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에서 목적을 이루기 위한 목표를 정하고, 목표를 위한 과제를 정의, 실행하고 점검/보완하는 사이클을 반복해 왔습니다. 이 체계가 다른 분야로도 확대 적용될 수 있다 믿었습니다. 내 삶에도 적용할 수 있다 생각하고 '생존'이라는 목적을 위해 '암 극복'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달려들었습니다.
나를 살려줄 수 있는 의사와 병원을 찾아 옮기고, 운동과 식이요법, 대체의학 등 가능한 모든 것을 펼쳐놓고 과제화 하여 실행했습니다. 내 몸과 마음의 반응을 살피고, 검사 결과를 기반으로 실행내용을 보완하는 '프로젝트 관리' 방식을 삶에 적용한 것이죠. 실제로 재발암, 전이암을 극복할 때까지는 효과적이었습니다.
프로젝트에는 시작과 끝이 있고, 암은 끝이 없다는 것을 간과했습니다. 암이 잠잠해지면 극복한 것으로 착각하고 일을 무리하게 했고 운동은 줄고 탄수화물 섭취는 늘어나는 등 루틴이 무너지기도 했습니다. 프로젝트가 끝나고 상시운영단계로 넘어가면, 과제의 결과물을 관리체계 안으로 편입시켜 지속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하는데요. 저는 그 작업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죠. 그렇게 네 번째 암 진단을 받고 나서도 다시, 공부하고 전략을 도출하며 과거에 했던 작업의 형태를 이어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10년 차, 4기, 살아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데 그냥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었습니다. 통원, 검사, 매일 먹는 약에 수술부위 통증 등 이 모든 것이 버겁게 느껴지며 숨이 턱턱 막혔습니다. 전이암 진단 후 CT나 MRI 검사 장비 안에 들어가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사람이 많은 대중교통 이용도 고통스러웠구요. 공황장애 진단을 받아 약을 먹었고, 답답한 순간이 오면 의식적으로 숨을 크게 쉬며 괜찮다고 나를 다독였습니다. 심한 증상이 아니었고 암을 제거하는 수술 후 증상은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다시 나타난 것이죠.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마음이 무너지는, 전략이 무색한 상태에 놓였습니다.
홀로 문경에 내려와 걷고 읽고 쓰며 가만히 나를 들여다보았습니다.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유병장수 해야 하는데 벌써 지치면 어떡하나? 단기 프로젝트가 아닌데, 평생 지킬 수 있는 심플한 원칙들 몇 개 가지고 삶을 영위해야 하지 않을까? 언제 떠날지 모르는데,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냥 너 좋은 거 해!
나의 오류는, 내가 제어할 수 없는 것들을 마치 제어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긴데 있습니다. 내가 읽고 쓰고 걷는 삶을 산다고 해서 암이 극복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목적과 목표를 기반으로 한 전략이 소용없다는 것을, 기업 운영과 개인의 삶은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나에게 더 나은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최선을 다할 뿐, 이외의 것들은 그냥 두어야 한다. 그저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자. 걷을 때는 발걸음에, 읽을 때는 문장과 행간에 집중하고, 차를 마실 때는 온몸으로 향기와 온기를 느끼며, 그렇게 순간을 즐기자.
하고 싶은가? 즐거운가? 이 선택이 내 삶을 더 아름답게 하는가? 이 질문만을 품고 순간을 살아갑니다. 결과는 하늘의 뜻에 맡기고 지금을 삽니다. 다시 무너지고 좌절할 수 있으나 그럼에도 이 질문들을 기억하고 계속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