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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병인 Nov 11. 2022

제주의 우마도적은 변방으로 옮겨라

북쪽에 새로 개척한 4군 6진 지역에 안치

1433년(세종 15) 11월에 절도2범들을 전라도의 자은도·암태도·진도 등지에 안치하기로 정하고 7개월쯤 지나서, 제주도에서 검거되는 우마절도범 가운데 사노비는 주인에게 돌려보내고, 관노비는 육지의 변방에 안치하게 하였다. 땅은 넓은데 인구는 적은 평안도의 해변 고을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정착할 살아가게 해준 것이다(세종 16년 6월 14일).      


두 달 뒤에 제주 출신으로 예조참의를 지낸 고득종의 건의를 받아들여 정책을 수정하였다. 우마도살 전과가 2범인 자 이외의 우마절도범은 제주에 그대로 두어서 스스로 뉘우쳐서 예전의 마음을 회복하게 하고, 이후로 도둑질을 하는 자는 초범이라도 육지로 옮겨서 함길도 혹은 평안도의 먼 고을에 관노로 보내서 현지에 정착하게 한 것이다(세종 16년 8월 28일).      


4개월쯤 뒤에 계절이 한겨울인데 임금이 병조를 시켜서, 조정의 관원을 제주에 보내서 우마절도 2범 이상자를 색출해 평안도로 옮기게 하였다(세종 16년 12월 21일). 제주의 우마도적들을 변방으로 들여보낼 때, 그들이 통과하는 각 고을에 공문을 보내, 의복과 식량을 넉넉히 지급해 굶거나 떠는 자가 생기지 않게 하라고 지시를 내리고, 특히 부녀자와 아이들이 추위에 떨거나 끼니를 거르는 일이 없게 하라고 주의시켰다(세종 17년 1월 3일).     


제주에서 우마도살 재범자로 검거된 6백 50명 가운데, 단지 도살된 우마의 고기를 먹었을 뿐인 자들은 제주에 남겨두고, 소나 말을 훔쳐다 잡아서 팔아먹은 자들만 육지로 데려오게 하였다(세종 17년 1월 14일). 제주에서 데려온 우마도적들을 평안도 각 고을의 부유한 세대에 나눠주게 하였다. 어미와 자식이 서로 떨어지는 일이 없게 하고, 고공인(雇工人·고용직 기술자)의 예에 따라 역무에 종사시키도록 조치하였다. 나이가 많거나 질병으로 자활이 곤란한 자들에게 구호양곡을 지급하게 하였다(세종 17년 1월 22일).      


그런데 우마도적들을 육지로 옮기는 임무를 띠고 제주로 출발한 일행이 예상치 못한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 제주에서 검거된 우마절도 재범자들을 육지로 데려오기 위해 선박들을 거느리고 제주로 떠났던 사복 소윤 조순생 일행이 거센 풍랑을 만나 졸지에 중국으로 표류하거나 바다에 빠져 죽는 대참사가 벌어진 것이다.      


비보를 접한 임금은 급하게 대신들을 소집해 수습대책을 논의한 뒤에, 병조판서를 불러서, 제주에서 우마절도 재범자로 붙잡아서 이미 육지로 데려온 자들과 아직 데려오지 않은 자들을 처리하는 데 필요한 여섯 가지 지침을 내려주었다(세종 17년 3월 12일).     


그해 여름에 평조판서 신개가 전라도의 세 섬에 안치한 정책의 문제점을 낱낱이 아뢰고 절도 재범자들을 접경지역 여러 고을의 관노로 귀속시켜, 노는 토지를 나눠주고 가족과 더불어 생업을 꾸려가게 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윤허가 내렸다(세종 17년 8월 2일). 


그다음 해 6월 중순 이후로 검거되는 절도 재범자들은 처자와 함께 함길도의 경원 이남과 평안도의 희천 이남 각 고을의 영구 관노로 보내고 농토를 주어서 그곳에 정착하게 하였다(세종 18년 6월 15일).      


그 직후 임금이 앞서 제주에서 우마도둑으로 붙잡혀 변방으로 보내진 자 전원을 제주로 돌려보내려고 하였다. 이유는 타향에 억지로 끌려가서 힘겹게 사는 것이 가엾고 불쌍해서 그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다는 것이었는데, 대신들의 강력한 반대로 관철되지 않았다(세종 18년 6월 20일, 23일). 하지만 차마 모른 척할 수가 없었던지, 겨울철이 닥치자 형조에 특별구호를 지시하였다.       


지금 범죄자들을 처자와 함께 평안도와 함길도로 이주시키고 있는데, 현지의 수령들이 죄인이라는 이유로 보호와 구휼에 소홀하여 굶고 떨면서 지내는 일행이 많을 것이다. 이후로는 통과하는 관(館)과 역(驛)에서 식량과 의복을 충분히 주어서 죄인가족이 굶거나 떠는 일이 없게 하고, 또 그들이 도착하여 머무르는 고을에서 농토를 제공하고 구휼에 힘써서 생계에 어려움을 겪지 않게 하라(세종 18년 11월 17일).     


절도 재범자들 외에도 다양한 유형의 백성들이 양계(兩界)의 여러 고을에 강제로 들여보내졌다. 평안도와 함길도에 각각 4군과 6진을 설치하고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의 인구를 늘리기 위한 사민정책(徙民政策)을 적극 추진했기 때문이었다. 양계에 4군과 6진을 설치하기 이전인 태종 연간에도 사민정책이 시행되었다.      


두만강과 압록강 유역 등 여진족의 침범이 잦은 구영토의 회복을 위해 1432년(세종 14) 석막(회령)에 영북진 설치, 1433년(세종 15) 자성군 설치, 1435년(세종 17) 회령군과 여연군을 도호부로 격상하는 등의 조치와 더불어서, 최윤덕과 김종서를 시켜 양계지역에 4군과 6진을 개척하고 남쪽지방의 농민 등을 입거시켰다. 

     

처음에는 함경도 남부와 삼남지방(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백성들에게 농토와 주택 제공, 세금과 부역 면제, 관직 제수 등과 같은 특혜를 약속하고 가족 단위로 신청을 받아서 들여보냈다. 그런데 희망자가 필요한 만큼 채워지지 않자 강제로 대상자를 뽑아서 들어가 살게 하였다. 그 과정에서 차출을 피하려고 스스로 팔목을 자르거나 목숨을 끊는 드의 부작용이 생기고, 들어가는 도중이나 현지에 도착해서 도망쳐 달아나는 사례도 많았다.     


자연스럽게 위정자들의 시선이 만만한 범죄자들에게 쏠렸고, 종당은 도둑이 아닌 범죄자들도 처자와 함께 강제로 보내지게 되었다. 죄를 범하여 지방에 유배된 자는 모두 평안도의 여연이나 자성으로 보내 인구가 적어서 썰렁한 변방의 고을들을 채우게 하였다(세종 18년 5월 25일).      


나이가 70살을 넘었거나, 70세 이상의 부모 혹은 조부모가 있는데 봉양할 다른 자손이 없는 독자는 제외하였다(세종 26년 8월 5일). 그렇게 해서 양계에 강제로 입거된 인원이 모두 얼마나 되는지는 실록에 통계가 없어서 전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추측이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당시 호조에서 의정부를 통해 임금에게, ‘범죄를 저지르고 함길도 각 고을에 입거된 자와, 함길도를 벗어나 객지를 떠돌다가 돌아온 사람이 7천 6백 30여 명에 달하니, 일찍 수확하는 곡식이 익을 때까지 잡곡 2만 석만 내려달라고 청했다.’는 실록기사는 그 인원이 적지 않았음을 짐작케 한다(세종 28년 6월 17일). 


세종실록에 죄를 짓고 검거되어 변방으로 보내진 것으로 기록된 사례들을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일찍이 울산수령으로 있으면서 감수(監守)하던 돈과 양식을 도둑질한 이산두를 장 90대를 때린 뒤에 함길도 사진(四鎭)에 보내게 하였다(세종 21년 4월 18일).  


전라도 등지에서 유랑민 수백 명을 끌어모아 노예처럼 부리며 오랫동안 착취와 학대를 자행한 효령대군(세종의 차형) 집의 노비 네 명을 붙잡아, 특히 언동이 악랄하였던 두 명은 목을 베고 나머지 두 명은 처자와 함께 평안도에 입거시켰다(세종 21년 9월 11일).     


경상도 진주에 살면서 고을의 수령을 꾸짖고 욕을 퍼부은 정현령을 고향에서 쫓아내 함길도 회령진으로 이주하게 하였다(세종 22년 3월 9일).     


제주안무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제주도에서 절도 재범자로 검거되어 임시 관노로 배속된 공노비, 사노비, 평민들이 무리를 지어서 도적질을 일삼으니 평안도의 해변고을로 옮기게 하였다(세종 23년 7월 11일).     


접경지역에 입거해야 하는 범죄자와 내통 공모하여 범죄자가 외아들이라고 속인 이웃의 색장과 색리가 적발되면 범죄자 본인은 물론 색장과 색리까지 가족전원과 함께 양계에 입거시키게 하였다. 그중에 늙은 부모가 있는데 외아들인 사람은 병조와 소재관이 함께 장부에 기록해 두었다가, 부모가 죽으면 곧바로 들여보내게 하였다. 어버이가 죽었는데도 즉시 관청에 알리지 않은 자가 적발되면 절린의 색장도 함께 입거시키게 하였다(세종 28년 1월 3일).     


만호이던 부친이 죽어서 상중에 있는 선비라는 처녀와 간통하고 멋대로 음란한 행동을 자행한 허효동이라는 사내를 장형에 처하여 형을 집행한 뒤에 가족 전원과 함께 평안도의 무창군에 입거시켰다. 부친상 도중에 간통한 선비는 장형에 처하여 형을 집행한 뒤에 전라도 진도에 유배하였다(세종 29년 2월 19일).     


황해도 서흥에 살면서, 사람이 사람의 고기를 먹었다고 말을 지어내 퍼뜨린 김의정과 안의정이라는 두 사내를 가족 전원과 함께 변방의 고을에 입거시켰다(세종 29년 12월 23일).     


품관(品官)인 최기의 아내를 묶어 길 위로 끌고 나가서 때리고 욕설을 퍼부은 경상도 경주의 아전 최기를 《경제육전》의 원악향리(元惡鄕吏) 처벌조항을 적용해 사형에 처하는 대신 평안도 변방 고을에 있는 역(驛)의 아전으로 들여보냈다(세종 30년 8월 1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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