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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원댄싱머신 May 25. 2019

상처도 지쳐서 저절로 아물었다

 _한병철 「피로사회」

브금* : No Reply - 이렇게 살고 있어


한국계 독일철학자, 나와 동시대에 살고 있는 슈퍼스타 한병철의 저작이다. 그는 이 책에서 ‘긍정’이라는 단어를 새롭게 해석한다.


SNS에 매일 올라오는 긍정 메시지들이 있다. 그림까지 곁들여서 멋지게 올라온다. 과거에는 바람직하거나 의미 있는 메시지라고 생각했으나, 이제는 알게 되었다. 긍정의 다른 이름은 ‘자기 착취’라는 것을.


*브금 : BGM을 한국식 발음 그대로 읽었다. 뜻은 Background Music, 즉, 배경음악이다.

*SNS에 넘쳐나는 긍정메세지

 나만이 인생을 바꿀 수 있다. 아무도 날 대신해 줄 수 없다. #캐롤버넷 #좋은글 #긍정 #하면된다

 우리는 살아있는 날마다 항상 최선을 다 해야해. #스누피 #명언 #일상

 할 수 있다고 생각하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든, 당신의 생각대로 된다. #헨리포드 #공감 #미래 #좋은글




긍정의 세계 / 부정의 세계


한병철은 긍정의 세계와 부정의 세계를 비교해 가며 설명한다. 이 구분은 너무나 간명해서 이해가 쏙쏙 된다. 그렇다고 저자가 특별히 쉽게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간단한 것도 지나치게 어렵게 설명하는 서양철학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이 두 세계는 모던과 포스트모던으로 부를 수도 있는데, 이 책에서는 매우 다채로운 표현으로 비교 설명한다.


부정의 세계는 규율사회다. must*라는 조동사가 자주 사용된다. 자유로운 야생의 인간을 말 잘 듣는 노동자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이 규율이다.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남들처럼 행동하고, 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 반대되는 것이 긍정의 세계다. 성과사회고, can*이라는 조동사가 자주 사용된다. YES, I CAN! (유재석이 떠오른다.) 굳이 감시하고 명령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헛된 희망에 부풀어 야근, 과로를 당연하게 여긴다. 고등교육을 마친 사람들은 '언젠가 나도 CEO가 될지 몰라.', '언젠가 내 집을 소유할지 몰라.' 상상하며, 자신의 현실가능한 미래를 애써 무시한다. 잡힐 듯 말 듯 아슬아슬, 눈 앞에 아른거리는 꿈들이 (노오력에도 불구하고) 잡히지 않을 때, 사람들에게는 우울증이 찾아오게 되고, 낙오자가 되고 만다.


*서양철학병 : 독일에서 공부해서 걸린 듯하다. 비슷한 질병으로, 복합하고 심오한 것도 지나치게 간단하게 설명해버리는 동양철학병도 있다.

*must : 책에서는 독일어 단어 sollen 으로 표현한다.

*can : 독일어로는 können 이다.




현실


그럼 현실로 돌아와 보자. 지금 우리는 긍정의 사회에 살고 있다. 시크릿, 왓칭, 수많은 책*들이 우리를 격려하고 있다. 시골, 가난한 집안의 맏아들로 태어나도 꿈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하면 서울대에 갈 수 있다고, 개천에서 용 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대치동에서 태어난 친구가 1000배*는 유리하겠지만, 어쨌든 죽어라 노력해서 농어촌 전형으로 들어갔다고 치자. 서울대에서도 문과출신은 대기업 들어가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외하면서 장학금 받고 학점 잘 받아서, 삼성 들어갔다고 하자. 대기업 신입사원의 절반이 1년 안에 그만둔다고 하지만, 그래도 밤낮없이 일하고 주말에도 출근하고, 회식이라도 하면 위에게 미안해하고 간에게 사죄하면서 버틴다고 하자. 여기까지 잘 왔지만, 여전히 우리는 시지프스*다.


신들이 시지프에게 내린 형벌은 쉬지 않고 바위를 굴려 산꼭대기까지 올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산꼭대기에 오르면, 바위는 그 자체의 무게 때문에 다시 굴러 떨어지곤 했다. 그들이 허무하고 희망 없는 노동보다 더 끔찍한 형벌은 없다고 생각한 것은 일리가 있었다.
 _알베르 카뮈 「시지프신화」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바위를 밀고 있는 것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다. 유례없는 고학력의 온실 속 산업역군들은 더 열심히 일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책을 읽는다. 자기계발서* 코너 베스트셀러 중에는 시간 관리, 성과 내는 방법, 더 열심히 준비하고 발표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들이 빠지지 않는다.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화려한 삶은 우리 것이 아니다. 지금 당장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드라마를 찍는다면, 우리는 엑스트라, 행인일 것이다. 아니, 20년 후를 찍어도 사실 마찬가지다. 그렇다. 우리는 사실 수많은 범부들 중 하나일 뿐이다.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면서 대출이자를 고민하고 인사고과에 전전긍긍하며 사용자 걱정*까지 해준다. 모피어스는 우리에게 red pill과 blue pill*을 내민다. 나는 어떤 것을 집어야 할까.


*시크릿, 왓칭 : 노오력하면 온 우주의 힘이 도와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는 책. 온 우주의 힘 발언으로 유명해진 한 분은 2019년 현재, 구속되어 있다. 연금술사, 꿈꾸는 다락방 등의 책들이 더 있다.

*서울대 입학 : 2012~2016년 서울대 합격자 현황을 보면, 서울 출신이 40% 정도, 서울 출신 중에서는 강남, 서초, 송파, 이른바 강남3구 출신이 30%를 차지한다. 그렇다면 지방 출신은 정말로 지방에서 태어났을까? 아니면 주소만 시골인 자사고, 민사고 아이들일까?

*시지프스(Sisyphus) : 신의 미움을 산 인간이다. 끊임없이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계속해서 산 위로 올리는 형벌을 받았다. 시시포스, 시지프라고도 한다.

*자기계발서 : 제목만 훑어보자. 개인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자기경영. 술자리도 능력이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시간관리. 위대한 직장인은 어떻게 성장하는가.

*사용자 걱정 : 비정규직이 못살겠다고 파업을 하면 '사장도 먹고 살아야지' 하며, 사장 걱정을 다 해주는 너그러운 태도를 가리킨다. 연예인 걱정과 비슷한 개념.

*red pill & blue pill : 영화 Matrix에서 모피어스는 우리에게 선택권을 준다. 처참한 진실을 마주할지, 희망찬 거짓에서 살아갈지. 시크릿, 왓칭 등 희망 가득한 복음들을 열심히 읽어야 할까. 한데 모아 분서갱유 해야 할까.




달관


우리보다 앞서 불황을 맞이한 일본에서는 사토리* 세대로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절망적인 미래 앞에 주저앉았지만, 주저앉은 채로 지금 당장 행복하게 사는 그들. 그들의 모습 앞에서 절망이라는 단어와 행복이라는 단어는, 겹쳐 보인다.


인간은 어느 순간에 "지금 불행하다.", "지금 생활에 불만족을 느낀다."라고 대답하는 것일까? 오사와 마사치에 따르면, 그것은 "지금은 불행하지만, 장차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할 때라고 한다.
미래의 '가능성'이 남아 있는 사람이나 장래의 인생에 '희망'이 있는 사람은 "지금 불행하다."라고 말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자면, 이제 자신이 '이보다 더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 인간은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인간은 미래에 더 큰 희망을 걸지 않게 됐을 때, "지금 행복하다." 혹은 "지금의 생활에 만족한다."라고 대답하게 되는 것이다.
 _후루이치 노리토시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한국도 따라간다. 「트렌드코리아 2018」을 보면 그럴 듯한 신조어가 난무한다. 워라벨, 소확행, 케렌시아.* 화사한 케이크 사진이 올라오는 SNS에는 너무 행복해서, 자랑하지 않으려 해도 삐져나오는 행복을 어쩌지 못하는 사람들이 널려있다. 반면 게시판, 뉴스 댓글은 딴 세상이다. 노오력*이라는 말이 유행하며, 노력의 무용성을 설파한다. SNS의 벚꽃 사진과는 너무 대비된다. 여기서도 행복은 절망과 겹쳐 보인다.


*さとり : 일본어로 깨달음, 득도를 의미한다.

*워라벨, 소확행, 케렌시아 : 트렌트코리아2018 에서 소개하는 소비트렌드. 모두 지금 당장의 행복을 추구하는 방향이다.

*노오력 : 모든 것을 노력 부족 탓으로 돌리는 꼰대들을 비꼬는 신조어다.
 나는 그 어려운 환경에서도 이만큼 해냈는데, 부족한 게 없는 너는 왜 그렇게밖에 못하냐? _프란츠 카프카의 아버지
 패자가 목표에 열중할 때 승자는 시스템을 만든다 _스콧 애덤스




물 흐르듯이


그러면 우리는, 사회의 흐름에 이리저리 끌려다녀야 할까. 갈대처럼 흩날리면 되는 걸까. 규율시대에는 채찍질도 참고 견디며 말 잘 듣는 노동자. 성과시대에는 스스로를 착취해서 과로사하는 노동자. 달관의 시대에는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는 파트타임 노동자. 그렇게 살아가야만 할까? 일본제국주의 시대의 반민족친일부역자처럼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나 대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을까. 우리도 엄마아빠의 귀한 자식인데. 우리도 열심히 노력하고, 나쁜 짓하지 않고,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왔는데. 그런데도 피로를 부르는 사회에 자발적으로 이끌려 다니는 피로한 삶을 살아야 하는 걸까?


나는 그렇게 살고 있다.


카프카는 대단히 난해한 단편 「프로메테우스」에서 몇 차례에 걸쳐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재해석 작업을 수행한다. 첫 번째 재해석 시도에 따르면 “신들은 지쳤고 독수리도 지쳤으며 상처도 지쳐서 저절로 아물었다.” 나는 또 하나의 재해석을 통해 이 프로메테우스 전설을 내적 영혼의 장면으로, 즉 오늘날 스스로에게 폭력을 가하며 자기 자신과 전쟁을 치르고 있는 성과주체의 심리적 기구에 관한 묘사로 파악하고자 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과 함께 노동도 가져다주었다. 성과주체는 스스로 자유롭다고 믿지만 실은 프로메테우스처럼 묶여 있다. 끝없이 다시 자라나는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먹는 독수리는 성과주체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제2의 자아Alter Ego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프로메테우스와 독수리의 관계는 자기 착취의 관계인 셈이다. 피로란 스스로는 고통을 느낄 줄 모르는 간의 고통이라고들 한다. 따라서 자기 착취의 주체인 프로메테우스는 엄청난 피로에 빠지고 말 것이다.
 _한병철 「우울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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