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에도 원칙이 있다

by 이태원댄싱머신

나는 여자친구에게 종종 거짓말을 한다. 조미료를 뿌리면 더 맛있어 지는 요리처럼, 거짓말은 연애에 감칠맛을 더해준다. 물론 남발하면 안된다. 라면 스프도 넣는 순서와 방법이 있듯이, 거짓말도 나름의 원칙변칙을 지켜서 뿌려야한다.


원칙 : 상대방이 거짓말임을 인지해야 한다.


상대방이 거짓말인지 모르면, 그건 기만이다. 누군가를 정말로 속이고 싶다면 그게 꼭 여자친구일 필요는 없다. 차라리 나 스스로를 속이자. 나는 여자친구가 내 거짓말에 속는지, 속아주는지 꼭 확인한다. 속아준다면 조미료 맞다. 정말 깜빡 속아넘어간다면,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으며...


사랑을 변질시키고 부패시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라 덜 피어 궁색한 거짓말이다. 방부제가 필요하다면 잘 익은 거짓말에 푹 담가야 한다. 걸음걸음마다 구라와 공갈이 꽃잎처럼 뚝뚝 떨어지도록.
_전석순 「거의 모든 거짓말」


항상 궁색한 거짓말만 하면, 신뢰를 잃게 되니, 가끔 변칙도 사용한다.


변칙 : 거짓말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는다.


사과를 먹었는데 응? 파인애플인가? 헷갈린다면 그건 부사다. 사과와 파인애플의 경계에서, 새콤달콤함을 뽐낸다. 거짓말도 부사를 잘 사용해야 한다. 거의, 대부분, 잘 등 애매한 표현을 사용하면 거짓말의 경계에서 벗어날 듯 말 듯 춤출 수 있다. 여자친구도 내 멱살을 잡았다 놨다 한다.


자격증 심사 위원회에서는 어느새 3급 자격증 취득자가 워드 자격증 소지자를 거의 따라잡았다고 발표했다. 2급으로 지낸 지 오래된 나는 '거의'라는 말의 범위가 정해져 있지 않아 발표된 내용의 과장이나 축소 혹은 은폐일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_전석순 「거의 모든 거짓말」


이태원 바에서 위스키를 마시던 중이었다. 음악이 귀에 거슬리지 않고 은은하다. 내가 좋아하는 분위기다. 손가락으로 탁자를 탁탁 치더니, 갑자기 여자친구가 창을 든다. 이태원 많이 와봤나 보네? 누구랑 왔어? 여자?


나는 부랴부랴 먹던 위스키잔을 내려놓고, 방패를 든다. 응? 아니야. 나는 거의 모태솔로인거 알잖아. 여기 이태원? 대부분 몰라. 여자? 기억도 안나. 하하. 하하하하핳.


이 정도면 잘 방어했다, 하는 뿌듯함으로 위스키를 넘긴다. 새콤달콤 맛있다. 여자친구는 뭐 이딴놈이 다 있나, 하는 표정이다.


그러자 아내는 미친놈한테 별 미친 소리를 듣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_오찬호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는 여자친구의 입버릇인데, 오늘도 빼먹을 수 없나 보다. 여자친구의 입버릇이 음악과 절묘하게 어울린다.


말이나 못하면 둥둥 밉지나 않지 둥둥


여자친구의 입버릇을 조미료 삼아서 솔솔 뿌리고 위스키를 홀짝홀짝 마신다. 오늘따라 위스키가 유난히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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