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훗날, 지금이 어떻게 기억되기를 바라는가?
서양사상의 원천은 '사유', 동양사상의 원천은 '경험'에 있다. 근대가 실체관이라면 현대는 관계론이다.
(최진석, 『인간이 그리는 무늬』, 소나무, 2013, 50-51쪽)
그럼, 지금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범용인공지능(AGI) 시대를 향해가는 지금은 어떤 시대인가?
최진석의 '인간이 그리는 무늬'는 2016년 1월에 만났다. 'IT기획' 실무를 책임지며 '전략'에 대해 제대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질 때, 최교수님의 EBS 특강을 열심히 듣던 남편이 선물했다. 2013년에 발행된 책을 그때 만나게 된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회인이 된 후로 피터드러커, 세스고딘 등의 경영서적을 주로 읽었다. 짐 콜린스의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는 세 번 정도 읽은 것 같은데, 열심히 지속적으로 플라이휠을 돌리다 보면 어느 순간 가속이 붙어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CIO(최고정보책임자)께서 이 책으로 조직원 대상 특강을 하기도 했다. 나는 이러한 책들 속에 있는 경영, 혁신 등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궁금했다. 이들의 출발점은 전략이고, 전략은 미션과 비전에서 시작된다는 생각에 나의 비전체계도를 만들어보기도 했다. 신입사원이 기업의 체계도를 만들 수준은 못되니 우선 내 삶에 적용해 본 것인데, 이런 문장이 담겨있었다. 'CIO가 되어 내가 속한 기업의 미션을 향한 정보시스템을 제공하고, 은퇴 후 작가와 강사로 활동하며 후진양성에 힘쓴다.' 왜 CIO가 되려 하는지에 대한 목적 없이, 되겠다는 목표만 있다. 왜 후진양성을 하겠다는 것인지는 없고 '하겠다'만 있다. 여느 기업 홈페이지의 한 장을 장식하고 있는 미션과 비전처럼 감동이 없는 이유는 당시 내 사유의 수준이 '목표'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취업, 진급 등과 같이 눈에 보이는 성과를 바라는 수준에 있는 내가 경영과 혁신의 본질에 대해 궁금해하다 어렴풋이 전략의 중요성을 알아차렸으나 그 알맹이는 목표의 수준에 머무른 것이다.
목표와 목적, 기획과 전략은 같은 수준에 있지 않다. 목적과 전략이 더 어렵다. 이해할 수 없는 전략에서 좋은 결과물이 나왔다면 전략과 기획, 실행의 연계도가 낮기 때문이다. 실행만 열심히 했는데 결과물이 좋은 경우도 있다. 개인이나 작은 조직에서는 가능하다. 그런데 국가나 큰 기업은 실행만으로 좋은 결과가 나오기 어렵다. 전략이 있어야 한다. 엄청난 실행력으로 성공한 작은 조직도 사업을 확장하려 할 때는 전략을 고민한다.
우리의 직무에 '기획자'는 있으나 '전략가'는 없다. 브런치 프로필에서 직무를 선택할 때도 마찬가지다. 나는 '전략가'를 선택하고 싶었으나 찾을 수 없어 '기획자'를 택했다. 기업에도 '기획팀'은 있으나 '전략팀'은 잘 없다. 어정쩡하게 '전략기획'팀이라 명명되기도 한다. '과학'과 '기술'을 분리하지 못하고 '과학기술'이라 하는 것과 유사하다. 선진국은 전략, 기획, 운영과 과학, 기술을 분리한다. 이들 단어를 합칠 때는 '앤드(&)' 기호를 넣는다.
십여 년의 사회생활로 진급도 하고 업무범위도 넓어졌으나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답답함이 있었다. 회사의 '비전선포식'에서 그 답답함은 정점에 이르렀다. 행사가 진행되는 내내 이런 생각을 했다. 이 내용들이 내가 일하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지? 회사는 오늘 발표한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전략을 가지고 있을까? 있겠지?
이 궁금증은 끝내 해소되지 못했다. 나는 임원이 아니고 기획팀 소속도 아니라 몰랐을 수도 있다. 별도의 '비전수립TF'가 구성되었을 것이고 컨설팅 회사의 자문도 받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런 의문을 품었다는 것은, 기업의 비전과 실무와의 연계가 너무나 느슨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비전은 일을 함에 있어 의사결정의 기준이 된다. 어떠한 전략을 수립할 때 최 상위 기준이 되는 것이 비전이다. 당시, 나는 우리 조직이 관리하는 프로세스와 시스템이 경영성과에 도움이 되는 방향의 선택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비전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비전이 너무 멀리 있고 하위 전략이 풀어져 있지 않아 기준으로 삼을 수 없었다. 만약 비전이 명확한 상태에서, 매출은 올릴 수 있으나 비전에 맞지 않는 것을 두고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면 비전을 따르려 했을 것이다.
이런 유의 답답함을 안고 살다가 '인간이 그리는 무늬'를 만났고, 인문학에서 해답을 찾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관련 도서를 읽기 시작했다. 책장의 중심에 있던 경영학 서적들은 인문학 책으로 바뀌어갔다. 그리고 그 해, 암 진단을 받았다.
글로벌 IT동향을 파악하여 시사점을 찾아, 내가 속한 조직의 IT전략에 녹여내는 일은 *인간의 무늬를 언어의 감동으로 알려주는 문학, 개념으로 세계를 포착하고 변화를 분석하여 인간의 동선을 알려주는 철학과 닮아 있다. 연말 연초가 되면 가트너 10대 전략기술, 세계경제포럼의 아젠다, 각종 전망 등을 살피고 시사점을 찾아 보고서를 만드는 일을 했다. 조사분석부터 보고서 배포까지 한 달은 걸린 듯하다. 다른 시급한 일들을 하며 부수적으로 했던 일인데, 나는 시급한 다른 일은 자동화하고 이 일에 더 몰두하고 싶었다.
'창조하다'라는 의미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창조란 자신의 삶에 있어서 핵심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자신의 삶의 깊은 관조를 통해 부수적인 것, 쓸데없는 것, 남의 눈치, 체면을 제거하는 거룩한 행위다.
(배철현,『심연』, 21세기북스, 2016, 111쪽)
항암치료를 받을 때, 배철연의 '심연'을 만났다. 책은 병원생활의 필수품이다. 이후, '인간이 그리는 무늬'와 '심연'은 매년 읽는다. 2026년을 시작하며 두 책을 다시 읽던 중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 '인간이 그리는 무늬'를 읽으며 >
지금은 어떤 시대인가?
근대와 현대를 나누는 기준으로 볼 때, 먼 훗날 AI시대를 맞이하는 지금을 그 이전과 구분하게 될까?
근대가 실체관이고 현대는 관계론이라면 지금은 무엇인가?
< '심연'을 읽으며 >
인간이 AI에 요구하고 대화하며 만들어낸 결과물은 창조된 것인가?
내가 AI를 활용하여 창조하는 것이 내 삶의 핵심을 찾아가는 과정인가?
배철현 교수는 쏟아지는 정보 안에서 내면의 정직한 저울(마아트)을 지키는 힘은 결국 무엇이 본질인지 읽어내는 능력에서 나온다 했고, 유발하라리는 AI가 언어와 네트워크(넥서스)를 해킹하는 시대에 해킹당하지 않는 유일한 영역은 인간의 비판적 해석능력뿐이라 했다. 서양의 사유와 동양의 경험이 데이터화되어 AI에 학습되는 지금, 인간에게 남은 마지막 원천은 제공되는 정보를 나만의 것으로 재해석하여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능력이며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리터러시(Literacy / 해석적 문해력)가 아닐까?
실체관, 관계론 다음은 현현론(Manifestationism) 일까? AI와 인간이 상호작용하여 새로운 결과물을 생성하고 그것이 눈앞에 현현되니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창조라 할 수 있을까? 또, 이것이 인류에게 바람직한 현상일까? 인간이 살짝 거들고 AI가 주가 되어 만들어진 결과물들을 인간이 수동적으로 보게 되는, 현현되는 상황이 인간을 위함인가? AI는 도구가 아닌 독립적 대리인(Agent)이다. 인간이 인간보다 더 많이 알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대리인과 협업하며 인간의 중심을 지킬 수 있을까?
정말 이 시대가 현현론이라면, AGI시대는 유토피아를 향하지 못할 것이다. AI기술을 가진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기술 봉건주의 시대가 될 것이다. 인류가 이런 시대를 원하는가? 나는 원하지 않는다. 그런데, 국가 혹은 기업이나 개인이 기술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인류공동체의 어떠한 합의나 검증 없이 기술 개발에 치중한다면 기술 봉건주의를 향할 수밖에 없다. 시간이 흘러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인간이 AI의 도구나 반려인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위의 내용이 너무 비관적인가?
혁신과제를 추진할 때 먼저, 변화될 미래 모습을 상상해보곤 했다. 그 상상은 이 일을 왜 해야 하는가에 대한 설득의 힘을 만들고 추진전략을 수립하는 기초가 된다. 여기서 힌트를 얻어, 내가 바라는 미래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인간이 중심을 잡고 AI와 협업하여 인류의 난제를 해결하고 개인은 원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유토피아를 꿈꾼다. 그럼 그러한 유토피아를 살아갈 후손들이 우리가 사는 지금을 어떻게 설명하기를 바라는가?
인공지능 기술혁명이 일어나고
각자도생의 논리 아래 국가와 기업이 기술패권에 몰두하던 시절,
당시의 인류는 공동체 차원의 **숙론과 조종이 없다면
인공지능이 이 세계를 지배할 수도 있다는 위기에 직면했다.
이때, 세계의 흐름을 이해하고 AI리터러시를 갖춘 기업인과 지식인들이 연계하여
이 위기를 공론화했고 인류는 "전략론"을 생존의 해법으로 선택했다.
그들은 전략을 철학적 기반 위에 선택과 실행을 조정해 가는 동적예술로 정의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아름다운 삶을 이어가기 위해
기술의 방향을 설정하며 관련제도를 구축해 갔다.
그 지혜로운 선택 덕분에
우리는 인공지능에 지배되지 않고 지금의 유토피아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먼 훗날, 지금 이 순간이 이렇게 해석되기를 바란다.
철학자도, 인류학자도, AI전문가도 아닌 내가 어설프게 정리한 내용일지 모른다. 나는 그저 전략, 아름다운 삶, 자유에 관심 있다. 범용인공지능시대에도 자유로운 삶, 아름다운 삶을 이어가고 나의 아이들도 그러하기를 바란다. 그럴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하다. 내게 전략은 철학적 기반 위에 선택하고 실행하는 이 전 과정을 검토하며 조정해 가는 동적인 예술이다. 어느 보고서나 여느 홈페이지의 한 귀퉁이를 지키고 있는 죽어 있는 것이 아닌, 살아서 움직이는 것이다. 전략적 개인과 전략적 기업 혹은 집합체가 모인 전략적 대한민국이 그 중심에 서면 더욱 좋겠다. 그런 꿈을 꾸며, 내가 전략적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이런 생각과 시도는 언제나 '질문'에서 시작된다. 지금은 어떤 시대인가? 나는 왜 이런 생각을 하는가?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 먼 훗날 인류에게 지금 이 순간이 어떻게 기억되기를 바라는가? 그 바람을 위해 지금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질문 끝에 이 글을 쓴다.
* 언어의 수사적 기법을 사용하여 감동의 형식으로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정체를 알게 해주려고 하는 것이 바로 문학입니다. 사건의 시간적인 계기를 재료로 삼아 인간이 그리는 결의 정체를 알게 해주려고 하면 사학이 됩니다. 명증한 범주와 개념들로 세계를 포착하여 그것들의 관계 및 변화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인간의 동선을 알게 해 주면 바로 철학이 되는 것입니다. (최진석, 『인간이 그리는 무늬』, 소나무, 2013, 63쪽)
**숙론(discourse), 최재천 교수의 저서 '숙론'에서 토론이나 토의와 구분하여 사용된 용어로 여럿이 특정 문제에 대해 함께 깊이 생각하고 충분히 의논하는 과정을 뜻함 (최재천,『숙론』, 김영사, 2024, 17쪽)
글쓴이 정원 | 전략연구소 [결] 독립연구자 | 전략 자문
자신의 정원을 가꾸어 가는 당신께, 이 글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