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게 일이 하기 싫은 날이 있습니다. 주로 연휴가 붙어 있는 주말을 보내고 온 월요일이라던가, 큰 프로젝트를 끝내고 난 뒤에 그렇습니다. 눈 앞에 쌓인 업무가 없다면 당장이라도 휴가를 내고 퇴근하겠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을 때저는 다시 업무에 집중하기 위해 메일을 씁니다.
그것도 아주 잘, 최선을 다해서 말이죠.
평소에 메일을 보낼 때는 안부 인사도 했다가 메일을 보내게 된 배경에 대해서도 늘어놓고, "많이 바쁘시겠지만"으로 조심스레 운을 떼고 나서야 비로소 본론에 들어갑니다. 물론 최대한 공손하게 말이죠. 이처럼 구구절절 친절하게 썼는데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럼 맥이 탁 풀리죠. 바빠 죽겠는데 대체 나에게서 뭘 원하는 건지, 뭘 해달라는 건지 모르겠다면 그냥 읽고 넘어가버리거나 제목만 쓱 보고 클릭조차 하지 않을지도 몰라요.(메일을 보낸 사람에게 친히 전화를 걸어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다고 설명해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대단히 친절한 사람입니다.) 급한 사람이 우물을 파겠지 라는 심산이죠. 그러니 메일을 보냈는데 상대방이 회신을 안 준다면 그를 탓하기 전에 내가 보낸 메일을 한 번 열어보세요. 내가 받는 사람이라면 과연 이 이메일을 읽고 난 뒤에 무슨 행동을 해야 하는지 알겠는가 말이에요.
메일을 명료하고 간단하게 쓰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저는 무엇보다 안부 인사로 시작하고 싶은 충동과 싸워 이기는 게 가장 힘듭니다. 오랜만에 연락드리는데 그 간 별 일은 없으셨는지, 요즘 코로나로 어수선한데 건강은 어떠신지 등 딱딱하지 않게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기 때문이죠. 간단하게 묻고 끝낼 수 있다면 나쁘지 않지만 한 번 쓰다 보면 두세 줄은 금방입니다. 그래서 저는 최대한 요청사항으로 시작하는 습관을 들이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메일을 읽은 상대방이 해줬으면 좋겠는 것, '올해 상반기까지 출시 준비 중인 OO제품에 사용할 컨셉 성분 제안을 오늘 오후까지 회신 주세요.'와 같은 내용으로 말이죠. 그 후에 왜 그 제품을 준비하고 있는지, 염두에 두고 있는 컨셉 성분이 무엇인지라던가 단가 상한선, 유사 제품 등 프로젝트 세부 사항을 나열합니다. 그리고 한 번 더 요청 사항으로 마무리하는 것이죠. 수미상관이랄까요? 메일을 쓰다 보면 가장 하고 싶은 말을 가장 나중에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쓰기라도 하면 다행이죠, 어떨 땐 의식의 흐름대로 쓰다가 요청 사항은 누락한 채 그냥 보내버리는 경우도 있어요. 그리고 왜 답장이 안 오나 기다리는 거죠. 그러니까 더더욱 제일 처음부터 딱 메일을 쓴 목적을 단도직입적으로 써야 합니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연습하겠어요, 평소엔 바빠 죽겠는데.
아직도 갈 길이 먼 제 메일 작성 스타일입니다.
당장 지금 메일함을 열어보세요. 몇 개의 메일이 쌓여있는지. 못해도 매일 20-30통의 메일을 주고받는데, 마치 언어 영역 문제를 풀 듯 꼼꼼하게 읽고 답변을 달아줄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특히나 메일의 수신자가 많다면 더더욱 아무것도 하지 않을 확률이 올라가죠. 따라서 누구한테 요청하는 것인지 명확하게 지정하고, 요청사항을 적어야 해요. 여전히 어렵지만, 가능한 간결하게 공유할 내용과 요청 사항을 메일에 담으려 합니다. 이 메일을 읽은 사람이 뭘 해야 할지 바로 알 수 있게 말이죠. 그리고 메일을 보내기 전 한 번 더 누가, 언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 빠지지 않았는지 인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일정에 차질이 생겼을 때 이걸 무기로 삼을 수 있어요. 이건 직장에서의 생존 스킬이랄까요.
메일처럼 마음대로 쓰기 쉽지만, 잘하기 어려운 업무도 없습니다. 결국 메일을 읽은 사람이 움직일 마음이 들도록 하는 게 목적이니깐요. 메일을 쓰는 게 곧 일의 시작입니다.
일이 너무 하기 싫을 때 일단 메일을 공들여 써보세요.
메일을 쓰다 보면 어느새 그다음 단계를 찾아서 움직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거예요. 상대방을 움직이도록 정성 들여 메일을 쓰다 보면 누구보다 먼저 내가 설득되어 움직이고 있을 테니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