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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원댄싱머신 Apr 26. 2019

누가 누구를 먹었는지 헷갈린다

 _한강 「채식주의자」

영혜는 어느 날 갑자기 꿈을 꾸기 시작하면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다. 이상한 얼굴이 나오는 꿈, 날고기를 씹어 먹은 듯한 꿈이었다. 두렵다. 그동안 자신이 먹어왔던 고기. 죽여왔던 동물이 그를 괴롭혔다.


이제는 오분 이상 잠들지 못해. 설핏 의식이 나가자마자 꿈이야. 아니, 꿈이라고도 할 수 없어. 짧은 장면들이 단속적으로 덮쳐와. 번들거리는 짐승의 눈, 피의 형상, 파헤쳐진 두개골, 그리고 다시 맹수의 눈. 내 뱃속에서 올라온 것 같은 눈. 떨면서 눈을 뜨면 내 손을 확인해. 내 손톱이 아직 부드러운지, 내 이빨이 아직 온순한지.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야위는 거지. 이젠 더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
 _한강 「채식주의자」


항상 가해자였던 것은 아니다. 피해자였던 적도 있다. 아버지의 폭력 때문에, 집에 들어가고 싶어하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그의 가족, 그의 남편, 어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는 오랫동안 피해자면서 가해자였다. 하지만 문명 앞에서 피해자와 가해자를 나누는 것은 무의미하다. 가해자는 가해라는 사실로 인해 피해자가 된다.


누군가가 사람을 죽여서, 다른 누군가가 그걸 감쪽같이 숨겨줬는데, 깨는 순간 잊었어. 죽인 사람이 난지, 아니면 살해된 쪽인지. 죽인 사람이 나라면, 내 손에 죽은 사람이 누군지. 혹 당신일까. 아주 가까운 사람이었는데. 아니면, 당신이 날 죽였던가......
 _한강 「채식주의자」


누가 누구를 먹은 것인지조차 헷갈리는 폭력 속에, 폭력을 기반으로, 우리는 살고 있다. 그는 고기를 먹은 것이 문제였다고 생각해 더이상 고기를 먹지 않기로 결정한다.


큰 폭력을 저지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수많은 작은 폭력 없이는 살 수 없다. 화살을 쏘고 함정을 만들어서 멧돼지를 사냥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손을 더럽히지 않는다. 우아하게 차려입고, 고기보다 몇 배는 넓어 보이는 접시에, 그림처럼 뿌려진 소스와 함께 스테이크를 썬다. 마트에 진열된 소고기의 마블링을 보면서 '아름답다'를 외친다.


페이스북의 CEO, 마크 저커버그는 고기를 손수 잡는다. 고기를 먹으려면 동물을 죽여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함이라고 한다. 마크 저커버그가 윤리적 육식주의자라고 한다면,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은 채식주의자라 불린다. 채식주의자도 여러가지 단계가 있다. 물고기는 먹는 페스코부터, 우유조차 먹지 않는 비건까지 다양하다. 그리고 영혜는 어느 순간 결심한다.


"고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녀는 말했다.
"고기만 안 먹으면 그 얼굴들이 나타나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그녀의 말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의지와 무관하게 차츰 그의 눈은 감겼다.
"그러니까...... 이제 알았어요. 그게 내 뱃속 얼굴이라는 걸. 뱃속에서부터 올라온 얼굴이라는 걸."
앞뒤를 알 수 없는 그녀의 말을 자장가 삼아, 그는 끝없이 수직으로 낙하하듯 잠들었다.
"이제 무섭지 않아요. ......무서워하지 않을 거예요."
 _한강 「채식주의자」


생존에는 폭력이 필수적으로 동반될 수밖에 없다. 몸 안에 엽록체가 있어 광합성을 하지 않는 한, 생존은 그 자체로 다른 생명의 파괴와 흡수를 전제한다. 그래서 그는 틈만 나면 옷을 벗고 햇볕을 쬐려 한다. 아무것도 파괴하지 않는 나무가 되고 싶은 것이다. 나무가 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삶은 끝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어떻게든 음식을 먹이고,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되묻는다.


영혜의 음성은 느리고 낮았지만 단호했다. 더이상 냉정할 수 없을 것 같은 어조였다. 마침내 그녀는 참았던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네가! 죽을까봐 그러잖아!
영혜는 고개를 돌려, 낯선 여자를 바라보듯 그녀를 물끄러미 건너다보았다. 이윽고 흘러나온 질문을 마지막으로 영혜는 입을 다물었다.
....왜, 죽으면 안되는 거야?
 _한강 「채식주의자」


한병철은 모두가 '할수있어'를 외치는 사회에서 벗어나는 것은, 단순하게 못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할수있음' 자체에 대한 거부다. 그래서 그는 '할수있을수없음'을 이야기한다.


에로스는 성과와 할 수 있음의 피안에서 성립하는 타자와의 관계다. '할수있을수없음'이 에로스에 핵심적인 부정 조동사다. 다르다는 것의 부정성, 즉 할 수 있음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나 있는 타자의 아토피아가 에로스적 경험의 본질적 성분을 이룬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영혜는 '무엇이든먹을수있어'를 외치는 사회에서 벗어난다. 폭력을 동반한 문명 사회에서, 더 작은 폭력을 선택하는 것조차 거부하고, 문명 자체를, 폭력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문명의 거부는 곧 죽음이다. 타자에 대한 폭력을 거부하고 죽음을 선택해야만, 세계와 화해할 수 있다.


절대적 결론으로서의 사랑은 죽음 속을 통과한다. 사랑하는 자는 타자 속에서 죽지만 이 죽음에 뒤이어 자기 자신으로의 귀환이 이루어진다. ... 헤겔이 말하는 "타자로부터 자기 자신으로의 화해로운 귀환"은 그런 것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것은 오히려 나 자신을 희생하고 포기한 뒤에 오는 타자의 선물이다.
 _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끊임없는 오해와 쉴틈 없는 괴롭힘을 당하는 영혜는, 의외로 불쌍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단호한 수도승의 태도로 걸어간다. 그는 자기희생과 포기를 통해, 세계와의 화해라는 선물을 받는다.


점차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볼 수 있었다. 그제야 그는 그녀의 표정이 마치 수도승처럼 담담하다는 것을 알았다. 지나치게 담담해, 대체 얼마나 지독한 것들이 삭혀지거나 앙금으로 가라앉고 난 뒤의 표면인가, 하는 두려움마저 느끼게 하는 시선이었다.
 _한강 「채식주의자」


우리 중 누가 스스로에게 희생을 선물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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