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장불과본죄법 시행과 폐기
1. 남형금지와 제도적 장치 모색
세종 재위 12년째 해 6월 중순경, 밤중에 횃불을 들고 떼를 지어 다니며 도둑질을 일삼은 무리 여덟 명이 법에 따라 참형에 처해졌다(세종 12년 6월 17일).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면으로 전과를 용서받고도 절도를 세 번 저지른 고음삼이라는 자가 교수형에 처해지더니 형조에 두 가지 어명이 내렸다(세종 12년 9월 5일).
첫째. 죄수의 형벌을 감할 수 있으면 감해주라.
둘째. 절도 용의자를 신문할 때 정해진 규정과 기준을 어기는 일이 없게 하라.
두 달쯤 뒤에 다시 또 중앙과 지방의 관아에 절도 용의자를 신문할 때 반드시 법규를 지키라는 공문을 하달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형정 일선에서 절도 사건을 수사하는 형관들이 갖가지 이유로 형벌권을 남용한다는 소문이 자자했기 때문이었다.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이 절도 용의자를 신문할 때, 전후에 범행한 내역이 자세히 밝혀졌는데도 소행을 괘씸히 여겨 함부로 신장을 가하거나, 사실관계를 속히 알아낼 욕심으로 형장 규정을 어기거나, 혹은 도주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장기간 가두고 괴롭혀서 죄수가 생명을 잃는 경우가 있다고 하니, 중앙과 지방에 공문을 내려 죄수들을 가혹하게 다루지 못하게 하라(세종 12년 10월 28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리들이 죄의 경중을 구별하지 않고 걸핏하면 용의자들을 형틀에 묶어 놓고 고문을 한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중앙과 지방의 형정담당 관원들에게 다시 또 형벌을 신중히 쓰라고 공문을 내렸다(세종 12년 11월 27일).
불과 나흘 뒤에 정사를 보다가 다시 또 좌우의 신하들에게, 고문 과정에서 일어나는 남형 병폐를 거론하였다. 먼저 법정형이 태형(회초리 매질)인 죄를 범한 자에게도 함부로 신장(방망이 매질)을 가하여 때때로 부상자가 생기는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그런 다음에, 예전에 신장의 횟수를 장차 용의자에게 적용될 죄의 법정형 이내로 제한한 신장불과본죄법(訊杖不過本罪之法)이 시행되었던 일을 거론하며, 《대명률》에 태형의 죄를 저지른 자에게 신장을 가하는 것을 금지한 조문이 없는 것을 아쉬워하였다.
이조판서 권진이 말을 받기를 신장불과본죄법을 시행하는 것보다 형조의 관리들이 각자 알아서 신장을 함부로 가하지 않게 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 법을 시행하면 범죄 용의자들이 매질의 한계횟수까지 고통을 꾹 참고 견디며 범행을 숨길 것이라고 말하자, 임금이 회의감을 나타냈다.
형조의 관리들만 법을 집행하는 것이 아니고 지방의 수령들도 모두 형벌집행권을 갖고 있으니, 법을 세워서 모두 남형을 자제하게 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세종 12년 12월 1일).
의정부 찬성 허조가 형식 논리를 앞세워 반대를 표했다. 그 법이 설령 훌륭하다 할지라도 《대명률》에 없는 법을 함부로 시행할 수는 없다고 말하자, 임금이 그 말을 받아들였다. 신장불과본죄법을 제정할 마음을 먹었다가, 강직한 신하가 반대를 표하자 즉석에서 생각을 바꾼 것이다.
《대명률》은 죄의 경중을 참작하여 형벌의 등급을 정해놓은 것이라서 어길 수가 없다. 중국에서 법전에 없는 형벌을 쓰는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한시적인 임시방편에 불과할 뿐이다. 황제가 내린 교서에 ‘법전에 없는 형벌에 처한다.’고 적힌 문구가 바로 그런 것이다(세종 12년 12월 1일).
그다음 달인 윤12월부터 6개월 동안 중앙과 지방에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가혹행위가 연쇄적으로 발생하여, 임금이 다급하게 형벌을 신중히 쓰기를 호소하는 <휼형(恤刑)교지>를 반포하였다(세종 13년 6월 2). (이에 대하여는 뒤에서 별도로 자세히 살피기로 하고, 여기서는 신장불과본죄법을 중심으로 논의를 펼쳐보겠다.
2. 신장불과본죄법 토론과 채택
5개월쯤 뒤에 형조에 명을 내려, 전년 12월 1일에 신하들 앞에서 말을 꺼냈다가 권진과 허조의 반대로 거둬들인 신장불과본죄법을 시행하는 방안을 토론에 부쳤다. 관원들이 쉽게 자백을 얻을 생각으로 태죄 용의자에게 거리낌 없이 신장을 가하는 적폐를 없애기 위해, 신장의 횟수를 용의자가 범한 죄의 법정형 이내로 제한하는 법을 제정하기 위함이었다.
《당률》에, ‘죄수에 대한 고문은 세 차례를 넘으면 안 되고, 한 번에 신장을 2백회 이상 가하면 안 되고, 장죄 이하 용의자에 대한 신장은 그 범죄의 법정형을 넘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또, 그 주석서인 《당률소의》에, ‘태 10대부터 장형 사이에 해당하는 범죄 용의자가 자백을 거부하여 부득이 고문을 해야 할 경우는 법에 정한 태형과 장형의 횟수를 넘으면 안 되고, 도죄 용의자는 신장을 2백대까지 가하도록 범행을 자백하지 않으면 보방으로 풀어준다.’고 하였다.
그런데도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이 범죄 용의자를 고문할 때, 지은 죄의 법정형을 초과하여 매질을 가하는 것은 죄를 신중하게 심의해야 하는 뜻에 어긋나는 것이다. 앞으로는 도죄(노역) 이상의 중죄 용의자를 고문할 때를 제외하고, 태죄 혹은 장죄 용의자를 고문할 때는 장차 적용될 죄의 법정형 이상의 매질을 못하게 하면 어떻겠는가. 의정부와 여러 관청의 의견을 수렴하여 아뢰도록 하라(세종 13년 11월 5일).
한 달 반쯤 시간이 지나서 신장불과본죄법을 시행하라는 명이 내렸다. 형정현장에서 남형 악습이 사라질 기미가 보이질 아니하자 신장불과본죄법을 채택한 것인데, 실록에 의견을 수렴한 결과에 관한 정보가 없는 것으로 미루어, 반대자가 많았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형벌이 태형(笞刑)이나 장형(杖刑)에 지나지 않는 죄의 용의자를 고문할 때에 그 사람에게 선고될 태형이나 장형의 횟수보다 더 많이 매를 때리는 것은 죄인을 신중히 다뤄야하는 뜻에 위배되는 것이다. 앞으로는 도죄(노역) 이상의 중죄 용의자를 고문할 경우를 제외하고, 태죄 혹은 장죄 용의자를 고문할 때는 장차 적용될 죄의 법정형 이상의 매질을 가하는 일이 없게 하라(세종 13년 12월 20일).
법이 채택됨으로써 도죄(노역) 이상의 중죄 용의자를 고문할 경우를 제외하고, 태죄나 장죄 용의자를 고문할 때는 장차 적용될 죄의 법정형 이상의 매질을 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하면 남형이 억제될 것으로 여기고 오랜 숙고 끝에 채택한 정책이었다.
3. 도둑득의 역이용과 효력정지
그런데 신장불과본죄법은 태생적인 헛점을 안고 있었다. 고문 과정에서 신장을 가하게 되면 그 횟수를 형량에서 빼줘야 하는 법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고문을 하더라도 신장을 한 번에 30회까지만 때릴 수 있게 제한한 법이 이미 시행되던 상황이라, 절도 혐의로 검거되는 자들마다 잔쬐를 부렸다. 두 차례의 신장(30대X2회)을 꾹 참고 견뎌서 법정형(60대)을 채우고 전과가 남는 것을 피한 것이다.
그 결과 상습절도범이 검거되어도 전과기록이 없어서 번번히 초범으로 처벌되니 도둑들이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는 풍조가 확산되었다. 게다가 연속적 가뭄과 빈번한 사면으로 인해 날이 갈수록 도둑이 기승을 부리자, 신장불과본죄법을 없애자는 주장에 무게가 실렸다.
그런 상황에서 세종 재위 17년 6월에 형조판서 신개가 임금에게 올린 도둑방지종합대책(안)」을 올리면서, 그 첫 번째에, 훔친 증거가 명백하면(장증명백·贓證明白) 법정형 이상의 신장도 가할 수 있게 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 말은 곧 형정담당 관원들이 수사를 빌미로 신장을 남용하는 적폐를 없애기 위해 제정한 신장불과본죄법을 폐기하라는 건의를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만약 첫 번째 제안이 채택된다면 신장불과본법이 더 이상 남형을 막는 데 도움이 안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장물증거가 명백한 경우’라는 조건이 붙기는 하였으나, 그 조건이라는 것은 관원들이 가져다 붙이기 나름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대신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자신도 오래 고심을 거듭한 끝에 신개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형정 담당 관원들이 용의자로부터 쉽게 자백을 받기 위해 함부로 신장을 가하는 폐단을 막으려고 신하들의 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1년을 뜸 들여서 시행한 정책이 불과 4년 만에 정지된 것이다.
이후로 절도 초범들이 전과를 남기지 않으려고 두 차례 신장을 견뎌서 법정형을 채우고 풀려나는 수법은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으나, 본인이 우겨서 법을 제정한 임금으로서는 뒷맛이 씁쓸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하들을 대하기가 민망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