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턱 끝이 못마땅했던 것일까
후끈하고 습한, 매케 하기까지 한 공기가 코를 파고든다. 비행기에서 내려 코끝으로 느껴지는 캄보디아의 첫 공기. 명색이 한 나라의 수도인 프놈펜 국제 공항은 내 동네 국내선 공항보다도 초라하다. 눈앞의 볼품없음에 동남아를 여행하는 흔한 한국인의 모습이 내 속에서도 스멀스멀 나온다. 급속히 발전한 나라에서 80년대에 태어나 내 발로 디딘 곳을 은근히 무시하는 모습. 봉사는 개뿔. 첫 마음부터 건방지다.
봉사활동 팀으로 왔기에 수화물은 공용 짐이 다 차지했고 개인 물건은 각자의 몫이다.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의 무게에도 빳빳이 고개를 들고 공항 건물로 들어간다. 그러나 이내 기다란 검색대의 늘어선 줄에 한숨부터 나온다. 그 끝에는 깊게 팬 주름에 표정을 알 수 없는 남자들이 서 있다. 공항에서 급속통행료 명목의 뒷돈을 요구한다더니 이것이로구나. 캄보디아로 오기 전, 현지에 사는 한국인에게 미리 이야기를 들은 터였다. 그런데 어라, 가만 보니 막대기로 배낭만 툭툭 건드리며 사람들을 보내준다.
별거 없네. 속으로 피식 웃으며 남자들을 지나치려 할 때였다.
“스탑, 오픈”
나? 나한테 하는 말인가?
“미?”
말없이 토끼 눈을 하고 남자를 쳐다봤다.
“오픈”
남자의 짧은 대답에 치켜들었던 턱 끝이 파르르 떨린다. 배낭을 내려놓고 머리를 굴려본다. 내가 배낭 안에 뭘 넣었더라? 한국에서 공항까지 입고 온 겨울 옷가지가 제일 위에 들어있을 테고, 그 밑에는 뭐를 넣었는지 당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배낭을 여니 예상대로 공항 화장실에서 제멋대로 벗어 쑤셔넣은 허물들이 들어있다. 그 아래로 복부인이 들 법한 금빛 호피무늬 파우치가 보인다. 엄마가 사은품으로 받았으니 막 써도 된다며 짐 쌀 때 던져 줬는데.
그 순간이 그림처럼 스쳐 지나가고 금빛 파우치 안에 무엇을 넣었는지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맙소사, 맙소사, 맙소사. 식었던 땀이 다시금 용솟음친다. 표정을 숨기고 배낭 안에서 파우치를 살짝 비켜 아래에 있는 것을 꺼내려는데 이 남자, 한두 번 겪어봤겠는가. 미간을 찌푸리며 막대기를 내 배낭 안까지 넣고 툭툭 친다. 자비 따위는 없다. 마지못해 조심스레 입구를 여는 내 손을 넘어 남자의 막대기가 훅 지나간다. 얼떨결에 활짝 열린 금빛 파우치 안에는 누렇게 변한 나의 속옷가지가 조심스레 웅크리고 있었다.
낡은 속옷 가져가서 입고 버리기. 빨래 안 하고, 말릴 걱정도 없고, 짐도 줄이고. 일석 삼조라며 해외여행 고수에게 전수 받은 비법이었건만. 첫날 공항에서 캄보디아 남자에게 다 보여주었다. 목에서부터 벌겋게 열기가 차오르는데 남자는 표정도 없다. 그저 무심하게 턱 끝으로 나갈 길을 알려줄 뿐이다. 그저 이미 놓쳐버린 나 대신 도도하게 다른 먹잇감을 물색하느라 눈동자가 바쁘다.
입술을 앙 다물고 배낭에서 쏟아져나온 짐들을 다시 욱여넣었다.
“니가 제일 부자처럼 보였는갑다.”
위로랍시고 친구가 건넨 말에 공항을 나서며 주책맞게 눈물이 터져 나온다.
해외여행 간다고 우리 아빠 신상 배낭을 야심 차게 빌려온 것이 화근이었던가.
아니면 빳빳이 치켜든 나의 턱 끝이 못마땅했던 것일까.
마흔 한 살 지금의 나라면 누런 브래지어를 그 남자 눈앞에서 호기롭게 흔들어 보였을 텐데.
스물 한 살 그녀는 세상의 쓴맛이라도 본 양 죽상을 하고 공항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