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세종실록 산책-지피지기(知彼知己)

2. 지피지기(知彼知己)

by 조병인

우리나라는 영토의 삼면에 강적을 두고 있어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국가안보가 으뜸의 당면과제다.


조선의 임금들은 서쪽의 중국, 동쪽의 왜국, 그리고 북쪽의 여진족 사이에서 사대교린 외교로 나라와 백성의 안전을 도모하였다.


그런데 외교는 상대국이 있는 것이어서 나라의 통치자는 주변국가의 정치상황, 권력관계, 군사동향 등에 관한 정보에 밝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와 백성이 언제 위험에 처할지 모르는 불안상황이 지속될 수밖에 없다.

세종 역시 중국(명나라), 왜국, 그리고 여진족의 권력구조, 군사력, 침략야욕 등을 소상히 알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정보망을 가동하였다.


국가안보를 위한 세종의 정보 수집 또한 ‘조준 학습’의 전형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판단을 뒷받침하는 기사들이 실록 곳곳에 적혀있다.


세종은 전쟁이나 위험을 피해서 우리 국경에 이르렀거나 생계가 힘들어서 삶을 의탁하러 온 중국인, 왜인, 야인(여진족)들의 정착을 지원하고 그들의 모국에 관한 정보를 들었다.


그와 더불어서 공식 외교라인을 적극 활용하였다.


원나라를 북쪽으로 쫓아내고 중국대륙을 차지한 명나라의 내부를 알기 위해 황제의 명을 받고 사신으로 오는 환관들을 활용하였다. 특히 명나라 황제의 요구로 조선에서 뽑아보낸 환관들이 사신으로 오면 극진하게 대접하여 명나라 황제와 조정의 동향을 파악했다.


동해를 사이에 두고 있는 왜국에 때때로 공식 사절단을 보내 실권자와 나라의 정세를 알아오게 하였다. 재위 25년(1443)에는 신숙주를 사절단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딸려 보내, 돌아와서 일본의 정치·외교관계·사회·풍속·지리 등을 망라한 《해동제국기》를 펴내게 하였다.


세종은 확실하게 승리를 거두려면 적을 깊이 알아야 한다고 믿었다(세종 17년 8월 10일, 18년 윤 6월 18일 & 7월 18일, 19년 5월 20일 & 12월 19일).


그런 신념으로 북쪽의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 광활한 땅 곳곳에 무리를 지어 살고 있던 여진족의 이합집산과 야심가들의 동향을 알기 위해 국경지역에 대규모 첩보부대를 주둔시켰다.


변방을 지키는 장수에게 교지를 내릴 때마다 옛날 중국의 조(趙)나라 장수였던 이목이 흉노를 막아낼 때 간첩을 많이 두었던 고사를 상기시켰다


세종 18년(1436) 7월 18일 동북면의 함길도 감사 정흠지가 임금의 교지를 받는다.


예로부터 장군이 적군을 대할 적에는 반드시 간첩을 사용하였느니라. 그러지 않으면 적의 실정을 알아서 그때그때의 형편에 따라 적당히 처리할 수가 없다.


세종 19년(1437) 10월 17일 서북면의 평안도 절제사 이천이 임금의 교지를 받는다.


병가는 오직 정직함만을 숭상해야 하지만 부득이하면 기이한 술책도 겸용해야 한다. 옛날의 장수들 중에 죄수를 사면하여 그 힘으로 성과를 얻은 자가 있었고, 죄수가 자원하여 힘써 성과를 올려 제 몸을 보전한 자가 있었다.

다행히 파저강의 여진족을 토벌하였지만 적의 동정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평안도의 사형수 중에서 저쪽 길을 알고 용략(勇略)이 있는 자 두어 명을 강 너머로 들여보내, 낮에는 산속에 숨어 있다가 밤에 가만히 다니면서 적의 소굴을 염탐하게 하여 죗값을 대신하게 한다면, 적의 형세를 거의 알 수 있을 것이다.

실록에 따르면 이천이 평안도절제사였을 당시 평안도의 압록강 일대에서만 4백9명의 체탐정군(體探正軍)이 암약하였다(세종 28년 1월 4일).

체탐은 은밀하게 적진에 잠입하여 적의 동태를 파악하는 것이고 그런 활동을 전담하는 사람을 체탐인(체탐자) 혹은 반간(反間)이라고 하였다. 요즈음으로 치면 간첩, 공작원, 첩보원, 스파이, 프락치에 속하는 이들이었다.

세종은 적의 정보를 수집하는 첩보전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아군의 정보가 적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보안대책에도 각별히 신경을 썼다. 지피지기의 위력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는 반증일 것이다.


우선 조선에 귀화한 중국인, 왜인, 야인(여진족)의 모국 방문을 원칙적으로 금지하였다. 개중에 간첩 임무를 띠고 거짓으로 귀화해 나라의 사정을 염탐하는 자들이 있을 개연성을 고려한 조치였다.


세종은 보안의식도 철저하였다. 아군이 적의 동향을 염탐하듯이 적군도 아군의 동향을 염탐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세종이 보안 문제에 어느 정도로 민감하였는지를 짐작케 하는 기사들이 실록 곳곳에 산재해 있다.


1422년(세종 4) 5월 10일 부왕 태종이 죽자 세종은 1년쯤 뒤에 세자(훗날의 문종)를 책봉하고 명나라 황제인 영락제에게 인준을 청하는 외교문서를 보냈다.


영락제의 회신을 가져온 사신은 구두로 황제가 태종이 생전에 부렸던 환관 30∼50명을 원한다는 뜻을 전했다(세종 5년 8월 18일). 요즘 식으로 말하면 태종의 일거수일투족이 담긴 궁궐의 녹화 영상이나 컴퓨터의 기억장치(하드디스크)를 보내라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요구였다.

세종은 영락제의 속셈을 곧바로 알아채고 명나라 사신의 숙소로 사람을 보내. 환관들이 모두 나이가 너무 많고 젊은 자들은 모두 어리석어서 보낼 만한 자가 한 명도 없다고 전했다.

사신은 자기는 단지 황제의 교지를 전했을 뿐이라며, ‘어떤 환관을 보낼 것인지는 임금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얼버무렸다.

세종은 팔도에 명을 내려 화자 서른 명을 뽑게 하여, 그중 열일곱 명을 사신에게 보이게 하였다. 사신이 두루 살펴보더니 하나같이 우매해 보이고 나이도 너무 어려서 데려가도 쓸모가 없다며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게 하였다(세종 5년 8월 19일, 9월 3일).


세종은 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사신들의 숙소를 방문해 환송연을 열어주고, 전국에서 뽑은 화자들을 한 번 더 보게 하였다. 먼저 보았던 열일곱 명을 다시 만나본 사신은 열네 명을 골랐다.


다음 날 사신 일행이 명나라로 출발하자 사신이 선발한 열네 명에다 전에 뽑아놓은 열 명을 더하여 스물네 명을 들여보냈다. 전원이 태종을 모신 적이 없는 11살부터 21살 사이의 화자들이었다(세종 5년 9월 5일, 6일, 9일).


적을 감쪽 같이 속여서 보안을 지킨 적도 있었다.


세종 15년(1433) 1월 압록강 너머 파저강 일대를 차지하고 있던 야인 4백여 명이 말을 타고 평안도 여연에 쳐들어와 아군에게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히고 사람과 물품을 약탈해 갔다.


보고를 접한 세종은 황해․평안도의 병사 1만 5천여 명을 징발하고 용감한 장수들을 지휘관으로 임명해 국경을 넘어가서 응징하고 오라고 명을 내린다.


장수들이 북쪽으로 출발하자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왕비와 왕세자 이하 종친․부마와 의정부․육조․대간을 대동하고 정반대편인 남쪽의 충청도 온수현(온양)으로 온천욕을 하러 간다(세종 15년 3월 25일).


신하들은 남의 나라에 군대를 보내놓고 한가하게 온천욕을 즐기려는 임금의 행동을 의아하게 여겼다. 하지만 그것은 아군의 출병 소식이 적에게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치밀하게 짜여진 연출이었다.


병사 1만 명과 군마 5천 필을 동원한 출병이었기에, 짐짓 여유를 가장함으로써 백성들의 동요를 차단하고 적의 방심을 유도하는 고도의 심리전을 펼친 것이다.


온수현에 도착한 세종은 느긋하게 온천욕을 즐기다 한 달 후에 한양으로 돌아와 출정한 장수들로부터 차례로 승전 보고를 받고 성대하게 연회를 열어서 장수들의 공로를 치하하였다(세종 15년 4월 23일).


세종은 문서보안에도 소홀함이 없었다.


재위 27년 12월 명나라에 사신으로 들어가는 신하들에게 어명이 내렸다.


옛날에 한승순이 중국의 조정에 들어가다 강도를 당했다. 중국의 형부(刑部)가 범인을 붙잡아 휴대품을 뒤져봤더니 작은 조각 편지가 들어 있었다. 전에 조극관이 사신이 가져가는 문서에 비밀을 적으면 안 된다고 해서 내가 옳게 여겼다. 그런데 경들은 그 뜻을 모르고 사신기 가져가는 문서에 천문(天文)같은 비밀 사항도 모두 적으니 대단히 경솔하다. 앞으로는 비밀 사항은 다른 종이에 적어서 통역사로 하여금 길을 가면서 외우게 하였다가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의주에 두고 가게 하라(세종 27년 1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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