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세종실록 산책-지시(知時)
3. 지시(知時)
세종은 앞으로 나아갈 때와 멈춰서 기다리거나 뒤로 물러나야 할 때를 정확히 알고 나라의 반석을 굳게 다진 영민한 통치자였다.
세종이 오천년 역사를 통틀어서 유례(類例)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업적을 남긴 배경도 세종의 타고난 지시(知時) 능력과 직선으로 맞닿아 있다.
움직여야 할 때를 정확히 알아도 소신과 용기가 없으면 실행이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세종은 언제나 자신의 판단을 굳게 믿었고 실패를 겁내지 않았다.
신하들은 무모한 시도라며 회의론을 펼칠 때 세종은 가능한 해법을 기필코 찾아내 기어코 목적을 이뤘다.
유력한 증거가 될 만한 사료(史料)들을 하나씩 들춰보겠다.
1433년(세종 15) 1월 여진족 추장 이만주의 부하 4백여 명이 말을 타고 압록강을 건너와 우리 영토를 침략하였다. 평안도 여연에 주둔하던 아군을 무더기로 살해하고 사람과 물품을 약탈해 갔다.
강계절제사 박초가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하여 붙잡혀가던 백성 26명과 말 30필, 소 50마리를 되찾아 왔으나 아군 48명이 전사하고 27명이 적진으로 끌려갔다(세종 14년 12월 9일, 세종 15년 1월 9일).
급보를 접한 세종은 최윤덕을 평안도절제사로, 김효성을 도진무로 임명하고 황해․평안도에 배치된 병사 1만 5천여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가 여진족을 무찌르라고 명을 내린다.
평소 쓴소리 전담자로 통하던 이조 판서 허조가 험준한 지형과 야인들의 용맹을 내세워 출병을 미루기를 청한다.
이만주 무리가 사는 지역은 ‘열 그루의 나무를 베고 한 개의 별을 본다.’고 할 만큼 산이 가파르고 길이 험한 곳입니다. 또 야인들은 사납고 날래고 간교(奸狡)하옵니다. 아군이 쳐들어가면 산속으로 숨고 군사를 되돌리면 다시 쳐들어와 노략질해서 국경의 분쟁이 끊이지 않을 것이오니 한갓 우리의 군사만 괴로울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변경의 성책(城柵)을 튼튼히 하고 방어에 주력하는 편이 낳을 것 같사옵니다(세종 15년 1월 18일).
세종은 따르지 않고 지신사(도승지) 안숭선으로 하여금 군대의 지휘관들에게 여진족 토벌을 명하는 성죄방목(聲罪榜目)을 작성하게 시킨다(세종 15년 3월 10일).
성품이 유별나게 강직했던 허조는 물러서지 않고 장마와 복병에 대한 우려를 내세워 여진족 토벌을 겨울로 미루기를 청한다.
4월이 바로 코앞이라 지금 정벌군이 떠났다가 만약 큰 비를 만나서 강물이 불어 넘치면 일이 순조롭지 못하고 도리어 해가 있을까 봐 두렵사옵니다. 또 여름에 초목이 무성해져 산과 골짜기가 울창하게 덮이면 저들이 길목마다 복병을 숨겨둘 터라서 더욱 염려가 크옵니다. 겨울을 기다려 얼음이 언 뒤에 저들이 예상하지 못할 때 기습을 한다면 적을 대파하고 나라의 수치를 씻을 것이오니 지금은 발병을 정지함이 옳겠사옵니다.
세종은 출정 명령을 거두는 대신 ‘절호의 기회를 걱정 때문에 미룰 수는 없다.’는 논리로 허조를 설득한다.
대체로 큰 비는 6, 7월 사이에 내리는데 하늘이 우리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하필 4월에 큰 비가 내리겠느냐. 천도(天道)는 헤아리기가 어려워 확언하기는 곤란하나, 만약 염려 때문에 결단을 미룬다면 언제 군사를 일으켜 큰일을 도모하겠느냐. 게다가 지금은 풀이 자라서 말을 먹이기가 쉬운 때가 아닌가. 또 즉시 야인들을 추격하여 약탈해 간 사람과 물품을 되찾아오면 명나라 황제가 가만있겠지만, 만약 나중에 군사를 일으켜 중국의 경계를 넘어 들어가면 황제가 반드시 그르다고 할 것이다(세종 15년 3월 17일).
결국은 자신의 생각대로 정벌군을 보내서 압록강 너머 파저강 일대의 여진족 소굴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비록 여진족 두목인 이만주는 제거하지 못했어도 여진족 무리를 거의 전멸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진족의 약탈이 계속되자 4년 후에 평안도절제사 이천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병사 8,000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넘어가 파저강 일대의 야인들을 재차 무찌르게 하였다(세종 19년 7월 17일, 19년 7월 18일, 23일, 27일, 9월 22일).
이로써 압록강 너머의 오라산성(兀刺山城: 지금의 五女山)․오미부(吾彌部) 등 여진족들의 근거지를 섬멸하고, 3년 뒤인 1440년에 평안도 여연군의 동쪽 압록강 남안에 무창현을 설치하였다가 2년 뒤인 1442년에 군으로 승격시켰다.
다시 1년 뒤인 1443년에는 여연․자성의 중간 지점인 우예보에 우예군을 설치해 강계부에 소속시켰다.
이로써 압록강 상류의 전략적 요충지에 여연․자성․무창․우예의 네 군을 설치하고 주민을 이주시켜 압록강 상류까지 우리 영토에 편입되었다. 국사 교과서에 4군(四郡)으로 소개된 곳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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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길도(함경도) 두만강 유역의 영토를 넓힐 때도 갑자기 찾아온 기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1433년(세종 15년) 11월 여진족 올적합의 추장 양목답올이 알목하(斡木河: 지금의 하령) 지방의 오도리족을 습격해 그들의 추장인 건주좌위 도독 동맹가첩목아 부자를 죽이고 달아났다.
이후로 여진족 내부에 분열이 생기자 세종은 국토를 확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재빨리 김종서를 함길도 절제사로 보내서 사실상 야인들이 지배하던 지역을 우리 영토로 흡수하였다.
당시 세종이 신료들에게 한 말이 실록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동맹가첩목아 부자가 함께 사망하니 그의 아우 범찰이 무리를 거느리고 우리 경내에 와서 살고자 한다. 알목하는 본래 우리나라 영토였던 곳이니 대신들이 이구동성으로 경솔하게 허락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지만 만약 범찰 등이 딴 곳으로 가고 다른 강적이 그곳을 차지한다면 변경을 잃게 될 뿐만 아니라 새로운 골칫거리가 생길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곳이 허술한 기회를 타서 영북진을 알목하로, 경원부를 소다로로 옮겨서 옛 영토를 회복하여 조종의 뜻을 잇고자 한다(세종 15년 11월 19일).
세종의 특명을 받은 김종서는 함길도에서 7년을 머물며 두만강 하류 남안의 군사적 요충지 여섯 곳(종성․온성․회령․경원․경흥․부령)에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국사 교과서에 6진(六鎭)으로 소개된 곳들이다.
김종서가 현지의 군사들을 지휘해 새 진지를 구축할 때마다 세종은 남쪽의 백성들을 들여보내 두만강 남쪽의 모든 지역이 우리 영토로 굳어지게 하였다(세종 18년 5월 12일, 10월 16일).
그 외에도 세종은 행동할 때를 재빨리 포착하는 혜안과 뚝심으로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지키는 소신 정치를 줄곧 펼쳤다.
재위 26년째 되던 해(1444) 병조 판서 한확․예조 판서 김종서․우참찬 이숙을 앉혀놓고 자신의 뚝심을 회고한 기사가 실록에 고스란히 적혀있다.
내가 나랏일을 처리하면서 여러 사람의 의논을 따르지 않고 대의를 가지고 강행한 적이 자못 많다. 수령 육기(六期) 제도, 평안도·함길도 축성, 행직·수직의 자급(資級)에 관한 일 등은 남들이 다 불가하다고 하는 것을 내가 홀로 밀어붙여 이행하였다. 큰일을 결정하였다가 중도에서 폐지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세종 26년 윤 7월 23일).
세종은 32년을 보위에 있으면서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일은 신하들이 아무리 말려도 반드시 이루는 강단을 보였다.
신료들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대궐 안에 활 쏘는 사청(射廳)과 격구장을 만들게 하였다. 신하들이 강무의 횟수와 기간 단축을 반복해 청하여도 따르지 않았다. 책자 발간, 인재 발탁, 세제 개편, 화폐 유통, 군사 운용, 악기 제작, 사찰 수리, 성곽 축조, 영토 확장 등을 왕권을 써서 관철시켰다.
특히 훈민정음을 창제한 뒤에 부제학 최만리를 비롯한 집현전 학사 다수 신료의 극렬한 반대를 특유의 뚝심과 고집으로 극복하였다.
명나라를 극진히 섬기면서도 황제의 무리한 요구에 슬기롭게 대처하였다.
세종이 즉위한 직후부터 명나라 황제가 어린 처녀와 환자(宦者), 농사와 운반에 필요한 우마(牛馬) 교역, 자기네 군대가 먹을 식량, 개와 야생동물의 진상 등을 요구하는 칙서를 연달아 보냈다.
칙서를 가져온 사신들의 불썽 사나운 추태에 더하여 염치없는 물품 요구와 인사 청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와 백성이 위험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사대교린의 외교노선을 꿋꿋이 견지하였다.
하지만 세종은 역사상 유례(類例)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앞으로 나아갈 때와 뒤로 물러나야 할 때를 정확히 알았던 영민한 통치자였다.
31년째 되던 해 명나라 황제(정통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달달군(몽골군대) 정벌에 나섰다는 소식이 들리자 불안해하는 신하들을 다음과 같이 안심시킨다.
처음에 듣고서 사람들이 모두 동요하였지만 나로서는 두렵기는 하나 무서울 것은 없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큰일에 임해서는 반드시 두려워하고 지혜를 짜내서 성사시키라 하였다. 두려워하라 함은 두려움을 모르면 안 된다는 뜻이고, 지혜를 짜내서 성사시키라 함은 두려워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지금 너무 두려워하여 소동을 피울 필요가 없지만 두려워하지 않아 방비를 잊으면 아니 될 것이다(세종 31년 9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