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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병인 Nov 09. 2022

치도(治盜) 차질과 잔혹한 도둑사냥

세종치세 최악의 정책 실패

1. 사전물론(赦前勿論)      


1422년(세종 4) 5월 10일 부왕(이방원)이 56세로 죽어서 명실상부한 국왕이 된 세종은 즉위하면서 다짐한 '어진 정치'를 적극 펼쳤다. 그 첫 신호탄으로, 사형에 처할 절도3범을 가릴 때 ‘사후위좌(赦後爲坐)’원칙을 따르게 하였다. 이전까지는 초범이나 재범 후에 사면을 받은 적이 있어도 3범이 차면 사형에 처하던 것을, 사면 받은 전과는 따지지 말도록 치도(治盜)원칙을 전격 바꾼 것이다(세종 4년 12월 20일).          

물론사전→사전물론 사후위좌

예전에는 盜(도)의 유형을 절도·강도·도적·초적(草賊)·적도(賊盜)·간도(奸盜) 등으로 구분하고, 갖가지 ‘盜(도)’와 관련된 예방·단속·수사·재판·행형 등을 ‘治盜(치도)’ 혹은 ‘弭盜(미도)’라고 총칭하였다. 실록에서는 치도지법(治盜之法) 치도지방(治盜之方), 치도지책(治盜之策), 미도지방(弭盜之方), 미도지술(弭盜之術), 미도지법(弭盜之法), 미도지책(弭盜之策) 등으로 쓰였다.          


세종이 재위 4년 12월 20일에 단행한 파격적 혁신의 골자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절도 전과를 계산할 때 사면 이전의 범행은 따지지 말고(사전물론·赦前勿論) 사면 후에 저지른 범행만 합산하여 죄를 가하게(사후위좌·赦後爲坐) 하였다. 이전에는 중간에 사면받은 전과가 있어도 세 번이 차면 절도 3범으로 교수형에 처했던 것을, 절도를 한 번 혹은 두 번 저질러도 이후에 사면령이 있었으면 초범으로 간주하게 한 것이다.           


둘째는, 《대명률》 대신 《의형이람》이라는 법전을 따르기로 하였다. 이는 《대명률》이 비록 조선의 국법으로 채택되었어도 모든 조문을 그대로 적용하지는 않았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을 일찍이 깊게 탐구한 선구적 논문들이 꽤 있다.     


셋째는, 지방에서 붙잡히는 절도3범의 처리절차를 명백하게 정하였다. 임금의 승낙이 떨어지고 오래지 않아서 시행령이 갖춰졌다. 12월과 윤12월이 지나가고 새해로 접어들자마자, 임금의 결단으로 향후 사형을 면하게 될 절도3범의 자자 위치를 정했다.      


건국 초기에 국법으로 채택된 《대명률》에 절도 초범과 2범만 자자할 위치가 정해져 있고, 절도 2범이 사면으로 풀려나서 다시 절도를 저지른 경우는 자자할 곳이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형조의 건의대로, 좌우 팔뚝과 목덜미에 차례로 죄명을 새겨서, 사면 이전과 이후의 전과가 구분되게 하였다. 원(元)나라 역사서인 《원사(元史)》의 〈형법지(刑法志)〉에 의거, 절도 초범은 왼쪽 팔뚝에, 절도 2범은 오른쪽 팔뚝에, 절도 3범은 목덜미에, 절도횟수가 네 번을 넘어서면 목덜미의 빈 곳에 차례로 죄명을 새기게 하였다(세종 5년 1월 9일).          


의정부가 건의의 근거로 제시한 《의형이람》은 원나라 때 법전인 《대원통제(大元通制)》와 《지정조격(至正條格)》을 중국의 속어로 알기 쉽게 풀어 쓴 법률해설서다. 읽고 이해하기가 쉬운 장점이 있어서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까지 나라의 법체계를 갖추고 정비하는 데에 많은 참고가 되었다.          


《대원통제》는 원나라 영종 지치(至治) 3년(1323)에 반포된 율서의 이름으로, 각기 성립의 일부(日附)를 붙인 수많은 단행 법령과 판례들을 집대성한 것이다. 《지정조격》은 원나라 순종 지정(至正) 연간(1341∼ 1367)에 편찬된 법전으로,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국정운영에 폭넓게 활용되었다.               


짐작컨대, 세종은 공자의 가르침대로 법보다 덕을 앞세우는 정치를 펼쳐서, 중국의 전설 속 군주들인 요임금과 순임금의 치세처럼, 천하가 태평하고 백성들이 사는 즐거움(생생지락·生生之樂)을 누리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의외성’이라는 변수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우선, 많은 죄수들을 동시에 용서하여 한꺼번에 풀어주는 ‘사면(赦免)의 덫’에 걸려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둥지둥하였다. 나라의 경사, 명나라의 경사, 극한가뭄 등에 따른 사면의 반복으로 도둑이 가파르게 늘어나 백성과 신하들의 원성이 높아졌다.       


둘째는, 명나라 황제들의 요구로, 고려 공양왕 때부터 세종 14년까지 약 40년 동안 말 6만1천 필과 소 1만6천 두를 명나라에 수출하여 나라의 국방과 치안에 애로가 따랐다. 국내에 우마가 희귀해져 값이 치솟자 고수익을 노리고 남의 소나 말을 훔쳐다 잡아서 고기·가죽·뼈·내장 등을 팔아먹는 자들이 급격히 늘었다. 


2. 물론사전(勿論赦前)     


사후위좌 정책으로 도적이 가파르게 늘어나자 강경파 대신들은 예전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반복해서 청했고, 임금은 매번 핑계거리를 찾아내 신하들의 건의를 물리쳤다. 하지만 도둑들의 기세가 통제가 불능한 지경에 이르자 강경파 대신들이 법전에 없는 격리(離), 단근(筋), 경면(面) 등을 차례로 건의하여 모두 시행되게 하였다.      


단근과 경면을 쓰게 할 때는 성리학의 원조 격인 주자(朱子)의 귄위에 기대서 임금을 설득하였다. 그리고 이따금씩 《대명률》에 없는 입시(立市), 출향(黜鄕), 출향저택(黜鄕瀦宅) 같은 형벌을 건의해 관철시켰다. 입시는 통행인이 많은 곳에 사흘 동안 세워두는 것이고, 출향은 살던 고향에서 쫓아내는 것이고, 출향저택은 고향에서 쫓아내고 살던 집터를 파내서 웅덩이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결과는 백약이 무효였다. 섬이나 변방 오지에 격리시키면 탈출해서 다시 도둑질을 하고, 농토와 집을 주어도 소용이 없고, 발꿈치 힘줄을 두 번씩 끊어도 여전히 도둑질을 하고, 얼굴에 먹물로 죄명을 새겨도 역시 도둑질을 하였다. 보완대책으로, 파격적인 신고자포상제 도입, 불고자 엄벌, 자수자 면죄, 패거리 고발인 포상, 비밀신고보장 등을 시행하였지만 기대하는 결과를 거두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사후위좌(赦後爲坐)'를 포기하고 당초의 '물론사전(勿論赦前)'으로 회귀하니, 그 사이 23년의 세월이 흘렀다. 어떻게 해서든지 도둑을 한 명이라도 덜 죽이려고 절도재범자들을 전라도의 오딴섬에 가둬보기도 하고, 변병의 오지로 보내보기도 하고, 뒤꿈치 근육도 끊어보고, 먹물로 얼굴에다 죄명을 새겨봐도 계속해서 도둑이 늘어나자 어쩔 수 없이 온정주의를 버리고 강경주의로 돌아간 것이다(세종 27년 7월 5일).        

물론사전←사전물론 사후위좌

역부족을 인정하고 정책의 회귀를 재가한 임금의 심정이 홀가분하였을 리가 만무하지만, 도둑이 밤낮으로 늘어나는 상황이라 신하들과 머리를 맞대고 새로운 해법을 찾았다. 치열한 공방 끝에 고육지책으로「우마절도범처벌특례」를 제정하여, 2회 이상 소나 말을 훔쳐서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소나 말을 훔치기만 하고 죽이지는 않은 도둑들은 예전처럼 외딴섬 세 곳에 격리하게 하였다. 특례의 골자는 두 가지였다(세종 29년 5월 26일).     


첫째로, 우마절도 재범자는 장 1백대를 때리고 왼팔 아래쪽에 ‘도마(盜馬)’ 혹은 ‘도우(盜牛)’라고 새겨서 가족과 함께 거제·남해·진도 중 한 곳으로 보낸다. 

둘째로, 처음으로 소나 말을 훔쳐서 죽인 자는 장 1백대를 때리고 오른팔 아랫마디에 ‘도살우(盜殺牛)’ 혹은 ‘도살마(盜殺馬)’라고 문신을 새겨서 가족과 함께 거제·남해·진도 중 한 곳으로 보낸다.     


3. 일망타진(一網打盡)     


두 달 뒤인 세종 29년 7월부터 ‘우마절도범처벌 특례’가 시행에 들어가니, 살벌하고 무자비한 도둑사냥이 시작되었다. 이후로 불과 28개월 사이에 도둑 524명이 붙잡혀서 처형되었다. 오랫동안 도둑질을 반복하고서도 연달은 사면 덕분에 전과기록만 남기고 사형을 면했던 도둑들이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린 것이다.              

절도 초범인데도 처형된 8명은 자신을 체포하려는 관원에게 항거한 7명과 궁중절도범 1명이다. 결국 세종 29년부터 3년 동안 무더기로 처형된 자들은 대부분 도둑(강도+절도)이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갑자기 도둑들을 엄히 다룬 이유는 치도(治盜)에 중대한 차질이 생겨서 공권력으로 통제가 곤란한 수준까지 도독이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무자비한 도둑사냥이 28개월 만에 갑자기 멎은 이유는 연달은 사면 때문이었다. 세자 환후, 명나라 황제 교체, 임금 환후 등으로 불과 3개월 반 사이에 세 차례의 사면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금이 끝내 기력을 되찾지 못하고 마침내 숨을 거두자, 사형집행이 정지되고 도둑사냥도 따라서 멎은 것이다. 


바둑에 비유하자면, 세종의 사후위좌(赦後爲坐)' 실험은 당초의 '선의(善意)'와 상관없이 민망한 패착(敗着)이면서 뼈아픈 자충수(自充手)로 귀결되었다. 패착은 그곳에 돌을 놓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 판에서 지게 된 아주 나쁜 수를 말하고, 자충수는 자기의 수를 줄여서 상대방을 유리하게 하는 수를 말한다. 일상에서는 스스로 한 행동이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됨을 비유적으로 이르며 '자업자득(自業自得)'과 동의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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