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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병인 Jun 11. 2022

유시(諭示)

남형을 자제할 것을 호소한 교지

1. 교재 형식의 특별교지 반포     


평양부의 엽기적 고문치사 만행을 청취한 임금은 집현전과 승정원에 숙제를 독촉하였던 것 같다. 안숭선에게 어명이 내려지고 닷새 뒤에 급하게 <휼형(恤刑)교지>가 반포되었다. 임금이 친히, 옥사를 담당하는 관리들에게 형벌을 삼가라는 취지의 유시(諭示)를 교지 형식으로 지어서 전국의 형정담당 관리들에게 내렸다. 형벌의 남용을 막기 위해 서둘러서 취한 긴급처방이었다. 


단순히 형벌을 신중하게 쓰라고 당부하는 상투적이고 의례적인 명령이 아니라, 형정 일선에서 범죄 용의자들을 다루는 관리들에게 거의 사정하듯이 애절하게 신형(愼刑)을 호소한 것이었다. 왜통사 이춘발 피살과 남산기슭 벌아현의 승려초막 피습 수사 등 중국과 조선의 대표적 오판사례(형옥지변·刑獄之變) 열한 건을 자세히 소개한 뒤에 다음과 같은 여덟 가지〈옥송(獄訟)수칙〉을 하교하였다(세종 13년 6월 2일).     


■ 임금이 형정 담당자들에게 내려준 옥송수칙(8가지)

가. 속이 비칠 정도로 말끔히 마음을 비워라(精白虛心).

나. 자신의 생각이나 지식에 얽매이지 마라(無拘於一己之見).

다. 사람들로부터 들은 말을 그대로 믿지 마라(無主於先入之辭).

라. 남이 하자는 대로 따라서 부화뇌동하지 마라(毋雷同而効轍).

마. 오래된 인연이나 연고 때문에 고민하지 마라(毋苟且以因循).

바. 피의자가 말을 바꿔서 자백하였다고 기뻐하지 마라(勿喜囚人之易服).

사. 사법절차가 속히 종결되기를 기대하지 마라(勿要獄辭之速成).

아. 여러 방면으로 따져보고 반복해서 답을 찾아보라(多方以詰之 反覆以求之).     


사형선고를 받고 죽는 자들이 구천에서 원한을 품는 일이 없게 하고, 살아남은 자들로 하여금 마음속에 원한을 품는 일이 없게 하라고 하였다. 또, 모든 사람이 서로 기쁨을 나누어, 죄를 짓고 옥에 갇히는 사람이 없게 하여서, 따뜻하고 온화한 기운이 천지를 채워 비와 볕이 때맞춰서 적절히 내리고 쬐게 하라고 하였다. 


단지 교지를 반포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전국의 관아에 공문을 내려, 교지를 목판에 새겨서 관아의 벽에 걸어놓게 하였다(세종 13년 6월 12일). 또, 교지를 종이에 인쇄하여 중앙과 지방의 현직 관리, 종친, 5품 이상 문관, 3품 이상 무관에게 고루 나눠주었다(세종 13년 6월 19일). 교지를 달달 외울 정도로 숙지하고 반드시 그대로 따르라는 압력이었다.     


<휼형교지> 반포는, 즉위하여 13년 동안 남형을 없애려고 혼신의 노력을 쏟았는데도 성과는커녕 갈수록 적폐가 심해지는 기미가 보이자 고심 끝에 승부수를 띄운 것이라고 판단된다. 옛날의 왕들은 형벌을 잘못 쓰면 죄수들의 원통하고 억울한 마음을 하늘이 알아채고, 가뭄, 홍수, 역병, 반란, 왕실의 우환 같은 시련으로 임금을 견책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2. 신중한 형벌사용 신신당부     


<휼형교지>를 반포한 뒤로 전국 각지의 수령으로 임명된 관리들이 부임신고를 위해 입궐하면, ‘형벌을 신중하게 쓰라’는 당부를 빠뜨리지 않았다. 해가 바뀌어서 새해로 들어선 뒤에도, 지방으로 부임하는 수령들이 입궐할 때마다 형벌을 삼가라고 환기시켰다. 

   

근래에 각 고을의 수령들이 형벌을 함부로 하여 사람의 목숨을 해치는 경우가 상당히 많으니, 그대는 형벌을 조심해서 쓰도록 하라(세종 13년 11월 25일)      


형벌은 매우 중대한 일이니 가볍게 써서는 아니 되고, 부득이하게 형벌을 쓸 경우는 항시 조심하고 죄수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하느니라(세종 14년 1월 4일).      


형벌은 중대한 일이니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형벌을 쓸 때에 어느 관리가 적중을 잃으려고 하겠냐마는, 간혹 형벌을 남용하는 자가 생기는 것은 착오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부득이하여 형벌을 쓰더라도, 불쌍히 여기며 구휼하려는 마음(긍휼지심·矜恤之心)을 가지면 억울하게 죽는 자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세종 14년 1월 15일).      


근년에 수령들이 형벌을 과하게 써서(용형과중·用刑過重) 생명을 해치기까지 하는 일이 잦아서(누치상생·屢致傷生) 내가 상심이 크니, 수령의 본분을 잊지 말고 형벌을 조심해서 쓰도록 하라(신용형벌·愼用刑罰) (세종 14년 2월 17일).      


두 달쯤 지나서 승정원의 좌대언(좌승지) 김종서가 사형 집행을 재가해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형정의 어려움을 말하며, 임금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지방을 다스리는 수령들이 임의로 사람을 죽이는 적폐를 근절할 의향을 내비쳤다. 


죄인의 실정을 알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다. 과거의 사례들을 돌아보면, 제아무리 독하고 사나운 사람이라도 형옥(刑獄)에 들어가면 겁에 질려서 죄를 자복(自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말엽에 수령들이 제 마음대로 사람을 죽였으니 어찌 잘못 죽인 자가 없었겠는가. 법질서를 교란한 그런 행위를 언제부터 금지하였는가(세종 14년 4월 25일).


예조판서 신상이 '태조 때부터'라고 대답하였다. 하루 뒤에 각각 박천군 지사와 용천군 지사로 임명된 박전과 최안지가 하직인사를 하러 입궐하니, 평안도의 백성들이 그곳을 경유하는 사신들을 접대하느라 다른 도의 백성들보다 두 배의 고통을 겪는다며 각별히 신경을 쓰라고 당부하더니, 형벌을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형벌은 지극히 중대한 것이니 반드시 신중하게 써야 한다. 근래에 수령 가운데 형벌을 남용하여 백성의 생명을 해친 자가 있었으니, 그대들은 항시 형벌을 삼가고 조심하여 나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라(세종 14년 4월 26일).


이후로도 지방에 파견되는 수령들이 하직인사를 하러 입궐하면, ‘형벌을 쓰고 나서 그대로 지나치지 말고 되돌아보라.’ 거나, ‘생각이나 헤아림을 중단하고 마음을 고요하게 가지고서 형벌을 쓰라.’는 등의 당부를 빠뜨리지 않았다(세종 15년 1월 21일, 7월 18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정 일선에서는 가혹한 고문을 앞세워 무고한 백성에게 억지로 죄를 덮어 씌우는 적폐가 근절되지 않았다.      


3. 고문에 의한 살인범 조작


<휼형교지>가 반포되고 2년 남짓 지났을 무렵, 의금부에서 황해도 곡산에 사는 ‘약노’라는 양민 여인을 혹독하게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받아서 억지로 살인 혐의를 씌운 의혹이 불거졌다. 약노에게 적용된 혐의는 모종의 주문을 외워서 이웃 사람을 죽게 하였다는 것이었다.  


약노는 그때까지 무려 10년 동안을 옥에 갇혀 지내면서, 곡산 옥에서 11차례 고문을 당하고, 의금부로 옮겨와서도 15차례나 고문을 당해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주문을 외워서 이웃 사람을 죽게 하였다는 약노의 혐의는, 그녀가 매질을 견디다 못해서 살해도구를 말하지 않아도 되는 수법을 허위로 꾸며댄  것이었다. 


따라서 의금부의 수사진이 약노의 진술을 검증하려고 닭과 개를 가져다가 약노에게 주문을 외우게 하였지만 닭도 개도 죽기는커녕 호흡과 움직임이 멀쩡하였다. 하지만 약노가, ‘여러 해 갇혀 있어서 주문을 받는 귀신이 달아났다.’ 고 둘러대자, 의금부의 수사진이 의심하지 않고 살인죄를 적용해 임금에게 사형을 청했다.  


수사기록을 읽어본 임금은 의금부의 청을 따르지 않았다. 주문을 외워서 사람을 죽게 하기는 불가능할뿐더러, 오래 갇혀 있어서 주문을 받아주던 귀신이 달아났다는 약노의 진술도 믿을 수가 없다며, 좌부승지 정분을 두 차례나 의금부에 보내 약노를 직접  면담케 하여, 마침내 약노가 자포자기하고 스스로 살인혐의를 사실을  밝혀냈다(세종 15년 7월 19일).  


한 달쯤 뒤에 안음 현감 박서가 부임신고를 하러 입궐하자, “간혹 형벌을 과하게 쓰는 자들이 있으니, 무고한 자에게 억지로 죄를 씌우는 일이 없게  하라.”고 주의를 주었다(세종 15년 8월 16일). 이날을 포함하여 그해 연말까지 모두 16회에 걸쳐서, 부임신고를 위해  입궐하는 수령들(부/목/군/현의 통치자)에게 형벌을 삼가라고 상기시켰다. 그다음 해에도 부임신고를 위해 입궐한 수령에게 22회에 걸쳐 신형(愼刑)을  당부하였다.           

임금이 지방관들에게 휼민신형(恤民愼刑)을 당부한 내역

위의 < 그림 〉은 세종이 보위에 있으면서 부·목·군·현의 통치자로 임명된 관원들을 친견하고 ‘형벌을 조심해서 쓰라.’고 당부한 내역을 집계한 것으로, 재위 9년부터 25년까지 17년 동안 모두 111회에 걸쳐서 221명에게 신형교육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 번에 적게는 1명부터 많게는 11명까지 인견하고 신형을 당부하였다. 약노 사건이 있었던 재위 15년부터 17년까지 3년 동안은 모두 66회(월평균 1.8회)에 걸쳐서 129명에게 ‘휼민신형(恤民愼刑)’을 훈육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정 현장에는 피의자의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가혹한 고문이 끊이질 아니하여 임금이 골머리를 앓았다. 


4. 강도용의자 14명 고문치사  


재위 28년 3월에 왕비(소헌왕후)가 죽어서 7월 19일에 대모산의 영릉에 장사 지내고 3개월 있다가, 임금이 평안도 감사에게 밀지를 내려서, 도적떼들이 연합을  이루기 전에 신속히 제압할 방도를 마련하여 사람들이 모르게 비밀리에  아뢰게 하였다. 


평양 토관 사옥서 영 김간이 한양에 올라와, 평양 인근의 대성산에서 도적의 무리가 갑옷을 갖춰 입고 병기를 소지한 상태로 공공연히 돌아다니며 강도짓을 자행한다고 아뢰었기 때문이었다. 김간의 보고 중에는, 관청에서 체포대를 보내면 감영의 아전과 구실아치들이 곧바로 정보를 알려줘서 도적들이 재빨리 숨는다는 내용도 있었다(세종 28년 10월 17일). 


해가 바뀌어서 계절이 봄철로 접어들자 전국 각지에서 도둑들이 법 무서운 줄 모르고 기고만장하는 상황이 벌어졌던 모양이다. 도둑이 얼마나 극성을 부렸으면, 왕비(소헌왕후)가 묻힌 영릉 재실의 유기 그릇과 구리 그릇이 모두 사라져, 임금이 형조/의금부/한성부에 명을 내려, 광주/과천/용인 등지를 순행하며  범인을 붙잡게 하였다(세종 29년 3월 6일).  


평안도 대성산의 도적들도 여전히 기세가 꺾이질 않았다. 그해 한 번만 일시적으로 세력이 커진 것이 아니었다. 해마다 흉년이 들자 각지의 좀도둑들이 대성산으로 숨어들어, 인원을 나누어 대오를 지어서, 갑옷을 입고 칼을 차고 활과 화살을 소지하고 다니며, 백성의 가옥을 불사르고, 사람을 살해하고, 재물을 강탈했다.  


관아의 아전과 노비들과 결탁하여, 관청에서 잡으려고 하면 은밀히 연락을 통했다. 설상가상으로 개성부의 청석동에도 도둑의 무리가 은거해 있으면서 때때로 인근에 출몰해 약탈을 저질렀다. 임금이 상황을 심각하게 여기고 두 번이나 체포를 독려하여 어렵사리 40여 명을 검거하였는데, 관원들의 기강해이에서 비롯된 대형 악재가 터졌다(세종 29년 3월 19일). 


처음에 평양부에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검거된 도적들을 곧바로 신문하지 않고 오래 시간을 끈 것이 화근이었다. 여러 고을에 나누어 가둬둔 40여 명의 도적 가운데  평양부의 옥에 갇혀 있던 20여 명이 대낮에 옥졸들을 때려눕히고 탈옥을 한 것이다. 그런데 그중 9명을 붙잡아 옥에 남아있던 자들과 함께 고문을 하는 과정에서 무려 14명이 사망하였으니, 평생을 남형과 싸워온 임금으로서는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틀림없이 고문치사를 저지른 관원들을 업벌에 처했을 것인데, 유감스럽게도 실록에 아무런 정보도 보이질 않는다. 대신, 혹독한 매질을 견디고 목숨을 부지한 13명을 전원을 법에 따라 참형에 처하고, 도적들로부터 뇌물을 받고 그들의 귀와 눈이 되어준 평양부의 형방주사 손효숭도 목을 벤 기사만 보인다(세종 29년 5월 12일). 


또, 비록 실록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남형을 없애보려고 평생 동안 혼신의 힘을 쏟았던 세종의 마음을 헤아려놓은 기사가 단 한 줄도 없지만, 상식 수준에서 추정해보더라도, 말할 수 없는 허탈감과 더불어서 공뤈력의 탈선을 막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뼈저리게 느꼈을 게연성이 매우 높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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