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알고 싶다'는 어떻게 내 행복을 방해했는가

인생은 통제할 수 없는 것.

by now nina

토요일 늦은 밤, 우리 가족은 '그알(그것이 알고 싶다)을 보기 위해 TV 앞에 모여 앉는다. 가끔 치킨까지 시켜놓고 채널을 고정한다. 그알에서 다루는 범죄와 살인은 억울한 판결의 경우나 미제 사건이 많다. PD들은 오래전 사건도 파헤쳐서 당시의 기술로는 알 수 없었던 단서를 현대 과학의 힘을 빌어 찾아내고 집요하게 사건의 진실을 쫒는다. 작은 단서 하나에서 시작해 거대한 진실의 퍼즐을 맞추기 위해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찾아가 취재하고 때로는 신상의 위협도 무릅쓴다. 누군가의 억울함을 풀고 진범을 쫒는 사람들의 고군분투가 흥미진진하면서도 감탄을 자아낸다.


그러던 어느 날 범죄로 희생된 젊은 여자의 사진을 보게 되었다. 멀쩡하게 걸어서 나가는 모습이 아파트 CCTV에 찍혀있는데 얼마 후 시신으로 발견되는 범죄들은 너무 많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그것이 알고 싶다'가 보고 싶지 않았다. 범죄로 희생당한 누군가도 인생을 아름답게 살고 싶었던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여겨졌다. 그리고 그 사실은 내가 행복을 추구하는데 장애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저렇게 예고 없는 불행을 당하는데
책을 읽고 인생에 질서가 있다고 믿는 것이 괴로웠다.



행복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의 만족감도 있고 친구와 만나 이야기하는 즐거움도 있고 여행지에서 느끼는 설렘도 있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내가 가장 자주 행복을 경험하는 순간은 책을 읽고 새로운 생각이나 깨달음이 일어날 때이다. 책에서 얻은 통찰로 삶이 내 손아귀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삶이 어떤 가치를 향해 질서 정연하게 자리하는 기분이 들 때 만족감과 희열을 느낀다. 그러나 그런 행복감은 오래가지 못한다. 곧 범죄로 희생된 여자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누군가는 저렇게 예고 없는 불행을 당하는데, 나는 책을 읽고 인생에 질서가 있다고 믿는 것이 괴로웠다.


가령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삶이란 온통 개인적 선택과 결정의 연속임을 알아야 한다.

완전히 이것을 받아들이 수 있으면 자유로워진다.' 아직도 가야 할 길 -M 스캇-

책에서 읽은 이 구절에 마음이 설레기도 전에 불행한 사고로 희생된 여자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이 말은 죽기 전까지는 그 여자에게도 진리였을까 생각하게 된다. 이런 의심이 들면 인생을 이해해보려던 노력은 의미가 없어지고 무력해진다. 세상의 선의와 노력의 가치에 대해 믿으려고 하면 슬며시 고개를 드는 이런 생각이 내 행복에 발목을 잡는다. 책을 읽고 세상을 이해하려고 들면 들수록 미궁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된다.



괴로움의 밑바탕에는 삶이 공평해야 한다는 전제와
삶을 통제하고자 하는 욕구가 깔려있었다.


왜 꼭 책을 읽을 때에만 그런 생각이 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특히 자기 계발 서류의 책을 읽을 때 더 그렇다. 지금보다 나은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은 늘 나를 흔들어 깨우지만 그 흔들림은 곧 혼돈이 된다. '삶이 개인적 선택과 결정의 연속이라면 희생된 젊은 여자는 어떤 선택을 했기에 저런 끔찍한 일을 당한 것일까? 살아서 아파트를 빠져나갈 때 이미 선택된 죽음의 길을 가고 있었다는 것일까?'

사건, 사고는 인과관계가 있는 경우도 있지만 우발적이고 우연한 경우도 많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하루에 172명이 암으로 죽고 38명이 자살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죽음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집중하고 싶은 것이다. 삶의 우연성을 넘어서는 진리를 나는 책에서 찾고 있었다.

그래서 책에서 말하는 바가 나뿐 아니라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다른 이의 삶에도 적용될 수 있는지 살펴보게 된다. 이런 생각은 오랫동안 나를 괴롭혀왔고 책에 집중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책에서 답을 찾거나 여러 사람에게 질문을 했었지만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지 못했다. 그러다 이런 내 괴로움의 밑바탕에는 삶이 공평해야 한다는 전제와 삶을 통제하고자 하는 욕구가 깔려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어리석은 생각에서 풀려나고 싶었다. 삶은 공평하지도 않고 통제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것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킬 무엇인가 필요했다. 그리고 나는 하나의 이미지를 찾아내었다.


공평하지 않다고, 통제할 수 없다고 선장이 되기를 포기할 수는 없다.
다만 누구나 자신의 바다를 항해할 뿐이다.



바다에 떠 있은 배! 살아간다는 것은 바다에 배를 띄우고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우리 모두 인생이라는 바다에 던져진 배를 운행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각자의 배를 타고 항해를 시작한다. 태어날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배를 우리는 선택할 수 없다. 조각배이든 호화요트이든 주어지는 대로 받아서 시작할 뿐이다. 불공평함을 불평해봤자 아무 소용없다. 다만 바다로 던져졌고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바다는 깊은 곳에 암초를 숨겨두기도 하고 예기치 않은 풍랑을 일으키기도 한다. 풍랑의 세기와 크기는 오직 바다에 달려있다. 배가 뒤집히도록 거센 풍랑을 일으킬지 잔잔한 미풍으로 앞으로 나아가게 도와줄지 아무도 모른다. 인간이 통제할 수 없다.

태어날 때 자신이 탈 배를 스스로 선택할 수 없고 바다의 풍랑을 통제할 수 없다고 해서 선장이 되기를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다만, 누구나 자신의 바다를 항해한다.


바다가 거칠다고 책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일이다.
다시 책을 읽어야겠다,


바다가 거칠다고 책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일이다. 책은 항해하는데 도움을 줄 뿐, 바다를 통제하지 못하다. 비로소 내 책은 면죄부를 받았다.

이번 주는 '그알'을 봐야겠다.

그리고 다시, 책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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