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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병인 Nov 07. 2022

압사 참사와 책임자 재신임 패턴

용산의 군자감 건물 붕괴참사 수습 

지금으로부터 593년 전인 1429년(세종 11) 가을에 서울에서 붕괴 사고가 발생해 40명 가까운 승려가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세종 11년 9월 15일). 용산의 강상(江上)에 위치한 군자감의 건물이 기울어져 나라에서 승려들을 동원해 바르게 세우려다가 관원들의 부주의로 5명이 압사하고 30여명이 다치는 참극을 부른 것이다. 


보고를 접한 임금은 즉시 특명을 내려서 의원을 파견해 부상자들을 구료하게 하였다. 그다음 날은 희생자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뜻으로 아침 조회를 비롯하여 윤대와 경연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공식 일정을 멈추고, 의금부 제조 이맹균에게 철저한 진상조사를 지시하였다.

     

군자감 공사의 감역관인 판사 김재·판관 최약지·직장 김자남 등이 공사 감독을 소홀히 하여 사람을 깔려서 죽게 하고서는, 깔린 사람들을 즉시 구료하여 살리지 않고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또, 부정 황보규, 주부 유상영과 정양, 직장 민건, 녹사 최복해 등은 기운 건물을 바로세우는 작업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으니, 모두 잡아다 국문하고 감역 제조인 공조판서 오승과 전 판목사 우균도 구금하라. 또, 처음에 건물을 지을 때 토목과 건축을 제대로 하지 않아 건물이 기운 것이니, 신축할 당시의 공사 책임자들도 모두 가두고 국문하라(세종 11년 9월 16일).  


그다음 날은 의금부 제조 이맹균에게 군자감 관리들이 직무를 태만히 하고 직무를 유기한 행태를 일일이 일러주며 그 연유를 엄히 추국하여 결과를 아뢰게 하였다. 임금이 군자감 관리들의 잘못으로 지적한 사항은 크게 네 가지였다(세종 11년 9월 17일). 


첫째로, 옆으로 기운 집을 바로세우려면 마땅히 장비를 갖춘 뒤에 조심해서 작업을 진행해야 하는데, 군자감 관리들이 장비를 갖추지 않고 작업을 하다가 건물을 무너뜨렸다. 


둘째로, 무너져내린 건물잔해에 인부들이 깔린 것을 알면서도, 옥에 갇히게 될 것이 두려워, 즉시 구료하지 않고 현장을 떠나서 살 수 있었던 자들까지 죽게 하였다. 


셋째로, 건물이 붕괴된 현장을 떠나고 나서는, 먼 거리를 걸어가기가 싫어서, 다시 공사장으로 되돌아가 건물잔해에 깔린 인부들을 구조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넷째로,  공사를 감독해야 할 관원들이 모여서 술판을 벌이다 몹시 취해서 건물잔해에 깔린 인부들을 방치하여 여러 사람이 죽거나 다치는 참사가 발생한 것이 틀림없다


이맹균에게 엄정한 국문을 지시한 뒤에는, 지신사 정흠지로 하여금, 군자감에서 부상한 승려들의 명단을 속히 지방에 알려서 그들의 본가를 보살피게 하였다. 또, 마침 태평관 건립에 투입되었던 승려들이 추위에 떨 것을 염려하여,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감독을 철저히 할 것을 지시하였다.


일주일쯤 뒤에 의금부에서 국문을 마치고 공사 감역관이던 판사 김재 등 3인을 장 1백대에 노역 3년에 처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김재를 엄벌에 처할 수 있는 법조문을 다시 찾아서 아뢰게 하였다. 다른 관청의 관원이 건물이 넘어져 사람이 깔린 것을 보고도 구조하지 않았다면 직임 밖의 일이라 죄가 다소 가벼울 수도 있겠지만, 건물잔해에 깔린 사람들을 방치하여 여러 명이 죽거나 다치게 한 공사 책임자에게 장 1백대와 노역 3년은 너무 가볍다는 것이었다. 


김재 등은 마땅히 구출해야 할 직책에 있으면서도, 사고현장까지 먼 길을 걸어가기가 싫어서 사람이 깔린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체하고 구조하지 않은 죄가 무거우니 법조문을 다시 점검해보라. 만약 딱히 적합하게 들어맞는 조문이 없으면 유사한 조문을 적용해도 무방하다(세종 11년 9월 24일).      


그런데 순간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지, 조금 뒤에 임금이 방금 전에 자신이 하였던 말을 스스로 뒤집었다. 딱히 적합하게 들어맞는 조문이 없으면 유사한 조문을 적용하지 말고 별도로 왕지(王旨)를 받아서 시행하라고 명을 내린 것인데, 3일 뒤에 의금부에서 김재 등 3인에게 '수레나 말로 사람을 살상한 죄'와 '장수가 굳게 지키지 않은 죄'를 적용해 각자의 형을 정하여 임금에게 재가를 청했다.

     

군자감 판사 김재ㆍ판관 최약지ㆍ직장 김자남 등이 건물이 무너져 사람이 밑에 깔린 것을 알고도 즉시 구조하지 않아서 죽거나 다치게 한 죄에 대하여는 '수레나 말로 사람을 살상한 죄'를 원용하여 장 1백대와 유배 3천리에 처하고 매장 비용으로 은 10냥을 추징하게 하소서. 또, 목재와 흙더미에 깔린 사람을 구조하지 않고 각기 흩어져서 서울로 달아난 죄에 대하여는 '장수가 굳게 지키지 않은 죄'를 적용하여, 김재ㆍ최약지ㆍ김자남을 각각 참형에 처하고, 황보규ㆍ유상영ㆍ정양ㆍ민건ㆍ최복해 등은 장 80대에 처하소서(세종 11년 9월 27일). 

     

임금은 의금부의 청을 따르는 대신 죄인들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주범인 김재 한 사람만 참형에 처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형을 감하거나 불문에 붙이게 하였다. 최약지와 김자남은 장 1백대에 노역 3년으로 형을 낮추고, 정양과 최복해는 3등을 감해주고, 황보규는 죄를 면해주고, 유상영과 민건은 공히 공신의 자손이라 죄를 면해주게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보름쯤 뒤에는 참형에 처했던 김재의 형을 특별히 감하여 장 1백대를 쳐서 반도의 남쪽 끝인 전라도 해남에 유배하였다. 김재가 태조 때부터 왕실의 신임이 두터웠고, 이때에 그의 장인인 조연의 병이 위급하자 임금이 조연의 조속한 쾌유를 비는 뜻으로 그의 사위인 김재의 목숨을 살려준 것인데, 임금이 관용을 베푼 보람도 없이 조연이 당일에 54세로 숨을 거뒀다(세종 11년 10월 11일). 


그런데 임금이 김재의 목숨을 살려준 데에는 다른 뜻이 었었던 모양이다. 3년 쯤 뒤에 여진족인 파저강의 이만주 무리가 평안도 여연을 침범하여 사람과 가축을 약탈해 달아나자, 임금이 토벌대를 파병하면서 해남에서 귀양을 살고 있던 김재의 유배를 풀어서 파저강 토벌대에 배속시켰다. 


김재가 승전(勝戰)에 기여하고 돌아오자 앞서 용산의 군자감 건물 붕괴 직후 회수한 그의 직첩을 돌려주었다. 같은 날 출정했던 장수들을 근정전에 초대하여 승리를 자축하는 자리에도 김재를 불러서 전공을 치하하더니, 일주일 뒤에 절충 상호군(정 3품)을 제수하였다(세종 15년 5월 26일, 6월 3일).   

  

같은 해 9월에는 경복궁의 강녕전을 수리하면서 김재에게 공사 감독을 맡겨서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주었다(세종 15년 9월 23일). 그뿐만 아니라 본인의 몸이 편치 아니하여 마침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나왔던 명나라 사신이 의원을 보내자, 김재로 하여금 그 의원을 대접하게 하였다(세종 15년 11월 3일). 그해 연말이 다가오자 김재를 전략적 요충지인 평안도 개천의 조양진(朝陽鎭) 첨절제사(종 3품 무관)로 내보내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울 기회를 주었다.


조양진 첨절제사 김재가 부임 신고를 위해 입궐하니, 임금이 인견하고 말하기를, "백성을 사랑하고 형벌을 신중히 다루라."라고 하였다(세종 15년 12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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