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변화는 가족의 하루를 다시 짓는다
몇 달 전부터 우리 집에는 새로운 아침 루틴이 생겼다. 우리 집 상전 역할을 하는 고양이 짜장이는 원래도 궁디팡팡을 좋아해, 하루 중 아무 때나 친한 척을 하며 다가오거나 작게 울어 우리에게 그 시간을 요구하곤 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본격적인 "아침 궁디팡팡 루틴”이 생겼다.
특히나 남집사인 남편이 만족스럽게 궁딩팡팡을 해주는지, 남편이 주방에서 커피를 내리기 위해 기계를 작동시키는 순간, 커피머신 소리를 신호삼아 짜장이는 즉시 주방 옆 자신의 애착 매트로 쪼르르 달려간다. 그리고 남편을 향해 애정 어린 눈빛을 보내며 조용히 기다린다. 그럼 남편은 커피 한 잔을 내려놓고, 짜장이가 만족할 때까지 궁디팡팡을 해주며 하루의 첫 타임을 보내는 것이다. 짜장이는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을 아주 명확히 표현하는 편이라, 궁딩팡팡 타임이 충분했다고 느끼면 매트 안으로 쏙 들어가 구르밍을 하거나 편안하게 자리를 잡는다. 그렇게 짜장이는 자신의 하루를 시작하고, 우리는 그 리듬에 맞춰 한 걸음씩 움직인다.
이제는 당연한 듯 자리 잡은 루틴이지만, 처음부터 물 흐르듯 이루어진 건 아니었다. 원하는 시간과 속도를 찾기까지 적지 않은 시행착오가 있었고, 우리는 조금씩 서로 맞추어 간다. 물론 이 루틴이 영원히 같은 모습일 리 없다. 짜장이의 취향이 변하고, 삶의 환경이 달라진다면 또 다른 형태로 모습을 바꾸겠지. 그렇지만 가족이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배워가고, 함께 변화하는 순간들은 언제나 재미있다.
나는 얼마 전, 임신 25주에 맞춰 임신당뇨 검사를 받았다. 이 검사는 임신 중 혈당 조절 능력을 확인하는 절차로, 1차 검사에서 기준치(보통 140mg/dL)를 넘기면 2차 검사를 진행하게 된다. 나는 160mg/dL이 나와 2차 검사 대상이 되었다는 병원 전화를 받았다. 임신을 하며 새삼 느끼지만, 모든 과정 하나하나가 결코 쉽지 않다. 일 인분을 책임지는 삶도 어렵다 생각하는데 하나하나가 이 인분의 몫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2차 검사는 더 까다롭다. 공복 혈당 측정 후, 100g의 당 용액을 마시고 1시간, 2시간, 3시간 뒤에 각각 혈당을 채혈해야 한다. 총 4시간 동안 병원에 머물러야 하니, 인터넷 연결이 불안정할 것을 대비해 결국 회사에 또 휴가를 신청했다.
“일단 흰쌀밥 대신, 잡곡밥으로 바꿔보는 게 어떨까?”
2차 검사를 진행해야 한다는 소식을 남편에게 전했더니, 일하는 틈틈이 검색을 해봤는지 바로 방법을 찾아왔다. 미국에 살고 있지만 우리 부부는 둘 다 지금은 재택근무라 여전히 한식을 주식으로 먹고 있다.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흰쌀을 주로 먹다 보니, 잡곡밥으로 바꾸자는 남편의 제안은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물론, 재택이라고 해서 건강식이 쉬운 건 아니다. 평일엔 일 때문에 자주 야근을 하고, 임신 후 배고픔에 급하게 식사를 하다 보니 요리에 시간을 들이기 어렵다. 주말에는 밀린 집안일과 회사 일, 공부와 강의를 탐색을 하다 보면 하루가 훅 지나간다.
그나마 한 달에 한 번씩 고기나 밀프렙 반찬을 만들어 냉동실에 쟁여두면, 정신없는 주중에 빠르게 챙겨 먹을 수 있다. 요리는 그날그날 시간이 더 있는 사람이 하고, 다른 사람은 설거지와 뒷정리를 맡는다. 부부가 함께 사는 일은 작은 일상의 분담으로 이루어진다.
남편은 당장 저녁에 현미를 사러 아시안 마트에 가자고 했지만, 그날은 정말 일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주말에 사는 걸로 미루고, 당장 집에 있는 서리태, 파로(Farro), 퀴노아를 섞어 잡곡밥을 짓기로 했다. 혈당지수가 낮은 잡곡밥으로 조금이라도 위험성을 낮춰보자는 마음이었다.
오후 업무에 몰두하고 있는데, 부엌에서 잡곡을 씻는 남편의 소리가 들렸다. 아마 내가 저녁을 제시간에 먹을 수 있게 틈 날 때마다 준비를 해두는 것이다. 조용한 물소리였는데, 그 작은 소리가 마음 한편을 단단하게 붙들어 주었다. 세심하고 배려심 깊은 남편 덕분에 내가 이 루틴을 버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임신당뇨 검사가 나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결국 함께 사는 부부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걸 다시 느낀다. 게다가 우리는 재택을 하면서 하루 종일 함께 있으니, 일도 생활 리듬도 언제나 뒤섞여 얽혀 있다.
그날 저녁, 우리는 샐러드와 잡곡밥, 그리고 순두부를 넣은 오믈렛을 먹었다. 아마 이제부터 이런 식의 건강한 식사가 우리의 기본이 되겠지.
식사를 마치고 해가 지기 전 서둘러 동네 산책을 나갔다. 원래도 종종 식사 후 산책을 했지만, 임당 1차 스크리닝에서 탈락하고 나서는 점심 후 짧은 산책, 저녁 후 긴 산책을 매일 하기로 했다. 지금 당장 혈당 상승을 완화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런 결정들은 사소해 보이지만, 결국 우리 둘의 삶을 조금씩 바꾸고 있다.
다행히 2차 검사에서는 정상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그 기간에 세운 우리 가족의 루틴은 여전히 계속된다.
나는 임신 후로 아침잠이 줄어, 새벽에 눈이 떠지면 주방으로 나와 두세 가지 반찬을 만든다. 짜장이는 나를 따라 주방으로 나왔다가 아침을 먹고 다시 안방으로 돌아가서 그녀에겐 언제나 부족한 잠을 더 보충한다. 아침이면 남편은 커피를 내리고, 짜장이와 궁디팡팡 시간을 가진다. 점심을 먹고 동네를 한 바퀴 돌며 짧은 산책을 하고, 저녁을 먹고 나면 더 긴 산책을 나간다. 남편은 매일 잠들기 전 냉장고와 남은 잡곡밥을 확인해 다음날 먹을 잡곡을 미리 씻어 불려둔다.
잠이 들 시간이 되면, 남편은 침대 옆 짜장이의 애착 담요를 둥글게 정리해 준다. 그렇게 온 가족이 한 침대에서 잠든다. (짜장이가 남편 다리 옆에 자리를 잡기까지도 여러 시행착오가 있었다. 예전에는 내 옆에서 자던 짜장이가, 자는 사이 내 발에 몇 번 밀린 뒤 미련 없이 남편 옆으로 이사했다. 그 녀석도 학습한다.)
돌아보면, 우리의 하루는 수없이 바뀌어 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수없이 달라질 것이다. 아이까지 태어난다면, 일상은 또 다른 리듬을 만들어 내겠지.
그 변화가 때로는 두렵다. 그러나 두려움보다 기대가 크다. 평온해 보이는 하루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서로를 생각해 만든 작은 선택들의 결과라는 것을.
이런 가족의 리듬은 우연이 아니라, 축적된 배려인 것 같다. 그리고 그 배려가 우리를 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한다.
조금 더 건강하게, 조금 더 다정하게, 그리고 곧 태어날 새로운 가족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