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늘 따신 밥상을 차려주셨다. 식은 밥도 묵은 밥도 싫어하는 큰딸을 위해 갓 지은 따뜻한 밥과 그릇에 담긴 소박한 반찬들을 예쁘게 차려주셨다. 엄마는 내게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잘할 수 있다며 언제나 응원해주셨다. 그래서일까? 남편과 시댁, 아이들로부터 대우받으며 살고 있다. 물론, 나 역시 그들을 대우한다.
대접하는 마음으로 밥상을 차린다.
물론, 내 몸이 힘든 날은 간단히 먹기도 하고 아침의 경우 반찬이 부실할 때도 있으나 정갈하게 차려주려 한다. 치우기 힘든데 그릇을 왜 그리 많이 꺼내냐는 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예쁜 컵에 커피를 내려 가져다주는 아들과 온라인 수업 중인 오빠를 위해 쟁반에 간식을 차리는 딸을 보며 보람을 느낀다.
직장생활을 하며 또, 사춘기 아이와 지내며 힘든 동생을 위해 좋아하는 빵 종류로 차렸던 브런치상이다. 세상에 하나뿐인 내 동생이 먹고 힘내기를 바랬다.
그리고 혼자 차를 마실 때도 예쁜 잔을 꺼낸다. 꽃이 있을 때는 꽃잎도 떼어놓고 때로는 초를 놓기도 하며 열심히 사는 내게 예쁜 찻상을 내어준다.
부모님, 친구 등 내가 대접하고 싶은 사람들을 초대해 한 번씩 상을 차린다. 특히, 아이들 키우며 언제나 내어주기만 하는 엄마들에게 한 번씩 본인만을 위한 예쁜 상을 차려내면 준비하는 나도 받는 손님도 따뜻한 기억으로 남게 되는 것 같다.
투병 이후 식단도 바뀌고 간헐적 단식까지 더해져 나는 먹지도 않는 음식을 차릴 때가 많다. 몸이 힘들 때면 귀찮아지도 한다. 그런데 최근 들어 자식도 손님이라는 생각에 아이들을 대하는 마음이 조금씩 바뀌는 중이다. 아들이 곧 대학에 가고 입대하는 날도 올 테니 미리 준비하는 측면도 있겠지만 몸이 아픈 덕에 삶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고 있고, 엄마의 투병 중에 간편식과 배달음식으로 버텨준 아이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더해졌으리라.
아직 초대할 분들이 많다. 형님, 대모님, 수녀님, 멀리 있는 나의 친구들... 내가 나를, 타인을 대접하려면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하며 몸 상태가 좋아야 한다.
나는 건강을 지키며 대접하고 대접받으며 살고 싶다.
우리 부부는 사이가 좋은 편이다. 서로가 쌔다는 것을 인정하고 서로 건드리지 않 것이 비결일까? 둘 다 자기 주관이 강하다 보니 부부 사이일지라도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고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편이다.
신혼 초에 이런 대화를 했었다.
나 : 여보는 왜 나한테 잔소리 안 해요?
뭐 하고 싶다고 하면 다 하라고 하고.
남편 : 당신도 나한테 잔소리 안 하니까요.
내가 원하는 거 다 하라 하고.
그리고, 내가 왜 잔소리를 안 하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잔소리 듣는 것을 싫어한다. 누군가가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남편도 싫어할 것을 알기에 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나'로 살고 싶다. 그 누구의 무엇도 아닌 나. 남편 역시 그러하다. 그렇게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다 보면 의견 충돌로 싸울 일이 없다. 그저 '이런 부분은 이 사람과 내가 생각이 다르구나.' 이렇게 받아들이고, 의견이 다른데 반드시 의사결정이 필요한 경우에는 논쟁이 아닌 토의를 한다. 뜻을 하나로 모으기 위한 대화 말이다.
그런데, 자식과의 관계는 매우 어렵다. 특히, 아들의 중학생 시절에는 더 어려웠다. 왜 그럴까? 아들의 자아는 강해져 가고 아들 역시 '나'로 살기 위해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데, 내가 그 과정에 참여하고 간섭하면서 부딪쳤던 것 같다. 내가 병들고, 그로 인해 아들에 대한 간섭이 줄어들었고 아들 역시 엄마에 대한 측은함이 늘면서 우리의 관계는 회복되기 시작했다.
자식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귀찮은 간섭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게하는 방법이 있을까? 지금도 고민 중이다. 나 스스로 변화하려 노력 중이나 얼마나 나아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들에게 사설을 읽으라 당부했으나 역시나 쉽지 않았고, 이제는 권하지 않는다. 대신에 내가 신문을 읽다가 아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 보이면 스크랩하고 그 위에 엄마의 의견을 덧붙여 책상에 올려둔다. 읽었는지, 내용이 어땠는지 등 묻고 싶은 마음이 목 까지 차오르나 가볍게 "엄마가 책상에 올려둔 거 봤어?" 정도로 그쳤다. 그 말을 뱉고 나서도 후회했다. 읽었으리라 믿고 묻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다.
아들은 에너지 전기공학을 전공하게 될 것 같다. 내가 잘 모르는 분야이나 아들이 원하는 것이니 관심을 가지는 중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으나 아들 스스로 원하고 애쓰고 얻어내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참는 중이다. 가고자 하는 대학에 대한 의견도 아들과 나는 다르다. 하지만, 스스로 선택하고 그 선택에 책임지는 아들이기를 바라는 마음에 지켜보는 중이다.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친구가 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는 말에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무슨 일이냐고 내가 지금 가겠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힘들어하는 친구를 만나서 위로해 주어야 한다는 나의 생각을 기반으로 움직였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힘든 일을 겪으면서 달라졌다. 내가 치료받던 중에 병원으로 찾아오겠다는 분들께 오시지 말아달라 했다. 힘든 모습을 보이고 그것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고, 나 스스로 감정을 추스르고 좀 더 안정된 상태로 만나고 싶었다.
이런 일을 겪은 후로는 상대방의 뜻을 존중하려 노력한다. 지금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상대방에게 무슨 일인지 묻지 않고 그저 별일 없기를, 혹여 무슨 일이 있더라고 너무 많이 힘들지 않고 극복하기를 빌며 기도한다.
삶은 모두에게 다른 형태로 다가와 다른 일들을 벌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도 그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도 각기 다르다. 개인의 일상과 살면서 겪은 수많은 사건들, 들었던 말들과 내뱉은 말 등등이 쌓여 이루어진 복합적 요소의 인격체를 내가 마치 잘 아는 것처럼 조언을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우스운 일이다. 기도와 응원을 보내고 뒤에서 지원하며 상대방이 나를 필요로 할 때 곁에 있어주는 것으로 나의 역할을 하고 싶다. 그 상대방이 가족일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