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미싯 몸의 <면도날> 속 수잔 루비에
서머싯 몸의 장편소설 <면도날> 속에는 '수잔 루비에'라는 여자가 등장한다. 작품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지만 톡톡 튀는 매력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작품을 읽고 난 뒤 가장 맘에 드는 등장인물을 하나 고르라면 나는 '수잔 루비에'를 고르겠다.
소설 속에서 수잔은 가난한 하층민 출신이며 특별히 아름다운 외모도 아니다. 그래서 그녀는 스스로 결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느 날 화가가 함께 파리로 가서 살자고 제안하자 그녀는 그를 따라간다. 그녀는 이렇게 자신의 현실적인 가치를 알았고, 기회를 잡을 줄 아는 여자였다. 그렇게 시작된 화가들과의 동거 생활은 그녀에게 큰 기쁨이 된다. 그녀는 화가들의 집안일을 살뜰히 챙기고, 모델로 일하며 화가들과 함께 어울리며 그들의 뮤즈가 되는 삶을 즐긴다.
"그림이라도 잘 그렸으면 말도 안해요. 미안하지만 당신이 날 사랑하든 말든 그런 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당신에게 재능이 없다는 사실이죠. 고국으로 돌아가 식료품 장사나 해요. 당신한텐 그게 딱이니까."
그러나 그녀가 모든 화가를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재능이 없는 화가를 만나면 그녀는 미련 없이 그를 떠났다. 문득 어쩌면 수잔은 남자를 사랑했다기보다 그들이 가진 예술적 재능을 사랑했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슷한 시기 파리에는 '수잔 발라동'이라는 유명한 여성 화가가 있었다. 서머싯 몸이 '수잔 루비에'라는 캐릭터를 창조할 때 '수잔 발라동'에게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 틀림 없단 생각이 든다. 수잔 발라동은 당시 세탁부 미혼모의 딸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여러 고된 일을 하며 자랐다. 서커스단으로 활동을 하다 부상을 당한 후, 생계를 위해 화가들의 모델 일을 하다가 나중엔 직접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결국 유명 화가로 성공을 거두었다.
<면도날> 속 '수잔'도 화가들과 동거하며 그들의 모델 일을 즐기다가 나중엔 직접 그림을 그려보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 이후 그녀는 더이상 화가들을 사랑하지 않는다. 대신 사업가 '아시유'와 결혼하게 된다. 아시유는 다른 화가들이 그린 수잔의 초상화를 보고 그녀에게 관심을 갖게 된 인물이다. 사업 수완 좋은 그가 갖지 못한 것은 '예술성'이다.
아시유 씨도 그녀를 격려해 주었다. 자신의 애인이 화가가 된다는 사실이 흡족했던 것이다. 그는 가을에 열리는 미술 전람회에 한 점을 출품하라고 부추겼고, 그리하여 그녀의 그림이 전시되자 둘 다 몹시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그녀에게 좋은 충고를 해 주었다.
"남자처럼 그리려고 하진 말라구. 그냥 여자처럼 그리면 되는 거야. 강하게 보이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어요. 매력적인 그림에 만족해야지. 그리고 솔직해져야 돼요. 사업에서는 교활한 수완이 성공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예술에서는 정직이 최선의 길이자 유일한 길이라구.
성공한 사업가인 그는 분명 사업가에게 필요한 자질, 교활함 따위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없는 것은 수잔의 거칠고 솔직한 매력과 예술적 감각이었다. 수잔은 예술을 추구하고 그 가치를 알아보는 여자였다. 그러나 수잔에게는 아시유가 가진 든든한 부와 안정이 없었다. 과거의 수잔은 예술적 재능이 없는 남자라면 아무리 잘 사는 남자일지라도 제발로 떠나버릴 만큼 예술적 자질을 중요하게 여겼다. 하지만 그녀가 모델에서 벗어나 스스로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순간, 그녀가 찾던 예술성은 더 이상 타인에게 있지 않았다. 그녀가 찾던 예술성은 그녀 자신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때서야 비로소 그녀는 아시유와의 결혼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처럼 사랑은 서로의 결핍을 향한다.
아시유는 수잔을, 수잔은 아시유를.
자신의 결핍은 상대의 매력, 즉 강점을 더 눈부시게 비추게 된다. 그로 인해 더 사랑하게 된다.
수잔은 아시유와의 관계에 뜨거운 설렘은 느끼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결혼 생활은 성공적일 것이다. 아시유는 수잔의 예술적 재능을 매력적으로 여기며 그녀를 지지하고, 수잔은 그 덕에 그간 보헤미안으로 살던 삶을 정리하고 삶의 안정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서로가 가진 가치를 인정하고, 서로가 갖지 못한 것을 채워주는 관계. 그런 점에서 두 사람은 꽤 괜찮은 부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