 출발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높은 습도가 우리를 맞이했다. 우리는 서둘러 우버를 타고 산후안의 호텔로 향했다. 뜨거운 공기를 뚫고 들어선 호텔 로비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목덜미를 감싸주었다.

체크인을 위해 기다리는 동안, 음료 서비스 구역을 정리하던 중년의 호텔 직원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한번 맛보실래요?"

너그러운 인상의 그는 막 음료 서비스를 정리하려던 참이었지만, 우리를 위해 마지막 한 잔을 권했다. 음료 앞에 놓인 '럼펀치(Rum Punch)'라는 글자를 보고 잠시 망설이자, 그는 작은 컵에 시음용으로 두 모금 정도를 따라주었다.


한 모금, 꿀꺽.

적당한 단맛의 자몽, 오렌지 주스와 끝 맛에 감도는 럼의 향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시원하게 넘어가는 두 모금이 너무나 아쉬웠던 건 우리의 표정을 눈치챈 걸까. 우리의 표정을 읽은 직원은 컵을 다시 가득 채워주고는 짐을 들고 안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남은 럼펀치도 순식간에 비워냈다. 푸에르토리코가 칵테일로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이 럼펀치 한 잔으로 그 기대감은 더욱 커져버렸다.


Screenshot 2025-01-15 at 12.59.53 PM.png 푸에르토리코에서 열심히 마신 칵테일


첫날은 오후 늦게 도착하는 일정이었기에, 다음 날 아침 산후안을 자세히 둘러보고 배울 수 있도록 워킹 푸드 투어를 미리 예약해두었다. 푸드 투어 가이드는 푸에르토리코 소재 대학에 재학 중인 여학생이었는데,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귀여운 노란색 가이드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파트타임으로 가이드 일을 하고 있다는 그녀는 무척이나 친절하고 상냥했다.

산후안은 파스텔 톤의 건물들과 자갈길로 이루어진 역사적인 지역으로, 차량과 스쿠터, 그리고 보행자들이 같은 길을 공유하고 있었다. 좁은 산후안의 거리를 누비는 동안 그녀는 투어 참가자들의 걸음 속도를 꼼꼼히 살피며, 힘들어하는 사람은 없는지 수시로 확인했다. 이렇게 세심하게 배려하면서 도시 곳곳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IMG_4615.jpeg 알록달록한 건물들 사이로 1차선의 도로를 모두가 함께 공유한다.


5-6곳의 식당과 아이스크림 가게를 방문하는 동안, 가이드는 각 식당에서의 대기 시간을 적절히 조절하며 푸에르토리코의 음식과 문화에 대해 흥미진진하면서도 너무 길지 않게 설명해주었다. 그녀 덕분에 푸드 투어는 매 순간이 즐거웠다. 처음 맛보는 푸에르토리코의 전통 음식 모퐁고(Mofongo)부터 잊지 못할 맛의 시원한 아이스크림까지, 미식의 즐거움을 한껏 만끽할 수 있었다.

IMG_4666.jpeg senor paleta, 이 아이스크림을 잊지못해 며칠 동안 매일 사먹었다


푸에르토리코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는 현지인들의 친절함을 계속해서 경험했다. 서로의 언어가 잘 통하지 않아도 손짓발짓으로 길을 상세히 알려주었고,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만난 이들은 근처의 숨은 명소와 멋진 해변을 추천해주었다. 음식점에서는 주문 전에 음식 샘플을 건네주며 우리에게 더 맞는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물론 이런 친절함이 관광지의 특성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동안 낯선 이들을 경계하며 살아왔던 우리에게, 그들의 따스한 마음은 얼어붙었던 우리의 마음을 녹이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푸에르토리코에서 뜨거운 태양이 주는 온기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전해주는 따스함도 천천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또 푸에르토리코에서 스노클링 투어는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푸에르토리코에서 남편에게 스노클링(Snorkeling)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주고 싶어 작은보트를 타고 떠나는 스노클링 투어를 예약했다. 투어에서 마주한 바다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맑고 푸르렀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열대어 떼와 돌고래 무리를 보며 우리는 다시 한번 자연의 경이로움을 느꼈다. 산호초, 열대어, 바다거북 등 다양한 해양 생물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감사했다.

생각보다 깊은 수심에서 진행된 스노클링이었지만, 투어 가이드는 수영이 서툰 남편을 위해 구명조끼를 준비해주었다. 덕분에 남편도 안전하게 바닷속 풍경을 마음껏 구경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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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에르토리코에서 보낸 나른하고 따뜻했던 며칠은 내게 잃어버렸던 여유를 돌려주었다. 낯선 이들을 만나는 두려움 대신 설렘과 호기심이 자리 잡았고,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을 느끼며 나 역시 타인에게 친절할 용기를 얻게 되었다. 푸에르토리코는 우리에게 전환점이 되어주었다. 이후 우리는 미국 곳곳을 더욱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게 되었고, 길거리에서, 마트에서, 도서관에서 다른 이들과 자연스레 눈을 마주치며 미소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을 다시 발견하면서, 나 역시 다른 이들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갈 용기를 얻었다. 푸에르토리코의 따스한 햇살처럼, 우리의 마음도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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