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겨울이 끝날 때쯤이면 그해에 파견을 나가게 될 주재원 입문 교육이 시작된다. 회사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겠지만, 이런 종류의 인사 발령은 블랙박스처럼 진행 과정이 깜깜무소식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이틀 후 입과' 이런 식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그랬다. 후보에 올랐지만 정말 입과 하게 될지 알 수 없어 마음 졸이던 동료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중 한 명은 기쁜 마음이 컸던지 인사 담당자에게 받은 입과자 리스트가 첨부된 메일을 그대로 부서원에게 재전송하며 잘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전했다. 첨부를 클릭하고 엑셀 파일이 열리자 명단에는 익숙한 이름이 여럿이었다. 입사 동기, 외국어 교육 파견을 함께 다녀온 동기, 그리고 내가 일하고 있는 팀 내 동료들까지 안면이 있는 이들이 꽤 많았다. 그중 몇몇에는 메신저로 축하 인사도 건넸다. 주재원 파견 전 한턱 쏘라며 부추기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가슴 한편이 헛헛했다. 글쎄 이게 어떤 감정일까? 셀 너머 축하 인사를 주고받느라 왁자지껄한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러 생각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저 장면 속에 나는 왜 없을까? 유산이 반복되어서? 출장과 주재원 제안을 거절해서? 난임 휴직을 하고 복직해서? 포지셔닝이 애매해져서? 사내 인간관계의 소용돌이에 휩쓸려서? 내가 있어야 할 자리였을까? 내가 받아야 했을 축하였을까? 나는 영광을 뒤로하고 쇠퇴하는 과거의 사람인가? 내 감정이 무엇인지 제대로 정의하지 못한 채 하루가 지났다.
오정세 배우는 긴 무명 시절을 지나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으로 2020년 제56회 백상 예술대상에서 남자 조연상을 받았다. 그는 상을 받고 마이크 앞에 서서 지금까지 100편 넘게 작업을 해왔고, 작품마다 늘 똑같이 열심히 임했지만, 모든 작품이 늘 잘 되지는 않았다는 말로 수상소감을 시작했다. 그는 열심히 사는 보통 사람들을 볼 때면, 세상이 좀 불공평하다는 생각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니 드라마의 성패는 내가 잘해서도 아니고 못 해서도 아니었다며, 여러분 탓이 아니니 자책하지 말라고 위로했다. 헛헛한 마음이 가시지 않은 채 맞이한 다음 날 새벽 통근버스에서 나는 지인이 보내준 오정세 배우의 수상 소감을 한 글자 한 글자 마음에 새기며 들었다. "그냥 계속하다 보면 평소와 똑같이 했는데 그동안 받지 못했던 위로와 보상이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제게는 동백이가 그랬습니다. 여러분들도 모두 곧 반드시 여러분만의 동백을 만날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도 동료들보다 1년 먼저 부장으로 승진했던 동기가 사내 메신저로 메시지를 보내왔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아니 지난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 역시 내가 그러하듯 회사 내에서 방향 전환을 모색 중이었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감정을 돌아보는 데 익숙하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책임감을 연료 삼아 엔진을 활활 태우다 자기 자신마저 타들어 가고 있음을 뒤늦게 발견했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손에 쥔 것을 혹은 쥐게 될지도 모를 것을 놓아버릴 용기가 남아있었다. 그러나 조직은 그 규모가 클수록 이런 변화를 탐탁지 않아한다. 그래서 우리는 답답했다. "언니, 사람은 원래 나약하고 의지력은 허상인 것 같아. 그래서 우리에게는 환경적 세팅이 필요해. 의지란 놈은 완충 후 일정 시간이 지나면 방전되는 배터리 같더라고. 게다가 해가 지날수록 완충 후 방전되기까지의 시간은 짧아지고. 제때 제대로 충전해주지 않으면 더 빠르게 짧아지고. 이제는 완충해도 몇 시간이 가지 않아." 동기 언니는 내 말에 크게 공감했다. 우리는 둘 다 정점에서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우리의 선택과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루저의 변명, 루저의 선택으로 비칠지도 모른다. 의지가 부족하다며 손가락질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살아야겠더라. 그게 먼저더라. 책임감으로 몰아붙여 온 시간, 이제는 더 이상 재도 남지 않았을 지경에 이르러서야 내 몸과 마음이 보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줄기차게 신호를 보내던 우리의 마음은 처음으로 짧은 답을 받았다. "너 많이 힘들었구나" 마음을 모른 척하고 외면한 채 책임감으로만 살아온 우리는 처음으로 마음을 위로했다. 그동안 쌓인 마음의 소리를 한 번에 듣느라 지치기도 하지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귀한 일이다. 인싸였던 조직에서 아싸로 모드 전환을 하려 하니 실패자로 보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심지어 나조차도. 아니 어쩌면 나 스스로 만들어 낸 허상일지도 모른다. 픽션 속에서 날아든 화살에 논픽션 세계에 속한 나는 아픔을 느낀다. 이런 시선과 생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고 싶다.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가 해야 하는 두 번째 일은 환경을 바꿔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와 나는 새로운 변화를 준비하고 있다. 그곳에 다다르기까지 꽤 어둡고 긴 터널을 통과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는 지난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으리라. 나는 나만의 동백이 지나갔다고 생각했다. 정점에서 모든 걸 놓아버렸으니 나의 황금기는 지나갔고, 지금 나는 쇠퇴하고 쇠락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나의 동백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녀의 동백도 아직 오지 않았다. 나는 다만 다시 마주한 캄캄한 터널 앞에 있을 뿐이었다. 오정세 배우는 지금 무엇을 하든 간에 실망하거나 지치지 말고 그 일을 계속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힘든데 세상이 못 알아준다고 생각할 때 생각하기를, 곧 나만의 동백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여러분의 동백꽃이 곧 활짝 피기를 응원합니다" 메신저로 나눈 긴 대화 끝에 그녀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유미야 걱정하지 마. 너 마음 가는 대로 살아. 그게 정답이야. 내가 항상 응원하고 있어. When life gives you lemon, make lemonade." 나만의 동백은 아직 피지 않았다. 추운 눈을 뚫고 빨간 잎을 펼칠 날을 맞이하기 위해 나는 마지막 폭설을 지나가는 중이다. 마지막 폭설이 아닐지도 모른다. 해마다 눈은 내릴 테고, 춥고 외로울 것이다. 그때마다 이 겨울꽃은 그 눈을 털어내고 자신의 붉은 꽃잎을 드러낼 것이다. 눈 속에 피어나는 겨울꽃, 동백은 향기가 없는 대신 빛깔로 새를 불러들인다. 내게 더는 상큼한 레모네이드 향이 나지 않더라도 괜찮다. 그녀의 응원이 미처 벌어지지 못한 꽃봉오리 위에 쌓인 소복한 눈을 툭툭 털어주었다. 이제 나는 겨울꽃을 피워낼 것이다. 진하디 진한 붉은 동백이 피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