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을 절반으로 줄이는 방법
본성을 거스르는 시스템
오래간만에 아빠와 단 둘이 점심을 먹으러 나섰습니다. 고등학생 때부터 기숙사 생활을 했으니까 햇수로 따지면 떨어져 산지가 벌써 십삼사 년이 되었네요. 일 년에 두세 번, 명절 때와 여름휴가에 보는 게 전부인데 지금이 바로 그중 한 번입니다. 정말 오랜만에 데이트하는 느낌이 들어서인지 기분이 좋아진 아빠가 제 버스비를 내주기로 했어요. 저야 당연히 그런 건 사양하지 않습니다.
우리 아빠는요. 출퇴근도 버스 타고 합니다. 평소에도 자차보단 버스를 많이 타고요, 환승할지도 모르니까 내릴 때도 꼭 카드를 찍고 내리는 분이에요. 그리고 저희 집에서 가장 고학력자입니다. 뜬금없이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어요.
그런데 두 명치의 요금을 카드로 내려면 먼저 기사님에게 인원수를 말하고 변경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카드를 찍어야 한다는 건 몰랐었나 봅니다. 두 명이라고 말씀드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기사님이 미처 두 명으로 변경하기도 전에 카드를 찍어버린 아빠에게 짜증을 내시더라고요. 그 순간 저도 당황스럽기도 하고 또 저희 때문에 출발하지 못할까 봐 걱정이 돼 그냥 제 카드로 요금을 내버렸습니다.
자리에 앉고 나니 계속해서 방금 전 사건이 떠오르더라구요. 처음에는 짜증을 냈던 기사님 앞에서 아빠 편을 들어주지 못한 미안함이 떠오르다 곧 이건 몰랐던 아빠의 잘못도, 무더위에 지쳐 짜증을 낸 기사님의 잘못도 아니란 생각이 들더군요. 생각해보면 이런 경우가 꽤 많지 않던가요? 우리의 몸은 익숙한 행동이 자동화되어 있기 때문에 특별히 의식하지 않으면 평소 하던 대로 행동하기 마련이잖아요. 가장 단적인 예가 '당기세요' 아닐까 싶습니다. 한국인이 절대 못 읽는 한국어가 바로 '당기세요'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우린 문을 보면 일단 밀고 봅니다. 줄곧 앞으로 걷다가 이 힘을 거스르고 문을 당기려고 하면 당연히 잘 안되기 마련입니다.
오늘 발생한 버스 카드 사건도 마찬가지라 생각해요. 평소 우리는 버스를 타자마자 아무 생각 없이 요금부터 내고 보는데, 이를 멈추고 요금을 조정하기까지 기다리는 건 평소 습관과는 맞지 않는 행동이죠. 우리 아빠만 해당되는 건 아니라 생각합니다. 앞 문쪽 자리에 앉았을 때 요금을 잘못 내서 기사님과 실랑이를 벌이는 승객을 간간히 봤었거든요. 그땐 다른 사람 일이라 크게 와 닿지 않았을 뿐이지만요.
문에 '당기세요'라고 적혀 있는 건 안전상의 이유인 것처럼(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추측해 봅니다) 버스 카드를 찍기 전에 인원수를 먼저 설정하는 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겠죠. 그렇지만 그게 사람의 본성을 거스르는 거라면, 그리고 이 때문에 아주 잦지는 않더라도 불필요한 갈등이 생긴다면 한 번쯤은 시스템을 바꿔볼 생각도 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인원수를 바꾸는 것은 카드를 찍고 나서도 가능하게 말이죠.
회사를 다닐 때도 드물지만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보통은 일에 쫓겨 불편함을 느끼기도 전에 시스템에 나를 맞추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단지 지금까지 줄곧 이렇게 해 왔다는 이유만으로 번거로움을 감수하며 일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모든 일을 내 스타일대로, 내가 편한 방식으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1인 기업을 운영하는 게 아니라면요. 그렇지만 주변 사람들도 비슷한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면 한 번쯤은 시스템이 잘못된 건 아닌지 고민해봐야 할 문제라 생각합니다. 유관 부서와 협의를 통해서 서로의 불편함을 줄이고 그로 인한 다툼까지도 줄일 수 있다면 안 바꿀 이유가 없잖아요?
최근에 아주 소소하지만 방식을 바꿔 실수를 줄인 경험이 있습니다. 제가 편하자고 바꾼 게 아니라 업무적인 실수를 줄이기 위함이라는 점에 모두들 동의했고 그렇기 때문에 바꿀 수 있었어요. 그러니 평소 업무에서 이상하게 실수가 많이 난다던가 다른 부서와 갈등이 많이 생기는 부분이 있다면 그 이유를 너 아니면 나에서 찾지 말아 보세요. 혹시 우리가 실수를 많이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것은 아닌지, 그로 인해 서로 상대방의 탓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던 것은 아닌지 살펴보면, 아마 대부분은 그럴 거예요. 그러면 서로를 비난하고 미워하는데 에너지를 허비하기보단 어떻게 하면 이를 줄일 수 있을지 고민할 수 있을 거예요. 우리 모두 웃으며 일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