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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을 걷어내는 시간

미국에서의 출산 준비

by Joyce

어린 시절, 나는 소심한 아이였지만 동시에 호기심이 많았다. 호기심이 늘 두려움을 이겨 어려서는 두려움이 발목을 잡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두려움은 조금씩 내 안으로 스며들었다.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 많아질수록, 지켜야 할 것이 늘어날수록,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도 달라졌다.

미국으로 이주한 뒤, 특히 코로나 시기 아시안 혐오 범죄 소식이 쏟아지던 때, 공포는 일상이 되었다. 그 이후로 나는 길을 걸을 때마다 뒤를 돌아보고, 마트에 가는 짧은 시간에도 머릿속으로 위험 시나리오를 돌려보는 사람이 되었다.

에너지가 많이 들었지만, “어른이니까 감당해야지”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살아도 괜찮다고, 나는 스스로를 설득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하지만, 임신 기간을 지나며,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계속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의 지나친 불안이나 공포는 아이에게 쉽게 전염된다. 아이가 세상을 경험하기도 전에, 내가 쌓아둔 두려움으로 그 세상을 제한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원래 “예상하고 대비하는 것”을 좋아한다. 무언가 일이 생기면 멘붕에 빠지기 전에, 가능한 시나리오를 미리 다 만들어놓는 편이다. 남편은 가끔 “우리 가족 걱정은 네가 다 맡고 있다”라고 말한다. 사실이다. 걱정은 내 취미이자 생존 방식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준비만 하다가 정작 ‘그 순간을 살아내는 일’을 잃어버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계획이 어긋나면 상황을 받아들이기보다, 부정적인 상상들이 더 빠르게 나를 잠식했다. 예측할 수 없는 변화는 내게 언제나 두려움과 같았다.


미국 의료 시스템도 그 두려움 중 하나였다. 미국에 오래 살았지만 치과나 간단한 진료 외 전문 병원에 갈 일이 거의 없었기에,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그래서 검색을 하고, 다른 엄마들의 이야기를 읽고, 챗지피티에게까지 묻고 또 물으며 하나씩 배워 가기 시작했다. 아이를 낳으면 세상을 다시 보게 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던 얼마 전 출산 준비를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우리에게 산부인과 주치의 선생님이 '지금쯤 분만 병원 투어를 다녀오라고' 추천해 주셨다. 처음엔 이해되지 않았다. 왜 진료받는 병원이 아닌 다른 분만 병원에 투어를 다녀오라고 하는 걸까. 열심히 알아보니, 미국 산부인과, 분만 시스템은 보편적으로 다음과 같다고 한다.


미국 시스템에서 산부인과 의사는 ‘주치의’가 되고, 분만은 주치의가 “권한을 가진 병원”에서 한다. 임신을 확인하고 주기적으로 다니는 산부인과의 의사 선생님은 주치의가 된다. 이 선생님과 분만까지 가기 때문에 혹시 특정 질환이나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초기에 해당 부분에 대해 전문 경험이 있는 선생님을 찾아서 진료를 신청하는 게 좋을 수 있다. 대부분의 산모는 이렇게 일반 산부인과에서 주치의 선생님을 만나게 되는데, 일반 산부인과에는 기본 초음파 기계만 있는 경우에 대부분이라, 필요한 경우, 조금 더 전문적인 초음파 기계를 가진 병원으로 진료의뢰를 해준다. 나도 노산이라 고위험 산모 전문 병원에서 여러 검사를 받았다.


이 모든 과정이 너무 낯설었지만, 하나씩 이해할수록 불안은 조금씩 줄었다. 그리고 임신 중기쯤 시작되면, 분만병원을 투어하고 선택하라고 한다. 그러면 주치의 선생님이 수술, 분만 권한을 가지고 있는 분만이 가능한 병원(대부분 수술실과 분만실, 입원실 등을 다 갖춘 대형병원)이면서 내가 가진 보험으로 커버가 되는 병원을 찾는 작업이 시작된다. 우리는 위의 내용에 모두 해당하고, 신생아중환자실(NICU)이 있으며, 분만실이 여유가 있는(10-12개의 분만실이 준비되어 있는 곳) 큰 규모의 병원을 찾아 투어를 다녀왔다. 보통 투어에서는 분만실, 입원들을 안내해 주고 병원에 따라 어떤 방문자 규정 등이 있는지 알려준다. 시설도 좋았고, 우리는 등록도 하기로 했다. 드디어 하나의 큰 결정을 끝냈다고 생각한 바로 그 다음날,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보험에서 더 이상 환자의 주치의가 이 병원에서 분만하는 것을 커버하지 않습니다.”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도대체 왜?’ ‘그럼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지?’ 수많은 생각이 한꺼번에 밀려왔고, 나는 그대로 멘탈이 무너졌다.

미국 보험이야 막무가내인 것을 많이 들은 이야기지만, 기존에 있는 보장 내용을 이렇게 호떡 뒤집듯 뒤집는 경우는 또 처음 당해보았다. 도대체 어느 병원으로 가야 하는 것인가, 집에서 가까운 병원에서 분만을 하기 위해서는 그럼 주치의 선생님 변경 요청을 해야 하는 것인가 온갖 생각이 들었다.


바로 보험 사이트와 지역 내 병원사이트를 계속 뒤져가며, 그리고 분만시스템에 대해서 찾아가며 정보를 취합하기 시작했다. 결국 주어진 옵션은 주치의 선생님이 권한을 가진 다른 병원에서 분만을 하는 것(내 주치의 선생님은 병원 2곳에 권한을 가지고 있는데, 그렇다면 남은 곳은 후기를 별로 좋지 않은 병원 한 곳뿐이다. 이곳은 실제로 투어를 한 다은 곳에 비해 수술실도 분만실도 개수가 더 적은 좀 더 작은 병원이다. 심지어 투어도 제공해주지 않는다). 다른 후기가 좀 더 나은 병원에서 분만을 하고 싶다면, 해당 병원에 권한을 가지고 있는 다른 주치의 선생님을 찾아서 진료를 받아야 한다. 보편적으로 임신 28주 전까지만 트랜스퍼가 가능하기 때문에, 사실상 우리에게는 새로운 주치의 선생님을 찾아 헤멜 시간이 촉박했다.

나는 이런 예상치 못한 상황에 멘붕에 빠졌다. 찬찬히 계획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계획이 무슨 의미가 있나. 그나마 전화를 받은 날이 휴가였기 때문에 망정이지, 일을 하고 있었다면 제대로 일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 시간 넘게 관련 정보를 찾아 헤매며 멘탈이 바닥까지 내려갔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자.


보험 보장 문제는 내가 어쩌지 못하는 부분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주치의 선생님을 만나서 두 번째 병원에 대해서 상의하는 것이다. 선생님께서 병원이 괜찮다고 하면 병원을 실제로 투어 하지 못했어도, 두 번째 병원을 선택하는 것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노산의 임산부라 여러 가지 다양한 검사를 해왔고, 지금까지 나와 아이의 상태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현재 주치의 선생님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이미 임신 중기 후반에 가까워 주치의 선생님을 변경하는 것이 더 큰 위험일 수 있다.


주치의 선생님은 진료 때 "괜찮은 병원”이라며 두 번째 병원에 대한 안내서를 건내주었다. 그리고 나는 주어진 상황에서 지금의 선택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주치의 선생님은 우리에게 출산 계획(Birth Planning)에 대해서 고민해 보라며 추가 서류를 건네주었다. 출산계획이라니, 양수가 터지면 빠르게 병원으로 와서 무통주사를 맞고 열심히 노력해서 빠르게 출산을 하는 게 목표의 전부가 아닌가. 나의 갸웃한 표정에 선생님이 간략하게 설명을 해주셨는데, 물론 의학적인 결정은 의사인 주치의가 하는 것이지만, 원한다면 제대혈을 저장하는 것이라던가, 탯줄을 남편이 자른다던가,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사진을 찍는다던가 더 나아가면 출산 중에 특정 음악을 틀어주는 것까지 요청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장 결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니, 집에 가서 서류를 읽어보고 다음 진료 때 가지고 오면 된다고 했다.

'일정 부분 출산의 경험을 선택할 수 있다.'라는 선생님의 표현에 분만 또한 선택의 여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택 앞에서 두려운 이유는 ‘틀릴까 봐’가 아니라 ‘후회할까 봐’이다. 예상치 못한 다양한 선택지 앞에 너무 많은 두려움을 갖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세상은 더 빨리 변하고, 앞으로 아이는 나보다 훨씬 더 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갈 것이다. 아이가 자유롭게 선택하는 삶을 살길 원한다면, 그런 모습을 보여줘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에게 여전히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중요한 것은 두려움은 완전히 없애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순간에 내려놓는 연습을 하는 것이라는 걸.

그래서 오늘도 다시, 다짐한다. 이번 결정은 두려움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움츠러드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판단하고, 선택하면 된다. 그리고 그 선택을 믿어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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