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세종실록 산책-온고지신(溫故知新)

1. 온고지신(溫故知新)

by 조병인

세종은 친가와 외가의 혈통이 좋았으니 나기를 비범하게 태어났을 개연성이 높다.

태생이 그런데다 어릴 적부터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수불석권·手不釋卷) 학문을 좋아해서 싫증을 느끼지 않았다(호학불권·好學不倦).


한마디로 세종의 성공비결은 광폭의 독서와 적극적 소통이었다.


독서의 진정한 가치는 과거의 일을 통해 현재의 삶에 필요한 지혜와 슬기를 얻는 데 있다. 책에 미래 이야기가 담겨 있어도 읽는 시점에서는 저자가 과거에 생각한 것을 읽는 것이다.


세종은 독서를 통해 옛것을 익히고 그로부터 새것을 아는 온고지신에 진심이었다. 꾸준한 독서로 옛것을 통해 새것을 알고 신하들도 똑같이 따라 하게 만들었다.


어린 왕자 시절 식사를 하거나 몸이 아파서 누워있을 때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아 '책벌레', '독서광', '활자중독' 같은 별명을 달고 다녔다.


아버지 태종이 아들의 건강을 염려해 어린 내시에게 왕자 방의 책들을 모두 감추게 시키자 구소수간(歐蘇手簡)이라는 책을 몰래 빼돌려 이불속에 숨겨 놓고 달달 외우도록 읽었다.


구소(歐蘇)는 옛날 중국의 송(宋)나라 때 과거시험 책임자였던 구양수와 과거시험에서 장원급제한 소동파(소식)이고 수간(手簡)은 서찰(편지)이다. 구소수간은 구양수와 소동파가 각기 지인들과 주고받은 서찰 중에서 명문장들을 추려서 엮은 책이다.


열일곱 살이었을 때 세자를 가르치는 서연관에서 《효행록》에서 내용을 뽑아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찬(贊)과 권근(權近, 1352∼1409)의 주(註)를 써서 병풍을 만들었다. 세자가 동생인 충녕대군에게 해석을 시키니 즉석에서 매우 정성스럽고 자세하게 풀이하였다(태종 13년 12월 30일).


대군이 스무 살 되던 해 2월 임금이 태종이 왕자들에게 말하기를, “집에 있는 사람이 비를 만나면 반드시 길 떠난 사람의 노고를 생각할 것이다.” 하였다.


대군이 듣고 있다가 “《시경》에 이르기를 ‘황새가 언덕에서 우니 부인이 집에 서 탄식한다’ 하였사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태종은 기쁜 마음을 감추지 않고 “세자가 따를 바가 아니로다.” 하였다(태종 16년 2월 9일)


세자가 일찍이 부왕인 태종 앞에서 사람의 문무(文武)를 논하다가 “충녕은 용맹하지 못합니다.”라고 말하자 태종은 도리어 충녕의 강점을 치켜세웠다.


충녕이 용맹하지는 못한 듯하나 큰일에 임하여 심히 우려되는 일을 결단하는 데에는 당세에 견줄 만한 사람이 없다(태종 16년 2월 9일)


2년쯤 뒤에 일곱 살 아래인 성녕 대군이 병에 걸리자 의약서적을 펼쳐보고 손수 처방전을 썼다. 병이 날로 심해지자 청성군 정탁이 《주역》으로써 점을 쳐서 태종에게 올렸다.


대군이 그 뜻을 명쾌하게 풀이하니 세자가 마음으로 감복하고 좌우 신하들이 모두 감탄하여 칭찬하였다(태종 18년 1월 26일).


안타깝게도 동생은 며칠 뒤에 결국 세상을 떴지만 스물두 살 때 벌써 의약지식이 풍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4개월쯤 뒤에 태종이 15년이나 세자 수업을 받은 장남 제(禔)를 폐하고 삼남 도(祹)를 새 세자로 세우면서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충녕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몹시 추운 때나 몹시 더운 때를 당하여도 밤이 새도록 글을 읽었다. 혹여 병이 날까 봐 염려되어 밤에는 글을 읽지 못하게 하여도 내 책장의 두꺼운 책들을 모두 가져다 읽었다. 또 나라를 다스리는 법을 알아서 큰일에 대해 아뢰는 의견들이 진실로 합당하고 내 상상력을 넘어섰다. 때때로 중국의 사신을 접대할 때는 몸이 빛나고 언어 동작이 두루 예(禮)에 부합하였다(태종 18년 6월 3일).


두 달 뒤에 왕위를 넘겨받은 세종은 두 달이 채 안 되어서 군신이 함께 학문을 배우면서 국정을 논하는 경연(經筵)을 열고 첫 교재로《대학연의(大學衍義)》를 채택한다(즉위년 8월 10일).


《대학연의》는 중국 송(宋)나라 때 진덕수라(호: 서산)는 유학자가 황제에게 나라를 통치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집필한 제왕학(帝王學·disciplines of kingship) 교과서다.

유교 경전인 사서오경에서 올바른 제왕 노릇에 필요한 구절들을 엄선해서 뽑고,《사기(史記)》·《한서(漢書)》·《후한서(後漢書)》·《신당서(新唐書)》·《구당서(舊唐書)》·《자치통감(自治統鑑)》같은 옛날 역사책에 실린 성공과 실패 사례들을 추려서 황제에게 일러주는 형식으로 엮어져 있다.

경연에서 강론을 마친 후에는 경연에 참여한 신하들로 하여금 경연청에서 종일토록 토론하게 시키고 점심을 주라고 하였다. 경연관들이 주어진 직책을 수행하면서 순번을 돌아가며 발제를 담당한 관계로 여러 서적의 깊은 뜻을 파고들 여가가 없는 애로를 ‘끝장 토론’으로 해결해 준 것이다(세종 즉위년 12월 17일).

세종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다양한 책을 읽었다. 유교와 성리학 분야의 경서(經書)들은 기본이고, 도교, 불교, 역사, 음악, 천문학, 수학, 지리, 의학, 약학, 법률, 교육, 병법, 풍수학, 중국어 등을 두루 익혀서, 임금이 되기 전에 이미 모르는 것이 없고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훤히 알았다.


세종의 독서는 단지 박학다식(博學多識)해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 라임금으로서 나라와 백성을 다스리는 데 필요한 역량을 갖추기 위함이었다. 바꿔 말하면 ‘선택과 집중’의 전형이었다.


재위 3년(1421년) 7월 세종은 서운관에 보관되어 있던 《천문비기(天文秘記)》를 대궐로 들여오게 하였다(세종 3년 7월 2일). 독학으로 천문을 공부하기 위함이었다.


재위 5년 8월 승정원이 팔도 감사에게 밀명을 내려 옻나무 열매를 줄기까지 함께 따서 올려 보내게 하였다. 그 기름으로 불을 켜면 연기가 없고 빛이 밝아서 임금이 밤에 독서하는 데에 제공하기 위함이었다(세종 5년 8월 4일).


세종은 국가경영에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분야를 가리지 않고 배우고 익혔다. 군인이 총·대포·활 따위를 쏠 때 먼저 표적을 정하고 방향과 거리를 잡고 나서 방아쇠(시위)를 당기듯 ‘조준 학습’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유력한 증거가 될 만한 기록이 세종실록에 무수히 많다.

♣ 내가 중국어를 배우는 것은 명나라 사신을 대할 때 미리 상대방의 말을 알아 들어서 통역이 진행되는 동안에 대답할 말을 미리 준비하기 위해서다(세종 5년 12월 23일).

♣ 내가 경서(經書)를 깊이 연구하는 것은 정치에 활용하기 위해서다. 경서와 사기(史記)를 열심히 읽다 보면 정치가 손바닥 뒤집기보다 쉽다는 것을 알게 된다(세종 7년 12월 8일).


♣ 임금은 산수를 몰라도 될 듯하지만 성인(요순 임금)이 산수를 익혔다고 해서 나도 배우려고 한다(세종 12년 10월 23일).


세종은 자기 혼자만 책을 열심히 읽지 않았다. 신하들도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는 국립도서관을 세우기 위해 재위 초반부터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서적을 모았다.


재위 17년 6월 집현전에 장서각을 건립하고 그때가지 수집된 책들의 목록을 작성하여 진열을 마치니 건물의 마루와 추녀 끝까지 책들이 가득하였다(세종 17년 6월 8일).


그뿐만 아니라 재위기간 내내 다양한 종류의 귀한 책을 넉넉하게 인쇄해 전국에 고루 나눠 주었다.


책을 더 많이 나눠주기 위해 활자를 개량하였다. 또, 대궐 밖에 있던 인쇄소(주자소)를 경복궁 안으로 옮겨서 집현전 학사 2∼3인을 주자소 전담자로 임명하였다(세종 17년 9월 12일, 10월 19일).


임금이 매일 밤 11시가 넘도록 잠을 자지 않고 집현전에 환관을 보내 묻기를 그치지 않아서 숙직하는 관원은 새벽까지 의관을 단정히 갖추고 임금의 질문을 기다려야 하였다(세종 32년 1월 18일).


생전에 [사서오경]은 모두 백 번 이상 읽었고, [백가사상]과 [역사책]들은 삼십 번 이상 읽었으며, 성리학을 정밀하게 연구하여 고금의 모든 일을 통달하였다(세종 32년 2월 22일).


세종이 경연이나 회의 자리에서 신하들에게 자신의 독서열을 자랑한 기록도 보인다.

♣ 나는 책을 읽으면 잊어버리는 것이 없다(세종 5년 12월 23일).

♣《대학연의》를 펴낸 진덕수가 일찍이《통감강목》은 임금은 다 읽기가 쉽지 않다고 하였는데, 내가 경자년(1420년)부터 읽기 시작해 서른 번 넘게 읽은 곳도 있고, 스무 번 넘게 읽은 곳도 있다. 그 책을 다 읽기는 힘들다(세종 5년 12월 23일).

♣ 내가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거의 다 읽었고, 이제는 늙어서 읽어도 기억이 안 되는데도 읽기를 그치지 않는 것은, 글을 읽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라서 국정에 반영한 적이 많기 때문이다(세종 20년 3월 19일).


세종은 다방면으로 언로를 열어서 조정대신들의 생각과 마음에서부터 세간의 시답잖은 풍문까지 속속들이 파악하였다


재위 11년째 해 3월 강원도 평강 일대로 춘계 강무(군사훈련을 겸한 사냥놀이)를 갔다. 현장에 도착해 보니 강무장 안에 짐승이 매우 드물었다. 평소 사냥이 금지된 곳이라 밀렵을 의심하고. 의금부에 범인색출을 지시하였다(세종 11년 3월 2일, 6일).

의금부가 관계자들을 옥에 가두고 고문을 하고서도 밀렵자를 밝히지 못하자 지난겨울 동안 평강 장터에서 노루와 사슴 고기가 많이 팔린 사실을 알려주며 그 고기들의 출처를 캐보라고 일러주었다(세종 11년 3월 8일).

세종은 경청(傾聽)에 진심이었다. 다방면으로 언로를 넓혀서 백성에게 필요한 것들을 역지사지로 헤아려 정책을 펼쳤다.


다른 사람들은 ‘귀를 열고’ 들을 때 세종은 ‘귀를 뜨고’ 들었다. 마음과 정성을 쏟아서 신하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아낌없는 칭찬과 격려로 상대방이 마음을 터놓게 하였다.

♣ 상서를 만나면 상서를 말하고, 재변을 만나면 근심과 두려움을 말하는 것이 옳다(세종 1년 7월 25일).


♣ 정사를 논할 때는 대소 관원 모두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의견을 말하도록 하라(세종 1년 9월 5일).


♣ 내가 깊은 궁중에 있어서 민간의 일을 다 알 수 없으니, 만일 민간에 게 이해관계가 절실한 것이 있으면 마땅히 빠뜨리지 말고 내게 아뢰도록 하라(세종 3년 1월 3일).

농사철인데 오랫동안 가뭄이 이어지자 친히 서대문 바깥의 영서역 홍제원에 거둥하여 농사를 살펴보았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벼가 자라지 않은 곳을 보면 반드시 말을 멈추고 농부에게 까닭을 물었다(세종 7년 7월 1일).


또, 매일 오전에 경연을 마치자마자 부서별로 차례를 정하여 사관 배석 없이 하품 관원들의 이야기를 듣는 윤대(輪對)를 시행하였다(세종 7년 6월 23일).

시간이 흐르면서 윤대에 참여하는 관원들이 각기 소속 관청의 사소한 문제들을 미주알고주알 아뢰어도, 윤대를 멈추지 않았다(세종 12년 윤12월 8일).

윤대를 계속하다가 참소하는 풍조가 생길 것’을 우려해 윤대를 그만두기를 에둘러서 청해도 따르지 않았다(세종 13년 3월 5일).


함길도와 평안도는 토질은 좋은데 백성들이 옛 습관에 얽매여 땅의 생산력을 다 이용하지 못하자 경상·충청․전라도 감사에게 명을 내린다.

평안도와 함길도 백성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주려고 하니, 각 고을의 나이 많은 농부들에게 오곡에 적합한 토양의 성질, 갈고 씨 뿌리고 김매고 거두는 방법, 잡곡을 번갈아 심는 방법 등을 물어서 요점을 모아 책을 만들어 올리도록 하라(세종 10년 7월 13일).


그렇게 해서 탄생한 책이 바로 조선의 농업혁명을 견인한《농사직설》이다(세종 11년 5월 16일).


전국의 지지(地志)와 주(州)ㆍ부(府)ㆍ군(郡)ㆍ현(縣)의 고금 연혁을 수록한 《팔도지리지》찬술도 옛날 노인이 모두 타계하기 전에 문적을 남겨야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세종 6년 11월 15일, 14년 1월 19일).


세종 14년(1432)에 백성의 교화를 위해 집현전 직제학 설순을 시켜서 편찬한 《삼강행실》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문헌에서 효자 110명, 충신 112명, 열녀 94명을 추려서 각자의 품행을 그림과 함께 설명한 인성교육 교재다(세종 14년 6월 9일, 16년 4월 27일).


재위 23년 6월 중추원 지사 정인지에게 국정을 처리하는 데 참고할 역사책을 펴낼 것을 지시하였다(세종 23년 6월 28일).


무릇 잘된 정치를 하려면 반드시 전대(前代)의 다스려짐과 어지러워짐의 자취를 보아야 할 것인데, 나라를 다스리면서 옛날 역사를 일일이 찾아볼 수 없으니 중추원 지사(정인지)는 중국과 우리나라 역사책에서 권장하고 징계할 만한 사례들을 추려서 후세의 거울이 되게 하라.


이후 약 3년 동안 찬술 작업이 진행되어 세종 27년 3월 마침애 150권 분량의《치평요람(治平要覽)》이 완성되었다(세종 27년 3월 30일).

종합하자면 세종은 광폭의 독서와 적극적 경청을 통해 신생국가 조선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었다. 독서와 경청으로 다진 소신과 자신감에 입각한 환골탈태 수준의 국가개조와 눈부신 발명으로 백성의 불편과 고통을 덜어주고 나라의 품격을 높이는 정치를 펼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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