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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병인 Nov 10. 2022

절도2범은 외딴섬에 가둬라

법전에 없는 격리(隔離) 시행

1426년(세종 8) 2월 중순경 도성에 밤마다 화적들이 나타나 민가에 불을 지르더니, 도성에 큰불이 나서 막대한 피해가 발생하였다. 임금은 대소 신료와 군사들을 거느리고 강원도 횡성으로 강무를 가 있어서, 도성에 남아있던 왕비가 진화를 지휘해 불을 껐다.


황성의 강무장에서 소식을 접한 임금은 황급히 환궁하여 이재민 구호와 피해 복구에 주력하면서 대신들을 소집하여 향후의 치도(治盜) 문제를 토론에 붙였다. 화재의 원인을 명화도적(화적)들의 방화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영돈녕 유정현이 상습절도범들을 경기도 밖으로 추방하는 방안을 내놨다. 절도를 세 번 이상 범한 자는 먹물로 팔뚝에 죄명을 새기고(자자), 사면을 만나서 운 좋게 죄를 면한 자는 다시 신문을 진행하여 경기도 밖으로 쫓아내자고 한 것인데, 반대자가 없어서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세종 8년 2월 26일).

  

그런데 시행과정에서 갖가지 부작용이 드러났다. 첫째로, 붙잡힌 도둑들을 추방지로 옮길 때에 역참 관원(역졸)들의 감시가 허술하여 도중에 몰래 도망치는 자가 많았다. 둘째로, 목적지까지 도달한 자들도 대다수가 하루 이틀 내에 도망쳐 달아나서 다시 또 도둑질을 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지독한 가뭄에 따른 사면의 연속으로 날이 갈수록 도둑들이 준동이 심각한 상황으로 치달았다.       


7년쯤 시간이 흐른 뒤에도 전국 곳곳에서 도둑이 날뛰자 임금이 형조판서 정흠지에게 의정부 육조와 더불어서 도둑을 단속할 방법과 도둑을 없앨 수 있는 대책을 의논하여 아뢰게 하였다(세종 15년 10월 23일). 2주일쯤 지나서 정흠지가 의정부와 육조의 의견을 수렴한 결과를 아뢰었는데, 그 가운데 도둑들을 전라도의 외딴섬에 안치하는 방안이 들어있었다.      


영의정 황희가, 절도재범자들을 그들의 처자와 함께 바다 한가운데 외딴섬들인 전라도의 자은도·암태도·진도 등지에 나누어 안치하고, 관할하는 수령들로 하여금 엄중히 감시하면서 출입을 금하게 하는 방안을 제의한 것을 원안대로 보고한 것인데,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유사 이래 처음으로 범법자들에 대한 강제적 ‘보안처분(保安處分)’이 국가정책으로 채택된 것이다(세종 15년 11월 5일).      

절도재범자들이 수용되었던 외딴섬 3곳(자은도, 암태도, 진도)

그런데 오래지 않아서 문제점과 부작용이 나타났다. 암태도와 자은도에 가둔 인원에 비해 감시원이 턱없이 적어서, 그곳에 옮겨놓은 도적들이 패거리를 만들어 주민들의 소와 말을 훔쳐다 잡아먹고, 때로는 감시원의 생명까지 위협하였다. 진도에 안치한 도적들도 장차 집단을 이루어 감시원을 살해하고 배를 빼앗아 해적으로 변모할 가능성이 점쳐졌다(세종 17년 8월 2일).     


결국 세 섬에 안치한 도둑들을 북쪽 접경지역 각 고을의 임시 관노비로 보내서 노는 땅을 주어 처자와 함께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게 하고, 수령들로 하여금 그들의 출입을 엄중히 통제하게 하기로 정책을 바꿨다. 아울러서 이후로 서울과 지방에서 검거되는 절도재범자는 처자와 함께 함길도의 경원 이남과 평안도의 희천 이남 각 고을의 영구적 관노로 보내서 자립을 지원하게 하였다(세종 18년 6월 15일).      


이후로 세월이 10년 이상이나 흘러도 도둑의 준동이 계속되자 궁여지책으로 법전에 없는 단근(斷筋)과 경면(黥面) 같은 육형을 순차로 시행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나 말을 훔치는 도둑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자, 우마도둑이 검거되면 처자와 함께 국토 남쪽의 외딴섬에 가두는 정책을 부활시켰다. 「우마절도범처벌특례법」을 제정해, 우마절도는 2범부터 사형에 처하게 한 것인데, 그 내용에 우마절도법들을 외딴섬 세 곳에 나누어 안치하는 내용이 두 개 조항으로 규정되어 있었다(세종 29년 5월 26일).


첫째로, 우마절도 재범자는 장 1백대를 때린 뒤에 왼팔 아래쪽에 ‘도마(盜馬)’ 혹은 ‘도우(盜牛)’라고 새긴 뒤에 가족과 함께 거제 남해 진도 등지로 보낸다. 

둘째로, 처음으로 소나 말을 훔쳐서 죽인 자는 장 1백대를 때리고 오른팔 아랫마디에 ‘도살우(盜殺牛)’ 혹은 ‘도살마(盜殺馬)’라고 문신을 새긴 뒤에 가족과 함께 거제·남해·진도 등지에 안치한다.


훗날 수양대군이 왕으로 즉위한 뒤에는 도적의 아내들을 모두 붙잡아서 거제·남해·진도의 관노비로 영구히 붙이고, 이후로 도적의 아내는 모두 섬으로 보내게 하였다. 도둑인 남편이 붙잡히면 체포한 관원의 집에 돌을 던지고 욕설을 퍼부으며 보복을 하는 예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전에는 도적의 아내들이, 남편이 훔쳐 오는 장물로 풍족한 삶을 누리다가, 남편이 붙잡혀서 처형되면 다른 도적과 재혼하여 함께 도둑질을 하여도 눈감아주었었다(세조 3년 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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