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공평함은 자연스러운 삶의 전제조건이다.
21살 대학생 시절 나는 부산에서 안동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거기가 거기같은 시골풍경이 펼쳐지고 있었고 그런 모습이 지겨워질 때쯤 하교하는 남학생 한명을 발견했다. 다른 할일이 없었던 나는 그 남학생을 자세히 쳐다보았다.중학생쯤으로 보이는 그 애는 축 처진 어깨에 무거운 가방을 메고 고개를 숙인채 논두렁 길을 걸어 가고 있었다. 논은 끝없이 이어져 도저히 집이 나타날 것 같지 않은 길을 걷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그애가 가엾게 여겨졌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막막한 논 밖에 없는 곳에서 얼마나 걸어야 집에 도착할 수 있을까? 이 아이는 밤에 과자가 먹고 싶어도 슈퍼를 가거나 문방구를 갈 수 없겠구나. 도시생활의 편리함에 길들여져 있던 나는 시골 생활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세상에 재화는 한정되어 있고 누군가가 많이 가졌기때문에 누군가는 적게 가질수 밖에 없는것은 아닐까, 나는 너무 많이 가진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때 나는 꿈도 좌절되고 돈도 없이 방황하는 가난한 대학생일 뿐이었는데도 도시에서 생활하는 대학생이라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의 몫을 차지해서 가진 기분이었다.
인생이 공평해야 한다고 믿었던 21살의 생각이었다.
사람은 다 자신의 몫을 살아가고 있을뿐이다. 몫의 크기가 다르고 모양이 다르다고 해서 그것을 같게 만들수는 없다. 숲에도 큰 나무, 작은 나무, 양지식물,음지식물이 어울려 살듯이 우리 사는 세상도 그런것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 이미 불공평함을 전제조건으로 태어난다. 다른 외모와 지능과 건강과 부모를 가지고 인생을 시작한다. 누구나 그렇다. 그래서 불공평함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자연의 이치이다. 그래서 원시시대부터 지금까지 인류역사에서 공평함이 존재했던 시절은 없는 것이다.
공평은 원래 저울로 무게를 달다는 뜻에서 유래된 말로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고르다는 말이다.
공평함은 하나의 잣대를 가지고 삶을 저울질하는 것이다. 안동가는 버스에서 본 남학생에게 내가 잣대로 들이댄 도시의 편리함은 내가 우위에 두는 가치였을뿐 다른 사람에게는 중요한 가치가 아닐 수 있다. 내게 소중한 가치가 다른 사람에게도 소중한 것일거라 믿는 것은 비록 선의에서 출발했어도 무지를 바탕으로 한 유아적 자기 중심성이다. 이 때의 공평함은 가치관이 각양 각색인 인간의 본성에 위배된다.
또 공평함은 나눠가진다는 뜻으로 쓰일때가 많다. 그런 경우 공평함은 미덕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미덕으로서의 공평함은 자발적일 때로 국한된다. 공평함을 강요당할 때 우리의 자유는 침해받고 미덕은 폭력으로 변한다.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고 누군가의 자유를 침해하며 얻은 공평함으로는 아무도 행복할 수 없을것이다.
불공평함이 삶의 전제 조건일 때, 공평함은 행복의 전제조건이 될 수 없다.
안동가는 버스에서 본 남학생은 자라서 황현산과 같은 이 시대의 스승이 되었거나 우리나라를 이끄는 정관계 인사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