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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원댄싱머신 Apr 30. 2019

우리가 뽑은 대통령에 어느 정도 어울리는 우리

 _유시민 「나의 한국현대사」

피아식별이 먼저다.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진 사람과 이야기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일단 그 사람의 정치적 스탠스가 좌인지 우인지 나와 가까운 지 먼 지를 먼저 파악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피아식별을 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도 나처럼 노무현을 좋아한다면, 혹은 그 반대로 우리 둘 다 박정희를 좋아한다면, 최대한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조금 이상해도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우리 편이 아니라면, 일단 기분이 나쁘다. 그 다음에 비판할 부분을 이성적으로 찾기 시작한다.


아마 나같이 흑백논리에 익숙한 독자들은 다들 이렇게 판단할 거라고 추측한다. 하지만 더 이상 이렇게 동물적인 상태에 머무를 필요가 없게 되었다. 항소이유서로 유명한 작가 유시민이 해답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에 '매슬로'라는 이름을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우리의 욕구에 위계가 있다는 이론이다.


하나의 욕구가 충족되면 위계상 다음 단계에 있는 다른 욕구가 나타나서 그 충족을 요구하는 식으로 체계를 이룬다. 가장 먼저 요구되는 욕구는 다음 단계에서 달성하려는 욕구보다 강하고 그 욕구가 만족되었을 때만 다음 단계의 욕구로 전이된다.
 _에이브러햄 매슬로 「동기와 성격」


일리가 있다. 밥을 배부르게 먹고 잠을 제대로 제대로 자야 연애도 하고 싶고 성공도 하고 싶다. 생리적 욕망(1단계)에서 안전에 대한 욕망(2단계), 소속감과 사랑에 대한 욕망(3단계), 자기 존중의 욕망(4단계), 자아실현의 욕망(5단계)으로 나아간다. 물론 매슬로도 이 위계가 경직된 것은 아니며 느슨하게 작용한다고 이야기했다. 유시민은 매슬로의 이론을 가져와서 흑백논리를 단칼에 해결한다.


유시민은 창의적으로, 국가의 진화에 매슬로의 이론을 적용한다. 국가도 인간과 마찬가지의 발생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다. 먼저, 먹고사는 기본적인 욕구를 채우고 나야 자유니 민주주의니 하는 고상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인간 생명 하나가 만들어지는 '개체발생'은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이 생겨나기까지 지구 행성에서 수십 억년에 걸쳐 진행된 생물학적 진화의 '계통발생' 전체를 압축·반복한다. 국가의 진화도 같은 원리를 따른다. 3·1독립투쟁과 상해임시정부 수립에서 오늘까지 대한민국 역사 100년은 1만 년에 걸친 국가의 진화과정 전체를 압축·반복했다.
 _유시민 「나의 한국현대사」


그럼 다시 정치적 의견이 다른 두 사람 이야기로 돌아오자. 한 사람은 박정희가 대한민국의 경제를 살려서 우리를 아사상태에서 살려놓았다고 생각한다. 효율적으로 정책을 추진하려다 보니, 통일성과 위계성, 상명하복 구조가 필연적으로 요구되었고, 그 과정에서 일부 부작용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 부작용을 가지고 독재니 쿠데타니 운운하는 것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놓았더니 짐이 젖었다고 화내는 격이라는 의견이다. 그렇다. 그는 산업화세력(보수, 수구꼴통)이다.


다른 한 명은 박정희가 때려잡은 것은 민주주의고 인권이고 자유지만, 움켜잡은 것은 부정부패고 재벌독점구조고 편법과 유착 그리고 군대문화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먹고 사는게 중요하다고 하지만 사람보다 중요하지 않고, 이제부터라도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한다. 사람이 먼저다. 그렇다 그는 민주화세력(진보, 종북좌파)이다.


이 둘에게 박정희라고 적혀 있는 종이 쪽지 하나만 던져주면 이 둘은 술 한잔 안 마시고 밤새서 오손도손 이야기할 수 있다. 이 둘은 같은 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훌륭한 애정관계의 한 가지 중요한 면은 욕구의 일체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현상은 두 사람이 갖는 욕구의 위계들이 단일한 위계로 통합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한 사람이 상대방의 욕구를 자신의 것처럼 느끼며, 자신의 욕구가 다른 사람의 욕구인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이제 자아는 두 사람을 포함하는 범위로 확장되며, 두 사람은 심리적인 목적을 위해 하나의 통합체, 한 사람, 하나의 자아가 된다.
 _에이브러햄 매슬로 「동기와 성격」


분노로 가득 찬 이들에게, 박정희와 노무현은 양자택일의 문제다. 이 싸움은 사실 역사전쟁인것이다.


한국현대사는 이 두 세력의 분투와 경쟁의 기록이다. 때로 피가 강물처럼 흘렀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가까운 미래에 종결될 가능성도 없다. 대중이 둘 모두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서로 적대적인 두 세력과 그들이 대표하는 두 시대를 모두 인정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_유시민 「나의 한국현대사」


단순한 옳고그름의 문제로 보면, 나와 다른 입장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역사점 관점으로 보면 가능하다. 우리가 독재국가를 오랜 기간 용인했던 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고, 더이상 참지 못하고 민주화한 것도 마찬가지다.


1959년 국민의 가장 강력한 욕망은 먹고사는 생존의 문제, 북한의 위협과 사회 내부의 혼란에서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지키는 문제였다. 사람들은 이 욕망을 충족할 수 있게 해주기만 한다면 어떤 사람이나 집단에게도 복종할 뜻이 있었다. 4·19에서 5·16까지 1년을 제외하면, 국민들은 정부 수립 이후 1987년까지 40년 동안 권력에 굴종하며 살았다. 이승만 정부는 '멸공통일'을, 박정희 정부와 전두환 정부는 그와 더불어 '경제발전'이라는 목표를 내걸고 힘으로 대중을 억눌렀다. 격렬하게 저항한 사람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에 대한 억압을 기꺼이 받아들이거나 어쩔 수 없이 굴복했다. 1인당 국민소득이 3,000달러에 근접해 생존에 필요한 물질적 자원을 어느 정도 확보한 다음에야 대중은 분명한 태도로 자유와 민주주의, 사회정의와 인권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그렇게 해서 일어났다.
 _유시민 「나의 한국현대사」


이렇게 양자택일의 전쟁은 단계의 문제가 되었다.


참고로, '모든 민주주의는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이 문구는 토크빌이 한 말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을 하고, 심지어 유시민도 책에서 토크빌의 어록으로 언급한다. (정확히 따지면, 토크빌이 한 말로 알려져 있다고, 언급한다.)


정부는 그 나라를 구성하는 개인들을 반영한다. 국민보다 수준이 높은 정부라 하더라도 결국에는 국민들의 수준으로 끌어내려지게 마련이다. 국민보다 수준이 낮은 정부가 장기적으로는 국민의 수준으로 끌어올려지듯이 말이다. 한 나라의 품격은 마치 물의 높낮이가 결정되듯이 자연의 순리에 따라 법 체계와 정부 안에 드러날 수밖에 없다. 고상한 국민은 고상하게 다스려질 것이고, 무지하고 부패한 국민은 무지막지하게 다스려질 것이다.
 _새뮤얼 스마일즈 「자조론」


이제 우리는 민주주의에 어울리는 사람들이 되었다. 우리가 뽑은 대통령에 어느 정도 어울리는 사람인 것이다. 워라밸, 욜로라는 단어가 유행이 될 정도로, 경제적·정신적·시간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다. 전보다는 서로 너그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박산업과 노민주는 그렇게 형동생을 하기로 했다가, 누가 형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치고 박고 싸우고 있다.



※ 이 글을 보고 악플을 달고 싶은 분들에게 미리 말한다. 나는 유시민 좋아한다. 아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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