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세종실록 산책-선발제인
4. 선발제인(先發制人)
세종 19년(1438) 6월 19일.
임금이 압록강 일대의 국경을 지키는 평안도 절제사 이천에게〈야인 토벌책 16조 목〉을 내린다.
도적이 우리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강 위에서 날뛰는데 우리는 도적을 겁내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아니하고 목책 안에 머물러 있으면 되겠는가. 먼저 나가면 남을 누르고(선발제인․先發制人), 뒤에 나가면 남에게 눌리는(후발제어인․後發制於人) 법이니라.
명나라 영토인 압록강 너머 파저강 주변의 여진족이 침략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먼저 공격을 펼쳐서 다시는 쳐들어올 생각을 못하게 하라는 취지다.
선발제인을 선즉제인(先則制人)이라고도 한다. ‘선제공격(先制攻擊)’, ‘선제조치’, ‘선제대응’ 같은 말에서 ‘선제(先制)’는 선발제인 혹은 선즉제인을 줄인 말이다.
선발제인은 올바른 길이라고 판단되면 망설이거나 좌고우면 하지 않고 즉시 행동으로 옮기는 결단력과 실행력을 갖춰야 가능한 것이다. 결정을 내렸으면 고민하거나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실행에 들어가는 용기와 단호함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옛날 중국의 명나라 때 철학자이자 정치가이면서 장수로서도 명성을 날린 황양명은 지행합일(知行合一設)을 펼쳐서 명성을 얻었다.
아는 것(知)과 행하는 것(行)은 둘이 아니고 하나이기 때문에 알면서 행하지 않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지식은 무용지물이라는 뜻으로 결단력과 실행력이 합쳐진 과감단행(果敢斷行)과 일맥상통하는 사상체계로 볼 수 있다.
아무리 비법을 속속들이 이해하고 뛰어난 전략을 알아도 차일피일 실행을 미루면 귀중한 시간만 허비하고 영영 기회를 잡을 수 없게 된다.
세종 재위 26년(1444) 여름에 사간원 우정언 허추가 임금에게 함길도에 행성을 쌓는 일을 중지하기를 청한다(세종 26년 7월 16일).
금년은 한재가 가장 심하오니 함길도의 행성(行城) 쌓는 일을 정지하소서.
세종은 민폐를 끼치지 않고 싶지만 불가피한 일이라서 공사를 줄여서 하고 있다고 대답한다.
큰일을 정지하거나 폐지할 수는 없는 까닭에 길주 이북의 장정들만 불러서 쌓고 있다.
허추는 물러서지 않고 풍년이 들기를 기다렸다가 성을 쌓기를 청한다.
성을 쌓는 것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함인데 가뭄을 만나 억지로 쌓는 것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바가 아닙니다. 또 진(鎭)의 백성들은 이주한 지가 오래되지 않아서 어차피 금년 안에 공사를 마치기는 어려우니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서 쌓아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세종은 가뭄을 이유로 공사를 늦추면 기약이 없어진다며 따르지 않는다.
하루가 늦어지면 10일이 늦어지고, 10일이 늦어지면 한 해가 늦어진다는 속담이 있다. 만약 금년에 쌓을 수 없다고 하고, 명년에 또 쌓을 수 없다고 한다면 큰일을 언제 이루겠는가.
집현전 학사들이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참고할 만한 리더십 사례들을 취합한 《치평요람》에, 세종이 평생 가슴에 깊이 새기고 살았을 법한 이야기 한 토막이 나온다.
옛날 중국의 제나라 환공이 들에 나갔다가 패망한 나라의 옛 성을 보고 어느 촌사람에게 땅의 임자를 물으니 ‘옛날 곽 씨의 터’였다고 대답한다.
환공이 다시 촌사람에게 땅이 폐허가 된 연유를 묻는다.
촌사람은 ‘곽 씨는 선(善)을 좋게 여겼지만 행하지 못하였고, 악(惡)을 미워했지만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선을 좋게 여기고 악을 미워한다 하여도, 선을 행하지 못하고 악을 버리지 못하면 오래 버틸 수 없다는 교훈이 담긴 옛날이야기다.
세종이 매사를 무조건 급하게 실행한 것은 아니다.
특히 나라의 백년대계와 관련되는 일은 속도를 조절해 가면서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였다.
민생과 직결되는 세법을 고치기에 앞서 전국 투표를 실시한 사례는 세종이 민생과 관련되는 정책을 얼마나 신중하게 펼쳤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12년째 되던 해 8월 국가의 재정을 담당하는 호조가 나라의 세법(稅法)인 손실답험법의 폐단을 내세워 옛날에 중국에서 시행된 공법(貢法)을 도입하기를 청한다.
세종은 1 품부터 9품까지 전·현직 관원 모두와 일반 백성 전원에게 찬반의견을 물어보라고 명을 내린다(세종 12년 3월 5일).
4개월쯤 뒤에 다시 호조에 명을 내려 각 도의 보고가 취합되면 모든 관원에게 공법의 편의와 폐해에 대한 의견을 물어서 결과를 아뢰게 하였다(세종 12년 7월 5일).
호조의 책임 하에 5개월에 걸쳐서 투표를 진행하여 17만 2천8백6명의 의견을 취합하니 찬성이 9만 8천6백57명이고 반대가 7만 4천1백49명이었다(세종 12년 8월 10일).
반대의견보다 찬성의견이 명백히 우세했던 것인데 세종은 세법을 곧바로 바꾸지 않았다. 대신 이후 무려 17년 동안이나 난상토론과 임시적용을 통해 법 개정이 가져올 후폭풍을 면밀히 점검한 뒤에 비로소 토지는 여섯 등급으로 나누고 작황은 아홉 등급으로 나누는 개정안을 확정했다.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는 성리학에 매몰된 중신들의 반대와 명나라의 방해가 있을 것을 염려해 작업의 전 과정을 철저하게 비밀에 부쳤다. 그래서 실록에 훈민정음이 탄생한 과정에 관한 기사가 거의 없지만 행간에 숨겨진 단서들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우선 재위 8년(1426) 10월 27일 세종이 신하들에게 “율문이 한문과 이두(吏讀)로 복잡하게 쓰여 있어서 문신들조차 모두 알기가 어렵다.”라고 말한 대목은 당시 이미 누구나 쉽게 읽고 쓸 수 있는 문자를 창제할 마음을 먹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로부터 6년쯤 뒤에 임금이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형벌이 무거운 죄들을 이두(吏讀)로 번역해 민간에 배포하는 방안을 토론에 부친다.
이날 이조 판서 허조와 치열하게 논쟁을 벌이는 대목은 세종이 반대의견을 묵살하지 않고 천천히 일을 진척시켰음을 짐작케 한다(세종 14년 11월 7일).
세종 25년(1443) 12월 마지막 날 임금이 친히 창제한 언문 스물여덟 글자를 공개하자 대제학 최만리를 비롯한 집현전 학사 여덟 명이 훈민정음 반포와 사용을 말리는 상소를 올린다(세종 26년 2월 20일).
세종은 상소를 올린 집현전 관원들을 어전으로 불러서 알아듣게 타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현전 관원들이 도리어 불손한 언사로 언문을 사용하지 말기를 강력히 청한다. 세종은 크게 격분하여 전원을 의금부 옥에 가뒀다가 다음날 망발이 도를 넘은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풀어준다.
재위 8년 10월경 새 문자를 창제할 마음을 먹은 것이 사실이면 재위 25년에 훈민정음을 세상에 내놓기까지 17년 안팎이 걸린 셈이다. 훈민정음해례본이 나온 재위 28년(1446)을 기준으로 삼으면 한글이 창제되는 데 20년이 걸렸다는 계산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