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를 기준으로 11번의 공휴일을 제외하고 나면 1년 중 240일 남짓 일합니다. 체감 노동 일수에 비해 너무 적은 것 같나요? 240일 x 8시간 = 1,920시간 매년 일한다고 생각하면 꽤 많은 시간을 일하며 보내고 있죠. 정년까지 생각하면 최소 20년에서 많게는 30년까지도 매년 꼬박꼬박 1,920시간을 일하며 보냅니다.
세상에나.
다행히도(?) 매년 우리에게는 소중한 연차가 15 + α개씩 생기죠. 근속연수에 따라 개수가 다르겠지만 저는 이제 막 하나가 더 생겨 총 16개의 소중한 연차가 있습니다. 이 연차를 어떻게 쓸지는 1년 내내 하게 되는 즐거운 고민이죠. 연초에 회사에서 주는 달력을 받는 순간부터 빠르게 공휴일을 파악하고 최대한 휴가를 골고루 쓰기 위해 달력을 요리조리 넘겨가며 시뮬레이션을 해 봅니다. 뜻하지 않게 아플 수도 있고, 회사에 정말 가기 싫은 날도 있을 테고, 특별한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한 사흘 정도는 빼놔야 합니다. 그러면 정말 얼마 남지 않아요. 어떤 날을 골라야 정말 만족스러운 휴가를 보낼 수 있을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하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마지막 결재를 올리는 순간까지도 정말 이 날이어야 할까 스스로에게 한번 더 물어보고 나서야 비로소 휴가를 냅니다.
입사 초 몇 번의 휴가는 재택근무나 다름없는 휴가들을 보냈습니다. 아침부터 업체에서 오는 전화로 눈을 떴으니깐요. 또 몇 번의 휴가는 느지막이 일어나 정말 딱 삼시세끼만 챙겨 먹고 지나가버렸죠. 하루가 너무 짧더라구요. 어떤 날은 밀린 은행 업무나 병원 순례를 위해 피치 못하게 휴가를 냈어요. 요즘은 그런 아마추어 짓은 하지 않습니다. 은행과 병원은 점심시간에 후딱 다녀와야죠. 그런 일에 귀한 휴가를 허비할 순 없습니다.
몇 번의 싱거운 휴가들을 보내고 제 나름대로 휴가를 제대로 보내기 위해 저만의 룰을 세웠습니다. 바로 휴가 중엔 "절대 서두르지 않기"입니다. 매일매일 쫓기듯 일하고 또 다른 팀을 재촉하는 게 일상이다 보니 제 삶의 속도가 2배속, 3배속으로 세팅되어 있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요. 평소엔 전화를 받으면서 메신저를 보내기도 하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보고하고, 가끔은 할 말이 너무 많아 말하는 속도가 머릿속 생각을 따라가지 못한 적도 있어요. 아직 할 말을 다하지도 않았는데 저는 이미 그다음을 생각하고 있더라니깐요. 그렇게 모든 생각의 흐름과 행동, 말이 '빠름'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속도가 저와 달리 느리면 답답해지기도 해요. 그런 다름을 배려하고 기다려줄 마음의 여유조차 없는 거죠.
이런 일상에 젖은 저를 끌어올려 잘 말려줘야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더라도 제 속도를 지킬 수 있습니다. 일상 속에 흠뻑 빠져있을 땐 제 속도가 어떤 지 알아차리기 힘듭니다. 설사 알아차린다고 하더라도 이미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가속도가 붙어 속도를 늦추기가 힘들어요. 그렇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브레이크를 걸어줘야 합니다. 그래서 휴가인 날엔 하루를 온전히 느끼기 위해 일찍 일어나 집을 나섭니다. 쉬는 날이라고 늦게 일어나면 하루가 짧아져 괜히 그만큼 손해 보는 기분이거든요. 그리고 하루 종일 서두르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신호등이 깜빡거려도, 옆에 사람들이 아무리 빨리 걸어도 저는 그 속에서 유유히 걷는 거죠. 제 속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겁니다. 생각보다 쉽지 않아요. 자꾸만 주변의 흐름에 맞춰지기 마련이거든요. 집에만 있으면 이러한 속도 차이를 느끼기가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많은 거리를 걷거나 사람이 많은 공간에 있으면 그 차이가 확연히 느껴집니다. 저는 특히나 직장인이 많은 광화문 거리를 걷는 걸 좋아하는데요. 상대적으로 느린 제 모습이 도드라지게 느껴지면서 제가 가진 여유로움이 더 크게 느껴지거든요. 하루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 속에 바삐 걷던 제 모습은 생각나지 않을 만큼요.
많은 사람들 속에서 제 속도를 지키고, 한 번에 하나씩 지금 이 순간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는 연습을 합니다. 현재와 미래에 어정쩡하게 한 발씩 걸치고 있던 저를 데려다 지금 여기에 온전히 두 발을 디디고 서게끔 하는 거죠. 멀리 여행을 떠나지 않더라도 일상 속에서 오롯이 휴가를 즐기는 저의 비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