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신라 호텔 숙박하기

스스로 지은 경계 허물기

by now nina
Having은 우리의 렌즈를 ‘없음’에서 ‘있음’으로 바꾸는 방법이에요.
있음에 주의를 기울일 때 당신을 둘러싼 세계는 다르게 인식될 거예요
. ‘없음’의 세상에서 ‘있음’의 세상으로

-더 해빙-



저기는 우리가 가는 곳이 아니야


막연히 다른 사람의 삶이라고 선망하기만 하던 일이 있다.

내게는 제주신라호텔 투숙하는 일이 그랬다. 2004년 가족 여행으로 제주도에 갔었다. 어린 딸과 셋이 묵을 펜션을 알아볼 때 제일 먼저 고려한 것은 가격이었다. 바다에 가까우면 비싸고 가격이 싸면 숙박시설이 허름했다. 며칠을 고르고 골라 서귀포에 있는 적당한 이층 펜션에 자리 잡았다. 조금 걸어 나가면 바다가 보이고 시골 정취도 느낄 수 있어서 우리 형편으로는 최상의 선택이었다. 근처에 꼬마전구 불빛이 화려한 펜션들을 보면 슬쩍 우리가 묵는 펜션이 초라해 보이기도 했지만 가족과 함께라서 괜찮았다.

제주신라호텔 앞을 지나가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테디베어 뮤지엄을 다녀오는 길에 만나게 된 것이다. 짙푸른 파랑 하늘 사이로 노을이 지고 호텔은 오렌지색 조명으로 아름답게 빛났다. 구석구석 나른해 보이는 불빛들은 건물보다 높이 뻗은 키 큰 나무 사이로 막 켜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마치 다른 세상 같았다. 자석에 끌리듯 발길은 저절로 신라호텔 쪽으로 다가갔다. 동화처럼 환상적인 모습에 끌려 단박에 뛰어가려고 하는 딸을 순간적으로 제지하면서 "저기는 우리가 가는 곳이 아니야"라고 말해버렸다.

"그럼 누가 가는 거야?" " 돈 많은 사람들, 부자들이 가는 곳이야" 나는 어린 딸의 손을 잡고 막았다. ‘그들만의 세상이야, 우리 세상이 아니야.’ 목을 빼서 궁금해했지만 투숙객도 아니면서 호텔 정원을 기웃거릴 배짱이 없었다. 호텔 관계자가 다가와 누구냐고 물으면 어떡하나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제주신라호텔은 내게 '그들만의 세상'에 존재했다. 살면서 형편이 조금 나아져 해외여행을 다니고 가족여행을 다니게 되었을 때도 언제나 '합리적인 가격'이 선택 기준이었다. 호텔시설이 투숙객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정원이나 로비를 제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에도 제주신라호텔을 다시 가볼 기회는 없었다. 제주보다 싼 동남아 여행이 늘려있었기 때문이다.


로망이 이루어지러는 순간


그러다 결혼 25주년 기념일을 제주에서 맞이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제주신라호텔로 가자! 무엇보다 내게는 제주신라호텔에 대한 로망이 있지 않은가? 2박에 140만 원을 예약하면서 나는 설렜고 남편은 놀랬다. 2021년 1월 7일 체크인을 위해 10월 말에 예약했다. 렌트는 하지 않기로 했다. 호텔 정원을 어슬렁거리고 수영장에서 카바나를 이용해야지, 호텔 바에서 와인을 마시며 제대로 호캉스를 누리리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12월부터 코로나가 심상치 않았다. 정부는 2.5단계를 발휘하고 5인 이상 집합 금지를 시켰다. '우린 2명이니 괜찮지. 해외여행 아니니 괜찮지.' 코로나는 걱정되었지만 그렇다고 여행을 취소할 정도는 아니었다. 코로나가 무섭다고 사는 일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즈음 소방공무원이 코로나에 걸려서 직위 해제되었다는 소식을 친구가 전해준다. 여행을 1주일 앞둔 시기였다. 직위해제라니, 무서운 단어지만 나하고 경우가 다르니 개의치 않기로 했다. 그래도 그런 말을 안 들었을 때 보다 훨씬 조마조마하다.


처음엔 비싼 호텔비를 내켜하지 않던 남편이 날짜가 다가오자 나보다 더 기다리는 눈치이다. 때마침 일기예보는 우리가 계획한 날에 최강 한파를 예고해준다. 밤 수영을 위해 준비한 래시가드가 소용없을 것 같다. 코로나 위협에 최강 한파 걱정에 신경을 쓴 탓일까? 여행을 3일 앞두고 배탈이 났다. 설사를 하고 힘이 없다. 큰일이다. 급히 병원 가서 링거 맞고 약 먹으며 컨디션을 조절했다. 무조건 갈 거라고!


드디어 1월 7일 아침, 남편과 일찍 공항으로 출발했다. 공항리무진도 코로나로 수익성이 악화되어 운행되지 않는다. 할 수 없이 캐리어를 끌고 지하철을 이용하기로 했다. 딸의 배웅을 받으며 지하철을 타자 무사히 여행길에 올랐다는 생각에 비로소 안도감이 든다. 이어폰을 꺼내며 남편이 나직이 말한다. "음악 들으면서 가자."

음악을 들으려고 핸드폰을 꺼내니 문자가 하나 와있다.


*에어 제주행 LJ 503편은(10시 10분 출발) 제주공항의 강설 및 강풍으로 인한 악기상으로 결항되었습니다. 날씨로 인한 항공기 안전운항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이오니 이점 널리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예약 변경 또는 환불을 원하시는 승객께서는........


아니, 이게 무슨! 결항이라고? 그럼 우리 제주도 못 가는 거야?

문자를 읽고 카톡을 다시 열어봐도 결항이라는 내용이다. 멍해졌다. 결항이라는데 공항까지 가는 것도 어리석어 보였지만 그렇다고 지하철에서 내릴 수도 없었다. 지하철에서 내리는 순간 우리의 로망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다른 비행 편이 있을지도 모르니 일단 공항까지 가보자고 마음먹고 뉴스를 검색해보았다. 전국에 북극발 한파가 몰아치고 특히 제주는 57년 만에 처음으로 한파경보가 내려졌다고 한다. 다른 비행 편이 있을 리 없다.


내 로망보다 남편의 조용한 실망이 더 마음 쓰였다.


무거운 캐리어를 다리 사이에 끼우고 이어폰을 들고 있던 남편의 거친 손이 눈앞에 보인다. 엄지 손가락 살이 트고 갈라져있다. 2년 전에 하던 일을 그만두고 어쩌다 맡게 된 마트 일을 하느라 피부가 약한 남편 손이 터진 것이다. 처음 해보는 육체노동을 견딜 수 있을까 걱정하며 시작한 것이 벌써 1년을 넘어가고 있었다. 쉬는 날 없이 일하며 오늘만을 기다렸을 남편을 생각하니 내 로망보다 남편의 실망이 더 안타깝고 걱정된다. 어떻게라도 해 봐야겠다.


그때 부산 아난티 힐튼 호텔이 생각났다. 그곳이라면 여행 온 기분을 낼 수 있겠다. 금액은 상관없었다. 오늘, 내일 최고의 뷰를 보며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이면 충분했다. 실망을 애써 감추고 있는 남편 얼굴이 안쓰러워 바로 볼 수 없었는데 다시 힘이 솟는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야지, 체크인 시간까지 캐리어를 끌고 다닐 수는 없으니. 이번에는 딸도 함께 간다. 호텔 조식이 먹고 싶다던 딸은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서고 우리는 자동차에 짐을 싣고 호텔로 출발했다. 가족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집에서 호텔까지는 20분 거리이다.


호텔은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들어서자마자 시원하게 뻗은 방 너머로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사진으로 보던 제주신라하고는 비교되지 않게 고급스러운 객실이었다. 짙은 갈색 가구로 꾸며진 침실은 딸을 위한 침대가 하나 더 들어오고도 여유 있었다. 푹신하고 까실한 호텔 침구는 늘 그렇듯 몸을 털썩 던지게 만들고, 바다를 품은 넓은 베란다는 한순간에 우리를 들뜨게 해 주었다. 건식 욕실은 방만큼 넓고 화려해서 자꾸 둘러보게 된다. 내 사소한 로망 중 하나가 바다를 보면서 목욕하는 것인데 여기 깊고 둥그란 욕조는 바다를 향해 따로 나와 있었다. 누가 설계했는지 훌륭하게도!


호텔 아래 아난티 타운을 어슬렁 거리거나 호텔 바에서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는 것 말고는 다른 할 일이 없었다. 코로나로 수영장은 폐쇄되고 사우나도 우리 선택에서 제외되고 나니 그저 바다를 보다가 낮잠을 잤다. 알아듣지 못하는 중국 채널 틀어놓고 시시한 농담을 하거나 바닷가를 산책했다. 최고의 휴가였다. 돈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스스로 지은 경계를 허물자 로망도 이루어졌다


이렇게 오면 되는데 나는 왜 그동안 나와는 상관없는 세상이라고 부러워하기만 했을까?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출하지 못할 만큼 엄청난 돈도 아닌데 말이다.

돈은 본래 이름표가 없는데 내가 그동안 이름표를 붙여놓고 스스로 경계를 지어온 탓이다. 자식에게 들어가는 돈은 그 액수가 얼마이든 따지지 않았지만 그 외의 돈은 모두 한계를 정해놓고 그 이상을 넘지 않도록 조절해왔다. 옷값은 얼마 이상이면 안되고 여행경비는 얼마 한도 내에서, 외식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국내 최고급 호텔 숙박은 내 여행에 없었다.

결혼 25주년에 제주신라호텔을 떠올린 것은 젊은 날의 로망이 마음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로망을 실현하는 일, 가족을 위로하는 일에 쓰는 돈은 얼마가 되었든 낭비가 아니었다. 여전히 호텔을 일상으로 드나들지는 못하겠지만 이제 더 이상 우리가 가는 곳이 아니라고 경계 짓지는 않을 것이다.

부자들이 가는 것이 아니라 가서 즐겁게 누리는 사람이 부자인 것을 알았다. 하마터면 내가 스스로 지은 가난한 세상에서 부러워만 할 뻔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주머니에 얼마가 있는지가 아니라 돈을 쓰면서 그것을 기쁨으로 누릴 줄 아는 능력이었다.

제주신라호텔 근처에도 안 갔지만 마음속 경계를 허물고 나자 내 로망은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