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내 인생은 내가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벌써 4년이 넘은 일이다. 코로나 팬데믹과 함께 시작했던 박사 생활을, 팬데믹이 끝나가던 즈음에(일상생활로 비교적 빨리 돌아온 미국에서는 약 1년 후) 그만두었다. 당시 나는 컴퓨터공학 박사과정에 있었고, 취업을 결심하며 자퇴를 신청했다. 그때 지도교수님은 내게 1년간의 시간을 주며, 다시 한번 고민할 기회를 제안하셨다. 하지만 자퇴 후, 취업을 위해 이력서를 제출하고 여러 회사에서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6년 전, 한국에서 회사를 그만두고 석사 과정을 시작할 때, 회사 선배들은 나중에 박사까지 진학해서 공부하라며 응원해 주었다. 당시 나는 "돈"을 벌며 가장 즐겁게 일했던 직장을 떠나 공부를 선택했기에, 석사 졸업 후 미국으로 박사 과정을 시작할 때는 스스로에게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었다. 남편은 박사를 하려는 나를 따라오기 위해 회사에 휴직계를 내고 함께 떠났다. 이후 미국에서 취업하면서 결국 한국에서의 직장은 퇴사하게 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노력과 수고가 따랐다.
코로나 시국에 박사 과정을 시작한 아쉬움도 있었지만, 덕분에 짧은 시간 동안 두 분의 지도교수님을 모시며 많은 어려움을 겪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결국, 두 지도교수님과 함께한 이 과정이 내가 학교를 일찍 자퇴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지도교수님이 갑작스레 두 분이 된 이유는 원래 지도교수님의 추천 때문이었다. 원 지도교수님은 나이가 많으신 시니어 교수님으로, 이론적인 연구보다는 연구를 통해 앱을 개발하거나(보통 앱을 개발한 학생이 순차적으로 논문을 제출하는 방식), 특허를 신청하는 데 관심이 많으셨다. 실제로 개발자 경력이 있는 박사생들(나를 포함)을 선호하셨는데, 덕분에 나는 입학하기 몇 달 전에 졸업하는 학생들로부터 앱과 백엔드 코드를 물려받게 되었다. 입학도 하기 전에 담당 프로젝트가 생겼는데, 이는 소아과 환자들의 설문이나 진료 기록을 수집하고, 이를 기반으로 머신러닝에 활용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학기가 시작되고 나서는 바쁘게 수업을 듣고, 시험을 치르고, 앱을 개발하며 데이터를 모았다. 또한 실험을 하고 논문을 리뷰하며, 교수님께 연구를 보고하고, 교수님의 행정 업무를 도왔다. 가끔 교수님께서 연구 펀딩 행정 관련 일들을 부탁하시는 경우가 잦았고, 이럴 때는 행정실에 여기저기 메일을 보내 필요한 정보를 찾아야 했다. 그렇게 숨 가쁘게 한 학기를 보내며 다양한 일을 병행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도교수님과의 일대일 온라인 미팅 중에 해당 연도에 새로 발령받으신 젊은 교수님 한 분이 갑자기 함께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 교수님은 내가 진행 중인 연구 내용을 함께 보고받으며, 머신러닝 분야에서의 발전 방향을 함께 고민해 주셨다. 이후 이 교수님은 나와 별도로 미팅을 개설하기 시작했고, 원 지도교수님도 연구를 두 개의 미팅으로 나눠 진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다. 그렇게 나는 두 지도교수님과 각각 따로 연구를 진행하게 되었다.
젊은 교수님은 머신러닝 분야에서 활발히 연구를 진행하시는 분으로, 배울 점이 많아 배우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러나 연구를 진행하며 느낀 점은, 젊은 교수님은 정교수로 승진하기 위해 논문 실적이 절실하다는 것이었다. 내가 진행 중이던 그래프 머신러닝을 이용한 결측치 보완 주제에서 논문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보신 듯했다.
그 후 젊은 교수님의 태도는 급박해졌다. 매일 미팅이 잡히기 시작했고 길어지기 시작했다. 수업이 있는 날에도 밤을 새우지 않으면 교수님이 원하는 실험 결과를 준비할 수 없었다. 논문을 빠르게 완성하기 위해 실험 결과를 맞추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벤치마크 데이터에서 일반적인 파라미터로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연구에 유리한 특정 변이를 만들어내거나 적합한 파라미터를 찾아야 했다.
이 시점부터는 쪽잠을 자며 생활하기 시작했다. 내가 GPU 자원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에, 한정된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려면 밤을 새워서라도 실험을 반복해야 했다.
당시에 남편은 미국 취업 준비를 하면서 집안 살림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내가 밥때에 맞춰서 같이 식사를 하지 못하자, 남편은 내가 책상에 앉아서 먹을 수 있는 밥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점차 이런 생활이 계속되면서 박사를 지속하는 게 맞을까 라는 고민을 시작했다.
한국에서 석사 생활을 한 남편과 나는 이런 생활이 정상적이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남편과 나는 한국에서 서로 각자 다른 석사 지도교수님과 다른 학교에서 다른 전공으로 석사를 졸업했다. 나의 경우, 석사를 참아낼 수 있었던 건, 2년이라는 시간 제약 때문이었다.
"이 정도 고생은 다들 하며 박사를 하지."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꾸역꾸역 생활하던 어느 봄 학기 날, 그 일이 있었다. 당시 나는 박사 첫해를 보내며 원 지도교수님의 펀딩이 아닌 학교에서 제공하는 장학금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이 장학금에는 필수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수업, 다른 공대 교수님들과의 세미나, 그리고 발표 등의 활동이 포함되어 있었다.
장학금 관련 행사를 진행하던 중, 슬랙(커뮤니케이션 툴)이 갑자기 무섭게 울리기 시작했다. 젊은 교수님의 메시지가 쏟아지고 있었다. 세미나 중이라 메시지를 바로 확인할 수 없어, 세미나가 끝난 후 약 40분 뒤에 확인했다. 젊은 교수님과는 매일 저녁 정기 미팅이 잡혀 있었지만, 그녀는 그 몇 시간조차 기다리지 못하고 실험 결과를 메시지로 물어보고 있었다.
그날, 끊임없이 쏟아지는 메시지에 갑자기 내가 지쳐가고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다. 돌이켜보면, 이런 메시지는 늘 받았던 것이었고, 어쩌면 그날의 내 태도가 달라졌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아, 나는 이걸 이겨낼 정도로 연구를 좋아하지 않는구나.'
이 생각이 머리에 들어온 순간, 놀랍게도 박사를 그만두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 일이 있은 후, 연구에 대한 열정도, 학교에 대한 애정도 점차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러던 중, 행정실에서 나를 찾는 연락이 왔다. 원 지도교수님의 아마존 계정에서 몇 달 동안 결제되지 않은 금액이 있어, 청구서가 행정실 이메일로 발송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랩실에서 문의했을 때, 다른 학생들은 내가 이 문제에 대해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내 연락처를 전달했다고 했다. 그러나 내 학생 계정으로는 관련 정보나 청구 금액을 확인할 수 없었다. 결국, 원 지도교수님께 연락을 드렸지만, 아무도 아마존 계정의 비밀번호를 모른다는 것이 아닌가.
행정실에서 포워딩받은 이메일 주소를 단서로 추가 조사를 시작했다. 확인해 보니, 그 이메일은 몇 년 전에 졸업한 선배의 계정이었다. 해당 이메일로는 연락이 닿지 않아, 할 수 없이 링크드인에서 이름과 졸업학교를 기준으로 그 선배를 찾아 메시지를 보냈다. 다행히 졸업생이 응답했고, 비밀번호가 여전히 변경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즉시 비밀번호를 알려주었다. 그 계정으로 접속해 메인 계정 이메일을 교수님 계정으로 변경하고, 청구 금액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 금액을 연구 펀딩에서 해결해야 했다는 점이었다. 당시 랩실에는 12명의 학생이 있었고, 각자 다른 연구 프로젝트를 위해 아마존 계정을 활발히 사용하고 있었다. 결국 며칠에 걸쳐 행정실과 협력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
문제를 해결한 후, 나는 랩실의 다른 학생들에게 교수님의 행정 업무를 누가 관리하고 있는지 물었다. 예전에는 교수님 비서가 있었지만, 펀딩 문제로 비서를 내보낸 뒤로는 박사생 중 몇 명이 교수님의 행정 업무를 보좌하고 있었다고 했다. 나에게 백엔드 코드를 넘겨주었던 졸업생이 이전까지는 이 행정 업무도 많이 담당했다고 한다. 결국 나는 단순히 코드를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이런 전반적인 행정 처리 업무까지 물려받은 것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남편에게 박사를 그만두고 싶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앞으로 4~5년 동안 이런 삶을 계속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1년간의 박사 과정 동안, 연구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점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이런 시험대에 올랐을 때 쉽게 사그라질 정도로 내 열정이 부족했을지도 모른다. 박사 과정을 하며 가장 어렵다고 느낀 점은, 무언가 잘못되었거나 부당하다고 느껴도 그것을 감내해야만 한다는 사실이었다. 내 생각에도 부족하거나 잘못된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런 상황조차 쉽게 꺼내 말할 수 없으니 문제를 바로잡을 방법조차 없었다. 나는 잘못된 결정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떤 결정이든 내가 책임을 지면 될거라고 생각했다.
내 고민을 들은 남편은 말했다.
"그만두고 싶다면 그만둬도 돼. 박사가 되지 않아도 네가 하고 싶은 일은 얼마든지 있을 거야."
박사를 그만둔다면 직장을 구해야 했다. 당시 진행 중이던 인터뷰들은 대부분 여름 인턴 포지션을 위한 것이었기에, 이력서를 새롭게 정비하고 다시 준비를 시작했다. 다행히 남편이 그해 초에 미국 회사로 이직에 성공했기 때문에 취업 준비를 하면서 금전적인 부담은 없었다. 그리고 나는 여름방학 중간쯤 한 스타트업으로 취업을 했다.
또 박사를 그만두게 되면서 당시 살고 있던 가족 기숙사에서도 나와야 했다. LA에서 2 베드룸을 1,800달러대에 구할 수 있는 아파트는 매우 드물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우리는 LA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벤투라, 타우즌 오크, 오렌지카운티 등 새로운 거주지를 찾기 위해 구글 맵을 열고 동네를 하나하나 확인하며 고민했다. 여름에 자퇴 신청서를 제출하고, 가을학기 전에 기숙사에서 퇴실해야 하기 때문에, 취업 후에는 주말마다 아파트를 찾아 여러 동네를 헤매고 다녔다.
결국, 우리는 오렌지카운티로 내려가기로 했다. 이 선택에는 코로나 기간 동안 LA에서 겪었던 여러 일들이 영향을 미쳤다. 그 이야기는 언젠가 다른 기회에 풀어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그렇게 나는 박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길을 선택했다. 그 과정은 두렵고 불안하기도 했지만, 또 다른 가능성과 삶의 방향을 열어준 선택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새로운 곳에서 또 다른 새로운 시작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