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친구가 멀리 살기 때문에 주말마다 KTX를 탄다. 매주 타니, 이제는 거의 지하철만큼 익숙하다. 매번 기차를 타는 게 안쓰러웠는지, 이번에는 여자친구가 돌아오는 비행기표를 끊어줬다. 갈 때는 KTX로 가지만, 돌아올 때는 비행기를 타면 된다고 한다. 공항만 생각해도 설렌다. 바로 집에 가긴 아쉬우니 조금 어슬렁 거리다 갈까? 뭐라도 하나 먹고 집에 갈까? 원래 스님처럼 평정심을 유지하지만, 이날은 아침부터 설렜다.
저녁 7시 비행기여서, 6시 30분까지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갑자기 생각난 게
여.권.
여권이 없다. 정리하던 가방을 내려놓고 급하게 여자친구에게 달려갔다. 국내선이니까 여권 필요없지? 긴장하며 물었다. 여자친구는 별걸 다 질문한다며, 가볍게 대답했다. 아니, 국내선이니까 여권은 필요없어. 신분증만 있으면 돼.
신.분.증.
신분증이 없다. 평소에 사용할 일이 없으니 가지고 다니지도 않는다. 온 집안을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정.신.
정신이 없다. 우리집도 아니니까 돌아다녀봤자 아무 소용없지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평소에 여자친구에게는 해탈한 스님처럼 욕망을 버리라고 훈계해놓고, 막상 이런 상황에 처하니까 답이 없다. 스님은 무슨!
KTX도 고속버스도 내일 오전까지 매진이었다. 내일은 월요일이고, 누군가 회사에 불이라도 지르지 않는다면, 당연히 오전에 출근해야 한다. 성냥이 어디에 있나, 발을 동동 구르던 사이, 처음에 매진이었던 버스에 딱 한자리가 나왔다. 회사에 불이라도 났을까? 누가 취소했나보다. 재빠르게 예약했다. 일단 서울로 돌아가는 문제는 해결되었다. 좌석은 구했지만, 감정은 여전히 남아서 허우적 거리고 있었다. 스님은 무슨!
상황을 계속 곱씹으며 스트레스 받던 나를, 여자친구가 조용히 불렀다. 여기 읽어보라며 책을 건넸다. 「불행에 대처하는 방법」이라는 글이었다. 여자친구 품 안으로 쏘옥 들어가서 읽었다.
차를 긁고 나서 끊임없이 이를 곱씹으며 후회하고 괴로워하던 허지웅의 이야기다. 어느 순간 허지웅은 분노의 되새김질을 멈춘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면 된다. 이게 허지웅의 깨달음이었다.
벌어질 일은 반드시 벌어진다. 운명 이야기가 아니다. 충분한 원인과 조건이 갖추어졌기 때문에 결국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일이라는 이야기다. 피할 수 없다.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결과를 감당하며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있는 힘껏 노력할 뿐이다.
_허지웅 「살고 싶다는 농담」
지금 내 상황에 딱 맞는 이야기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글이 너무 좋았다. 의미 있는 문장은 간결하게, 가벼운 문장은 아름답게 표현한 허지웅의 글을 읽다보니, 오래된 분노는 되새김질을 끝내고 소화 단계로 넘어갔다. 스스로에 대한 자책과 분노를 대신한 건 허지웅에 대한 분노와 질투였다.
「사랑은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 라는 노래가 있다. 사랑은 모르겠지만, 이건 확실하다.
분노는 다른 분노로 잊혀진다.
허지웅의 글은 모든 문단이 적절했다. 뺄 것도 없고, 덧붙일 것도 없다. 다소 뻔한 이야기는 생생한 묘사로 가고, 삶의 깨달음을 주는 문단은 깔끔하고 간결하게 간다. 중간중간 유머도 잊지 않는다.
수준 높은 글을 쓰는 게 단순히 타고난 재능 때문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밉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뭔가 분위기 있어 보이는 남자의 필수품, 불우한 어린 시절을 장착하고 있다. 수십 년간 갈고 닦은 철학과 태도 그리고 글솜씨로 만들어낸 작품이다. 누구라도 이 책을 읽으면 반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글을 쓰는 남자라니. 여자친구도 이 주옥 같은 책을 읽고 허지웅에게 반했다. 내 기분도 주옥 같다.
여자친구 품 안에서 생각했다. 오늘부터 내 주적은 북한이 아니라 허지웅이다.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절필 선언이 없다면, 휴전은 있어도 종전은 없다.
* 2003년 미국은 북핵문제 해결방안으로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폐기 원칙을 제시했다. 그리고 이 원칙에 따른 ‘선 핵폐기’ 조치를 요구했다. 북한은 당연히 반발했고, 대신에 일괄타결, 동시행동 입장을 고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