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정치머신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태원댄싱머신 Jul 17. 2020

디지털 교도소

경찰에서도 밝히지 않는 성폭력 범죄자들의 신상을 터는 온라인 자경단, 온라인 배트맨이 나타났다. 분명 고소당할 게 뻔하고 명예훼손으로 벌금을 내겠지만. 그는 당당하다.

사이트에 들어가보니 현직군인과 기획사 사장 등 수많은 성폭력 범죄자들의 얼굴과 범행들이 적혀있다. 민망할 정도로 구체적으로 나와있다. 인스타와 블로그까지 어떻게 알아냈는지, 전부 공개했다. 피해자와 언론을 통해서 정보를 수집한다는 데, 결코 손 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양은 아니다.

https://nbunbang.ru


자경단

자경단은 국가에 대한 신뢰가 없을 때 나타난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직접 나쁜놈을 단죄하는 방식인데, 21세기 대한민국에 나타났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솜방망이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사람들은 처벌을 전혀 받지 않았거나, 처벌이 깃털처럼 가볍다. 판사들은 솜방망이를 들고 있다. 사람들이 느끼는 답답함은 이제 어느 정도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런 의미에서 자력구제는 나름의 대리만족을 준다. 시원하다.

마냥

마냥 좋게 볼수만은 없다. 객관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검증 능력을 갖춘 기관도 아니다. 시스템도 없고 운영자의 개인적 판단에 의존한다. 그래서 언제 한 번 실수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성범죄자들의 고소보다, 운영자의 실수가 더 무섭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 분명 무고한 사람의 링크를 잘못 연결하는 일도 생길 것 같다. 디지털 교도소에 수감된 피의자들의 변명은 대부분 해킹당한 거라느니, 내 이야기가 아니, 라는 식이다. 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교수

디지털 교도소를 보면 특정 직업군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교수다. 이상하게 많다. 교수의 직업병인지, 유명한 교수들이 자신이 지도하는 대학원생에 대해 깁질을 밥 먹듯이, 논문 베끼듯이 하는 경우를 종종 보고 듣는다. 하지만 처벌이 없다. 피해자는 을이기 때문이다. 좁은 업계를 떠나겠다고 마음먹지 않는 한, 명망있는 교수를 고발하는 건 불가능하다.

실명

성범죄자에 대한 실명 폭로와는 조금 거리가 있지만, 실명 비판은 전부터 강준만이 실천해왔던 중요한 태도다. 사회고위층, 교수나 정치인, 언론인들은 동종업계에 대한 이야기를 꺼린다. 서로 나쁜 말 하면 좋을 게 없으니 다들 하나마나한 이야기로 대충 마무리를 짓는다. 그때 강준만이라는 배트맨이 홀로 날아와 사람들을 마구 저격해댔다. 강준만은 금기를 깨고 성역을 건드린 역적이 되었고, 실명 공개의 대상이 된 사람들은 강준만을 비난했지만, 결국 그의 태도는 옳았다. 실명을 거론하며 비판하지 않으면 바뀌는 것은 없다.


실명비판으로 인해 비판의 주체뿐 아니라 객체 또한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그럴 터다. '실명'을 거론하며 비판하니 말이다. 실명비판을 당한 사람은 순식간에 '객체'가 된다. 더는 집단의 안전한 치마폭에 숨어 있을 수가 없다. 이 경우 대응 방법은 두 가지일 것이다. 스스로 '주체'가 되어 강준만을 비판하거나, 어떤 정치적인 수단을 사용해 자신을 비판한 이에게 불이익을 안겨주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후자를 택했지만, 강준만은 전자를 택하는 이들에게 기꺼이 「인물과 사상」의 지면을 내주었기에 우리는 「인물과 사상」을 통해 당시 벌어졌던 논쟁을 상당수 복원해낼 수도 있다. 그들 중 일부가 지금까지 우리에게 '논객'으로 기억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_노정태 「논객시대」


교도소장


교도소장은 정의감에 불타서 열심히 재소자들을 모으고 있다. 영화 다크나이트를 보듯이, 응원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그래도 언젠가  교도소는 문 닫았으면 좋겠다. 성범죄자들을 굳이 디지털 교도소에 가두지 않았으면 한다. 언젠가.


스스로 자신의 소명을 설정하고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은 뒤, 그 소명을 달성함을 통해 존재 이유를 잃고, 스스로 소멸해버리는 방식이 있다. 마치 위성을 궤도에 올려놓고 나서 검은 우주 속에서 밝게 소멸해버리는 로켓추진체처럼.
 _김영민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매거진의 이전글 독재가 끝나야 말할 수 있다, 독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