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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병인 Nov 06. 2022

음모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왜통사 피살사건 졸속수사 의혹

1. 서울의 역동과 청부살인 발생


세종이 국왕으로 즉위한 1418년 무렵의 한양은 사통팔달로 도로가 뚫리고 전국 각지로부터 각계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서로 협력하고 경쟁하는 역동의 도시로 변모해 있었다. 또, 사대교린 외교정책으로, 명나라인, 야인(여진부족), 왜인들의 왕래가 빈번하여, 나라에서 국적별 전용숙소를 정해서 운영하였다.


그런 가운데 사법당국의 감시를 피해서 몰래 외국인들을 접촉하여 불법무역을 행하는 자들이  생겼다. 내국인 상인 가운데 은밀하게 왜관을 출입하며 법으로 거래가 금지된 물품들을 몰래 사고 파는 자들이 자생한 것이다. 심지어는 법을 낮잡아보고 왜인과 결탁해 명주/비단/면포 등을 밀수출하는 자들도 있어서, 태형 50대에 속전(贖錢)을 허용하게 되어 있던 형벌의 수위를 《대명률》 수준으로 대폭 높였다.  


위반자는 장 1백대를 가하고 물건과 배와 수레를 몰수하게 하였으며,  외국인과 내통하여 서로 공모한 정황이 드러나면 간첩으로 간주해 엄벌로 다스리게 하였다(세종 3년 6월 9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의 흐름에 따른 인구증가와 더불어서 내외국인 간에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법을 어기는 자들이 급격히 늘었다(세종 7년  1월 5일, 15일, 24일).


그 외에도 사람들이 붐비는 길거리에서 함부로 말을 달려서 사람의 생 명을 상하게 하는 자가 많아서, 왕명을 속히 전하기 위해 급히 달리는 경우 외에는 모두 금지시키고,  과속으로 말을 달리다 사람의 목숨을 상하게 한 자는 3천 리 밖으로 내쫓게 하였다(세종 7년  4월 4일).


그런 상황에서 1429년(세종 11) 3월 하순의 야심한 밤중에 훈도방(지금의 서울시 중구청 인근)의 노상에서 왜관의 통역사 이춘발이 피살되었다(세종 11년 3월 23일). 임금의 특명에 따라 의금부가 수사를 벌여 범인을 잡고 보니 홍성부라고 하는 또 다른 왜통사였다. 홍성부가 김생언이라는 자를 통해 조직폭력배인 이득시와 간충을 매수해 이춘발을 죽이게 한 청부살인으로 드러난 것이다(세종 11년 3월 24일, 5월 7일, 12일)


2. 제보자의 완전범죄 개연성      


그런데 사건의 사법처리과정을 면밀하게 복기해 보면, 의금부의 수사진이 간교한 흉계에 속은 것 같은 인상이 짙어서 아쉬움을 떨치기 어렵다. 간악한 음모가 작용했을 개연성이 짙은데도 왜관의 통사 자리를 탐낸 또다른 왜통사에 의한 청부살인으로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의금부의 수사관들이 어리석게도 제보자 변상의 열한 음모에 감쪽같이 속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며, 의심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수사과정 전반이 더없이 허술하였다. 대표적으로, 이춘발이 훈도방 개천교 부근에서 괴한들에 의해 피살될 때 현장에 함께 있었던 이춘발의 종을 조사하지 않았다. 둘째로, 왜통사 홍성부를 살인 용의자로 제보한 왜인 귀화자 변상을 조사하지 않았다. 셋째로, 홍성부는 어떤 조건으로 김생언에게 이춘발살해를 부탁하였는지를 조사하지 않았다. 넷째로, 변상이 진범을 제보했는데도 현상금을 지급한 기록이 없다.              


실제로는 모두 조사가 이루어졌고 그 기록들이 모두 의금부에 있었는데 실록에 반영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설령 그렇더라도 사관들이 살인용의자를 제보한 변상을 조사한 기록을 뺀 이유는 수사진이 그에게서 어떤 특이점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인데, 사실은 의금부가 변상의 교활한 이간질에 감쪽깥이 속은 것 같은 예감을 떨치기 어렵다.        


특히 변상이 의금부 관원들에게 ‘이춘발이 홍성부와 사이가 나빴다.’고 말했다는 대목에서 치밀하게 계산된 음모의 그림자가 포착된다. 변상이 불법무역 같은 범법행위로 이춘발에게 덜미를 잡히자, 이간질 하는 말로 홍성부의 복수를 부추겨 이춘발을 죽이게 한 다음에 의금부에 성부의 범행을 알려서 성부까지 제거한 것 같은 의구심이 강하게 드는 것이다. 유력한 단서가 여섯 가지나 된다.     


첫째로, 이춘발은 태종 때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조선과 일본 사이의 외교 일선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태종 때는 일본에 건너가 앞서 왜구가 붙잡아간 동포 28명을 데려왔고(태종 8년 5월 12일), 세종이 즉위한 뒤로도 일본에서 사절단이 오면 통역을 담당하였다(세종 6년 1월 20일, 22일, 25일).

둘째로, 살인사건 수사의 첫 순서는 결과적으로 이익을 보게 될 사람을 알아내는 것임을 상기하면, 살인의 동기가 석연치 않다. 홍성부가 범행이 탄로나면 자기도 죽을 것을 알면서 고작 왜관의 통역사 자리를 탐내서 청부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      

셋째로, 변상이 성부를 용의자로 제보했다는 것은 그가 평소 두 사람과 공히 아는 사이였다는 뜻일 터인데, 춘발이 피살되고 보름이 지나도록 기다렸다가 제보를 한 이유가 매우 수상쩍다.

넷째로, 김생언의 진술에 의해 살인공모자로 몰렸던 ‘왜인의 종’ 보수가 조사를 받고 혐의를 벗은 대목이 매우 꺼림칙하다. 실록에는 생언이 수사에 혼선을 주려고 보수를 끌어들인 것처럼 적혀 있으나, 실제로는 변상의 하수인이었을 개연성이 다분하다.      

다섯째로, 변상은 귀화한 왜인이지만 조선의 물정을 훤히 꿰고 있었다. 그가 태조 6년(1397) 4월에 왜국의 장수로서 병선 24척을 이끌고 조선에 투항한 라가온(羅可溫)의 부하로 따라온 등현(藤賢)과 친했다는 사실은, 변상도 라가온을 따라와서 30년 이상(1397년-1429년)을 한양에 거주했음을 짐작케 한다(태조 6년 4월 27일, 세종 13년 10월 1일).      

여섯째로, 이춘발과 홍성부가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영의정 황희를 포함한 의정부의 고관들이 변상을 극도로 간사하고 교활한 자로 경멸하였다. 변상이 간악한 흉계를 꾸미고도 남을 인물이었음을 객관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다.


3. 변상의 행동거지와 평판      


이춘발과 홍성부가 함께 사라지고 2년 반쯤 뒤에, 변상이 같은 귀화 왜인인 등현(후지카타)의 집에서 등칠(藤七), 김원진 등과 술을 마셨다. 집주인 등현은 1397년(태조 7)에 라가온과 함께 조선에 귀화해 산원(散員·정8품 무관)이 된 인물이었다.      


등현은 조선에 귀화한 뒤로 나라에 헌신적으로 봉사하며 여러 가지 공로를 쌓았다. 1406년(태종 6) 1월 전라도의 바닷가에 왜구가 침입하였을 때 조정의 명을 받고 소탕에 앞장서 용감하게 무찔렀다.      


1419년(세종 1) 7월에 상왕이던 태종이 대마도 성주에게 항복을 압박하는 글을 보낼 때는 다른 일행과 함께 그 글을 가지고 대마도를 다녀왔다. 이를테면, 등현은 비록 귀화한 왜인이었지만, 조선 정부로부터 국가유공자 대접을 받는 거물이었다.      


등현이 거물이었음이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세종 8년 2월에 등현의 집에 방화로 추정되는 불이 나자, 임금이 친히 의금부제조를 불러서 수사상황을 물어보고 직접 용의자 2명을 지목하였다(세종 8년 2월 28일).


다음으로 등칠은 조선의 관리와 일본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나 일기주 주지(知主)의 집사가 되어서 조선을 드나들던 자였다(세종 10년 2월 2일). 마지막으로 김원진은 본래 조선인인데 일본에 귀화해 비전주(肥前州) 태수의 조선어통역관이 되어서 조선과 왜국을 왕래하던 자였다(세종 5년 3월 4일).      


그런데 이날 변상과 술자리를 함께 한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마음만 먹으면 어떤 음모도 쉽게 꾸밀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쉽게 간파알 수 있다. 게다가 그 무렵 나라에서 경상도 거제에 왜인들의 범법과 비행을 규찰하는 처치사를 두었는데, 변상이 그 원인을 원진이 조선정부에 요청하였기 때문이라고 몰아세운 사실이 예조에 알려졌다.      


예조에서 변상의 난언을 아뢰어 임금이 형조에 조사를 지시하니 변상의 아내가(조선여자였을 가능성이 높음) 남편의 죄를 용서해 주기를 청하는 상언을 올렸다. 임금이 의정부에 의견을 물으니, 영의정 황희·좌의정 권진·우의정 맹사성·찬성 허조·참찬 오승 등이 한목소리로 엄벌을 청했다.      


변상의 말이 극도로 간사하고 교활하였으니, 만약 죄를 면해준다면 후환이 따를 것입니다. 더욱이 사실관계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명백한데도 부인하고 승복하지 않으니, 혹독하게 고문을 가하여 후환이 없게 해야 될 것입니다(세종 13년 10월 1일).     


임금이 그대로 따랐는데, 변상이 4개월이 지나도록 자백을 거부하였다. 보고를 접한 임금은 변상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고 세 정승과 찬성 허조를 불러서, 변상에게 관용을 베푸는 방안을 토론에 부쳤다. 만약에 변상이 나라를 해치려고 하였다면 사형에 처해도 모자라겠지만, 자신이 원진의 이중 행동을 알아낸 공을 자랑하려고 한 것이면 용서해도 되지 않겠냐고 물은 것인데, 네 사람이 한목소리로 유배를 권했다.


의금부의 조사결과를 보니, 증거가 구비되어 변명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마땅히 법대로 사형에 처해야 하겠으나, 죄가 의심날 때는 가벼운 쪽을 좇는 것이 착한 임금의 형정(刑政)인 것이니, 한적하고 외진 곳으로 귀양을 보내 평생 출입을 금하게 하소서(세종 14년 3월 8일).     


그 이후 변상의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변상이 난언을 하던 날 함께 모여서 술을 마신 등현·등칠·김원진·변상 등 네 사람의 출신배경을 떠올리면, 변상이 이춘발에게 어떤 약점을 잡히자 이춘발을 제거할 목적으로 그럴듯한 거짓말로 홍성부의 분노를 유발해 둘 다 왜관에서 사라지게 하였을 개연성이 농후해 보인다.


이춘발과 홍성부가 사라진 뒤에 의정부의 고관들이, 등현의 집에서 변상이 김원진을 꾸짖었다는 말을 듣고 변상을 더 없이 간사하고 교활한 인간으로 폄하하였다는 기록을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영의정 황희를 비롯한 세 정승과 찬성 허조 등이 변상의 ‘비열한 음모’를 의심하였지만 증거가 없어서 귀양으로 응징한 것 같은 인상을 강하게 풍기기 때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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