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허먼 멜빌 「필경사 바틀비」
나는 넌지시 말을 건넸다.
"하지만 터키, 잉크 얼룩은......"
"그렇죠...... 하지만 삼가는 마음으로 말씀드립니다만, 변호사님, 이 머리 좀 보세요. 전 늙어가고 있습니다. 아무려면 무더운 오후에 떨어뜨린 잉크 얼룩 한둘 때문에 흰머리가 심하게 압박받아서는 안 되겠죠. 비록 서류를 얼룩지게 할지언정 노년은 존경을 받아 마땅합니다. 삼가는 마음으로 말씀드립니다만, 변호사님, 우리는 함께 늙어가고 있습니다."
동류의식을 겨냥한 그 호소에는 도저히 저항할 수 없었다.
... 니퍼스에 관한 한 그가 다른 면에서 어떠한 결점을 가지고 있든 나는 그가 적어도 술을 절제할 줄 아는 청년이라는 충분한 확신이 있었다. 자연은 양조업자처럼 그에게 성마르고 브랜디 같은 기질을 가득 채워 세상에 내보낸 듯했고 그래서 그는 따로 술이 필요하지 않아 보였다.
소화불량이라는 괴상한 원인 때문이긴 하지만 니퍼스의 성마름과 이에 따른 신경과민이 주로 오전에만 나타날 뿐 오후만 되면 그가 비교적 온순했던 것은 나로서는 천만다행이었다. 터키의 발작이 열두시쯤에야 시작했기 때문에 나는 한 번도 두 사람의 기행을 일시에 겪지 않아도 되었다. 그들의 발작은 보초가 서로 교대하듯 번갈아가며 나타났다.
바틀비는 처음에는 놀라운 분량을 필사했다. 마치 오랫동안 필사에 굶주린 것처럼 문서로 실컷 배를 채우는 듯했다. 소화하기 위해 잠시 멈추는 법도 없었다. 낮에는 햇빛 아래, 밤에는 촛불을 밝히고 계속 필사했다. 그가 쾌활한 모습으로 열심히 일했다면 가는 그의 근면함에 매우 기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창백하게, 기계적으로 필사했다.
나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바틀비는 생강과자를 먹고 사는 거군. 엄밀히 말하자면 그는 전혀 식사를 하지 않아. 그렇다면 채식주의자임에 틀림없어. 아니야. 채소조차도 먹는 적이 없는데, 생강과자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고. 나는 머릿속으로 생강과자만 먹고 살 경우 인체 구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공상을 계속했다.
"바틀비. 진저 너트가 없는데 자네가 우체국에 좀 다녀오지 않겠나? (걸어서 삼 분 거리였다.) 가서 내게 배달 온 게 있나 좀 보게."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안 하겠다고?"
"안 하는 편을 택한다고요."
나는 비틀거리며 자리로 돌아와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굴무침이 집힌 젓가락이 입을 향해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아내는 몸을 뒤로 힘껏 젖혔다.
"얼른 먹어. 팔 아프다......"
장모의 팔이 실제로 떨렸다. 아내는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안 먹어요."
처음으로 아내의 입에서 또렷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뭐야!"
고함을 지른 것은, 비슷한 다혈질인 장인과 처남이 함께였다. 처남댁이 얼른 처남의 팔을 잡았다.
"보고 있으려니 내 가슴이 터진다. 이 애비 말이 말 같지 않아? 먹으라면 먹어!"
나는 아내가 '죄송해요, 아버지. 하지만 못 먹겠어요.'라고 대답하리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죄송하지 않은 듯한 말투로 담담히 말했다.
"저는 고기를 안 먹어요."
절망한 장모의 젓가락이 거두어졌다. 늙은 그녀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곧 폭발할 듯한 정적이 흘렀다.
_한강 「채식주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