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형부를 만났을 때 종소리라도 들렸어요?

30도 온탕같은 남자, 그와 함께 있는 내가 좋았고, 그래서 그가 좋았다

by 유미작가

“언니, 이 사람과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을 어떻게 했어요? 형부를 만났을 때 귓전에 종소리라도 들렸어요?"

“종소리? 그런 게 있을 리 없지. 그냥 이 사람이랑 있으면 편해. 내 몸도 마음도. 그리고 내가 가장 나다운 것 같기도 하고.”


연애 공백기간이 길어지고 누군가와 썸은 타도 긴 만남으로 이어지지 않기를 반복하던 어느 날 한 남자를 소개받았다. 소개팅도 횟수가 늘어나니 사적이지 않고 공적인 느낌으로 변이가 가능하다는 것을 느끼던 참이었다. 미지의 세계를 탐구한다는 호기심보다는 업무 매뉴얼에 따라 1:1 회의를 진행하는 듯한 느낌이 계속되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주말은 어떻게 보내세요?"

"음식 맛이 어떤가요?"

"소개해주신 분과 어떤 관계세요?"

"어떤 일을 하세요?"

"운동이나 여행 좋아하세요?"

등등


요즘 말로 소위 ‘자본주의 미소’를 얼굴에 띠고 약간의 긴장과 어색함을 풍기며 아이스 브레이킹, 본론, 내용 요약 및 클로징의 순으로 비슷한 질문을 하고 비슷한 대답을 이어가는 만남들이었다. 더러 몇 번의 추가 만남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업무 협의자 이상의 관계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것도 일단 첫 만남에서 내가 의식하는 몇 가지 조건들이 충족한 경우에만 가능한 일이었다.


남편과 처음 소개로 만났을 때, 이 남자는 일단 그 몇 가지 조건들도 불충분한 인상이었다. 어딘지 살짝 촌스러운 듯한 옷차림, 유행이 지나도 한참 지난 일본식 샤기컷, 게다가 그 시절 여전히 내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1순위 조건으로 꼽던 스노보드를 한 번도 타본 적이 없는 남자였다. 추가 만남은 없을 것이라는 확신과 함께 긴장도 어색함도 모두 증발해버렸다. 말을 하기보다 듣기에 재능이 있어 보이는 소개팅남 앞에서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난 듯 편안하게 수다를 늘어놓았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스스로 정해놓은 이런저런 조건과 틀에 맞추려는 생각이 사라지자 그의 위트와 진솔함이 조금씩 보이기도 했다.


추가 만남은 없을 것이라는 나의 확신과 단언은 깨졌다. 만났을 때는 외형적 조건들에 긴가민가 하다가 헤어질 쯤에는 진솔한 대화에 빠져드는 만남이 반복되다 우리는 드디어 정식으로 교제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간 데이트를 했던 사람들과는 결이 조금 다른 이 남자와 결혼을 결심했다.


"과장님, 요즘 얼굴이 편안해 보여요"

"아니, 카랑카랑하던 모습은 다 어디 간 거야? 왜 이리 부드러워졌어?"


나의 변화는 주위에서 먼저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있을 때면 나는 10대 소녀로 돌아간 듯 생기로 가득했고, 재잘재잘 수다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늘 자상하게 들어주고 간혹 위트 있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높은 하이힐과 진한 화장, 화려한 옷차림이 없어도 그와 함께 있으면 나는 누구보다 아름답다는 기분이었고, 요동치던 감정의 파도는 잦아드는 것 같았다. 그는 나를 좀 더 나은 나로 만들어주는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그와 함께 있는 나의 나다운 모습이 좋았다.


류시화 시인의 에세이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에 아메리카 원주민에 관한 박사 논문 과제를 위해 미국 남서부의 나바호족 인디언 보호구역에 1년을 머물렀던 한 대학생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녀가 1년간 지냈던 한 인디언 가정의 할머니는 그녀가 떠나는 마지막 날 서툰 영어로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I like me best when I’m with you


책에서 류시화 시인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누군가를 좋아하고 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 지는 이유는 단순히 그 사람이 좋아서만이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나 자신이 좋아지고 가장 나다워지기 때문일지 모른다.


나는 그와 함께 있는 내가 좋았고, 그래서 그가 좋았다.




사과농장을 하시는 시부모님 댁에는 아궁이가 있다. 온 가족이 모이는 날이면 어머님은 일찍부터 대추나무 장작을 넣어 불을 때기 시작하신다. 화려한 불꽃들이 사라지고 나면 은은한 불씨를 품은 나무는 오랫동안 열기를 내는 좋은 숯으로 변해간다. 이렇게 만들어진 숯은 가족들이 삼겹살을 구워 먹고 고구마와 감자를 익혀먹을 때까지 은은한 온기를 계속 뿜어낸다.


그와의 만남은 화려한 불꽃을 터트리며 불같이 타오르는 뜨거운 사랑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온기가 사그라들지 않는 좋은 숯처럼 늘 따뜻했다. 순간의 50도 열탕은 아니었지만, 식지 않는 30도 온탕 같은 우리이다.


“자기는 누구와 함께 있을 때의 자기 모습이 가장 좋아?”

“당연히 당신이랑 함께 있을 때의 내 모습이 가장 좋지요”


결혼 후 남편은 어쩐지 결혼 전보다 더 재미있는 사람이 되었다. 장난이 더 많아졌고, 아재 개그를 펼치는 날도 많다. 여전히 감정을 말로 길게 풀어내는 것에는 서툰 사람이지만, 그의 말에 내가 박장대소하는 일도 늘었다. 그의 유머감각이 결혼 후 갑자기 일취월장한 것인지, 내가 그의 유머를 더 좋아하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재미와 웃음을 더 많이 주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난임의 과정을 손을 잡고 걸어 나가고 있다.


지난 생일에 남편이 건네준 손편지에는 꾹꾹 눌러쓴 글자마다 무뚝뚝한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함께 노력하며 성장하는 우리라 더 좋고, 해가 갈수록 더 행복한 우리라 더 감사하다는 그의 편지에 어느새 내 가슴에 좋은 숯이 불을 피우는 듯 뜨끈해지는 느낌이었다.


당신도 이런 행운을 가질 수 있다. 화려하고 멋진 불꽃에 흔들리는 마음을 잡고 은은하게 나의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30도 온탕 같은 사람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신의 의식보다는 무의식에 판단을 맡겨보는 것은 어떨까? 당신의 무의식이 끌어당기는 사람이 바로 당신을 편안하게 하고 가장 당신답게 만들어주는 그런 사람일 것이다.


아마도 내 인생 최초로 무의식의 판단을 따랐던 그때의 선택이 감사하다.

이전 07화우리가 젊음이 없지, 자신감이 없겠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