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스러운 날들 속에서도 크리스티나는 맛난 밥을 지어 먹고 있겠지
“여보, 이스타항공, 괌 취항 특가 떴어”
직장에 있는 남편에게서 급히 전화가 왔다.
오픈 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
컴퓨터와 노트북을 둘 다 켜고 꼭 득템에 성공하란다.
가격을 들으니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는
초 초 초 할인 항공권이다.
여름임에도 여전히 못 감은 머리를 질끈 묶어 올린다.
아기 훼방꾼은 원천봉쇄.
양손에 과자를 들려주고 아기띠로 단단히 어부바도 한다.
클릭 새로고침을 여러 번 하며 항공권 득템에 성공했다.
야호
항공권 여정을 보고 있자니 설렌다.
그러다 과자를 다 먹은 아기의 칭얼거림에 현실을 자각한다. 슬슬 걱정이 찾아온다.
보름.
비교적 긴 시간의 여행이기에 네 식구가 호사스럽게 호텔에 머물며
주는 밥만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인도의 파리 날리는 길거리에서 대충 털어낸 그릇에 담은 밥을
꼬질한 손으로 퍼먹어도 배탈 한번 난 적이 없었다.
모기장 위로 바퀴벌레가 기어가도 두 눈 질끈 감고 잠들었다.
그러기에 어느 지역으로 여행을 가도 걱정은 없다.
그러나 14개월, 40개월 아이들과 함께하는 여행이기에 생각이 많아진다.
숙소가 마땅찮으면 어쩌나
먹일 것이 없으면 어쩌나
아프면 어쩌나
매일 같이 인터넷을 뒤지며 예약한 게스트하우스는 2층짜리 주택.
그 중 화장실이 딸린 1층 큰 방을 우리가 사용하기로 했다.
팜트리나무와 플루메리아 꽃이 한가득 보이는 너른 방을 하루 10만원에 빌렸다.
괌 물가를 생각하면 나쁘지 않다.
다만, 하나 밖에 없는 주방을 주인 할머니, 2층 손님과 1층 작은방 손님 그리고 우리 가족까지.
모두가 함께 사용해야 한단다.
가스불이야 그렇다 치지만 밥은 어쩌나. 밥솥에 한 밥을 냄비에 다시 덜어야 하는가.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지만 아무래도 역부족이다.
아이들 생체 리듬은 집에서도 제멋대로인 것을.
궁여지책으로 전기밥솥을 들고 가기로 했다.
자취용 작은 밥솥이지만, 나만 빼고 양이 적은 우리 가족 한 끼 밥 지어 먹기에는 딱 좋다.
출국 전 날, 캐리어를 펼치니 옷가지를 담은 가방 하나
수영복, 튜브 등 물놀이용품 담은 가방 하나
그리고 나머지 두 개의 캐리어가 먹거리다.
밥솥과 전기 포트.
멸균 우유와 주스, 누룽지, 각종 레토르토 식품 등등
아직 이유식을 먹어야 하는 아이를 위해 각종 야채까지 썰어서 꽁꽁 얼렸다.
큰 아이가 먹을 된장국도 진하게 끓여 얼렸다.
별난 열혈 엄마의 짐가방이 되어 버렸다.
보냉가방과 멸균팩들을 캐리어에 테트리스 하고 있으니
남편이 한국 아줌마 참 대단하다며 혀를 찬다.
그렇게 쿠사리 들으며 들고 간 밥솥은 괌 여행 내내 효자 아이템이 되어 주었다.
다른 손님들이 공용 밥솥을 돌려 가며 사용할 때
유유히 부엌에 들어가 자취용 밥솥으로 아무 때나 밥을 지었다.
마치 대단한 특권이라도 누리는 양.
밥솥으로 갓 지은 밥과 주먹밥용 김가루 쓱쓱 비벼 보온 도시락에 넣으면
수영장에서도, 해변에서도 점심 한 끼로 부족함이 없었다.
게스트하우스 할머니는 밥솥 들고 여행 온 손님은 새댁이 처음이라 하셨다.
그 이후 전기 밥솥은 보름에서 한달씩 해외를 여행하는 우리 가족 필수품이 되었다.
비치 원피스는 포기해도 밥솥은 포기할 수가 없다.
밥솥은 여행을 갈 때마다 새로 구입을 했다.
해외에서는 압력도 안되는 내 밥솥을 탐내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괌에서는 우리 아빠 차는 내가 고른 크라이슬러라고 자랑하던 7살 아이 가족에게.
그래, 니 똥 굵다.
내 신랑 차는 마티즈다.
얄미운 녀석 째려보다가도 세 아이 밥 해대는 엄마 모습에
괜시리 동지애를 느껴 밥솥을 주고 왔다.
독일에서는 캠핑갈 때 딱 좋겠다며 첫날부터 밥솥만은 주고 가라던
이민 3년차 게스트 하우스 주인장 가족에게 주고 왔다.
한국에 돌아와 알프스 산에서 빛나고 있는 밥솥 사진을 받았더랬지.
발리에서는 매일 아침 우리 가족 맛난 밥 해주던 크리스티나 아줌마에게.
크리스티나는 소란스러운 날들 속에서도 밥솥으로 맛난 밥을 지어 먹고 있겠지.
항공권을 예매했다.
밥솥부터 샀다.
이듬해, 밥솥은 누구에게 가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