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박소정 「연애정경」
오랜만에 읽은 사화과학 서적이다. 저자는 서울대에서 배우고 서울대에서 연구하고 있다. 역시 배운 분이 쓴 글이라 그런지, 구조가 잘 짜여 있다. 처음부터 딱 정하고 시작한다.
이제, 우리의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할 거다. 그러면 먼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파악해야 하니까, 신자유주의를 살펴본다. 그 다음에 연애 이야기로 들어갈 건데, 연애는 서양 근대에서 넘어온 거니까, 서양 근대 연애부터 시작해서 지금 우리의 연애까지 올라올 거다. 그리고 이때 활용할 사료는 영화다. 영화를 예로 들어서 연애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이야기해볼 요량이다.
이렇게 깔끔하게 도로를 닦아놓으니까, 길을 따라가기 편하다.
저자는 여러 사회학자, 철학자들의 개념을 인용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 글을 보고 나서, 직접 책을 읽으면, 다소 어렵다고 느낄 수 있다. 논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내가 쓰는 이 글은 자의적으로 이해, 또는 오해하고, 내 언어를 통해서 쉽게 정리했다는 점을 미리 밝힌다. 역사와 영화 이야기는 제외하고 지금 우리의 연애 이야기만 소개한다.
신자유주의
우리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스태그플레이션으로부터 탄생했다는 이야기는 생략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건 노동유연화다. 사용자가 노동을 탄력적으로 재배분할 수 있다는 의미인 노동유연화는, 간단히 말해 노동자를 쉽게 해고할 수 있는 제도를 말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IMF 외환위기 이후, 정책적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그로 인한 결과는 생존주의다.
생존주의
사회학자 김홍중은 이러한 실존 조건을 두고 '생존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생존이란 '삶의 거의 모든 영역 또는 생애 과정 전체에서 진행되고 있는 경쟁 상황에서 도태되거나 낙오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며, 이는 오늘날 우리 마음의 레짐이 되었다고 말한다.
노동자를 낙오시키는 사회에서, 개인은 낙오하지 않기 위해서 아둥바둥 하는 사고 방식을 자연스럽게 가지게 된다. 자기계발이 성공한 몇몇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모두가 자기계발을 한다. 사람들이 '영어 공부해야지', '운동해야지' 하는 말들을 습관처럼 달고 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무도 나를 보호해주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를 더 경쟁력 있는 노동자로 만드는 것이다. 개인도 기업과 같은 생존 전략을 택한다.
신자유주의 체제 역시 특정한 주체성을 보유한 개인을 만든다. 사회학자 서동진은 이를 '자기 계발 하는 주체'라고 명명한다. 자기 계발은 보통 자신의 재능이나 자질을 발달시키는 과정을 의미한다. 개인 내면의 성장을 목표로 하는 자기 계발은 활기차고 부지런한 삶을 만들어 주는 요소로 늘 장려된다.
자기 계발하는 주체는 데이트 하는 시간과 자기 계발 하는 시간 사이에 저울질을 한다. 연애를 사치로 여기기도 한다.
잉여
생존주의의 이면에 잉여 문화가 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생산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소통이 오간다. 자극적인 뉴스에 욕하듯이 댓글을 달고, 연예인이나 애니메이션에 서울대 갈 듯이 파고든다. 이 두 가지 상반된 장면이 만나서 우리의 모습을 그린다.
속물과 잉여, 신자유주의 체제가 생산한 현시대 한국 청년들의 초상이다. 상반한 성격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이들에게서 공통적인 특성을 찾을 수 있다. 바로 연애, 결혼, 출산으로 이루어지는 '친밀성 영역'을 포기한다는 점이다. 날마다 생존이 목적인 치열하고 속물적인 삶을 살든, 생산하지 못하며 부유하는 잉여로 살든 이들은 친밀성 영역을 우선 포기한다.
썸
연애와 결혼이 부담스럽지만, 그래도 친밀성의 영역을 놓지 못하는 사람들은 썸을 탄다. 썸이라고 하면 정기고와 소유만 떠오르는데, 썸에 대한 저자의 고품격 설명이 무릎을 치게 만든다. 역시 배운 분이다.
근대의 시작과 맥을 같이한 연애는 시대를 거치며 다양한 형태로 변화해 왔다. 연애는 스스로 형태를 변화하는 것을 넘어 독특한 관계 양식을 부산물로 만들어 내기에 이른다. 우리는 '의심과 확신의 경계 그 어딘가'를 '썸'이라고 부른다. 썸은 공식적인 연인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감정적 충실의 의무와 약속에서 자유롭다. 그러나 상호 호감에 대한 암묵적 합의는 갖추고 있기에 둘은 형용하기 어려운 관계다.
프로젝트
속물과 잉여가 함께 가듯이, 연애에 대한 부담과 함께 연애에 대한 욕망은 커져간다.
연인이 없다는 것은 결핍되고 비정상적인 상태이며, 연애 경험은 스펙을 쌓는 것과 마찬가지로 많거나 잘할수록 좋다. 개인에게 연애는 '잘' 해야 하고 '많이' 해야 하는 프로젝트가 되고 있다.
마치 마일리지를 쌓듯 연애를 많이 해서 누적되는 경험에 가치를 부여한다. 연애를 많이 하는 것이 당연한, 일종의 연애 정상화 현상이다.
이별
연애와 자기계발은 서로 부딪히는 저울질의 문제기도 하지만, 연애가 정상화되고 스펙화되면서 비로소 화해한다.
일루즈가 말한 감정적 개인주의가 발동한 개인에게 연애 실패는 상처보다 성장이다. 연애 실패로 인한 충격이 자아를 위협하지 않도록 이별을 긍정한다. 나아가 연애는 자기 계발의 영역과 중첩된다. 연애와 이별은 한 번의 경험으로 양화돼 축적되고, 개인은 그만큼 자신을 계발하고 연애 스펙을 쌓았다고 여긴다. 이별은 연애의 종지부가 아니다. 연애의 정상적 과정 중 하나로 썸이 연애 전 하나의 단계(반드시 연애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지만)라면 이별 역시 연애 이후 단계가 된다.
굉장히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이 정도만 소개한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역사와 영화에 대한 부분도 소개하고 싶다.
★★★★★ 아주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